제147화
스테이션에서 나온 직후.
나는 둘리와 함께 선로를 따라갔다.
속도로 생각하면 둘리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빠르지만, 일전에는 상공에서 플레이어들이 말한 지형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감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공에서는 볼 수 없도록 마법이나 다른 수를 써놨을 확률이 크다는 거지.’
지금으로선 시간이 걸리더라도 걸어서 가는 편이 나았다.
평소와는 달리 둘리도 이 결정에 관해선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보기보다 간단했다.
“한별 어서 걸어라!”
내 머리 위에 올라탄 둘리는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재촉했다.
왠지 모르게 들뜬 듯한 목소리.
어쩐지 순순히 내 말에 따르더니, 자기가 직접 걷는 게 아니라 부려 먹을 수 있어서 그런 거였나.
마음 같아선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나는 분을 삭이며 선로를 따라 뛰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살펴야 하니까.’
일단은 나도 기감을 살피고 있다지만, 기왕이면 역할 분배를 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선로를 따라 30분가량 뛰고 있었을까.
내 머리 위에 타고 있던 둘리가 움찔하더니 좌측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별 저기다! 저기에 뭔가 있는 기분이다!”
“저기에?”
둘리의 발언에 기감을 넓혀봤지만,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모로 의아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이런 쪽으로는 둘리가 나보다도 감이 더 좋았기 때문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선로에서 벗어나 좌측을 향해 나아가는데 멀리서부터 거무죽죽한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묘석이라고 착각할 만한 형체.
하나 가까이 다가가자 ㄴ자 형태의 건축물이 보였다.
건축물의 바닥은 점점 지하로 꺼지는 구조였는데, 겉보기에는 별다른 잠금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말했던 장소는 대충 여긴 거 같은데. 뭐지?”
용도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건 지하에서 묘한 기운을 풍긴다는 특이점이었다.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사태를 지켜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쯤, 어깨 위에 타고 있던 둘리가 내 팔을 이끌었다.
“뭐하나 한별? 어서 들어가자!”
“그럴까.”
간만의 모험에 기대되는 모양인지, 해맑게 말하는 둘리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렇게 고민해봤자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하에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묘한 감각이 전신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양쪽에 걸려 있던 횃불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마법 같은 걸로 인식한 건가?’
여러모로 의문이 들었으나 횃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려갔다.
“일단 내려가 보면 알겠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뒤를 의식하며 내려갔지만,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둘리 역시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하의 끝에 다다랐을 찰나, 넓은 공동에 불이 활짝 켜지며 그 중앙으로 자그마한 샘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경건하기까지 한 분위기.
실제로 샘물의 중앙에는 새하얀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는데, 그 빛무리에 닿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풀렸다.
며칠 밤낮을 푹 자고 일어난 듯한 컨디션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 이곳은?”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잘 못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고 그리고 겪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이전에도 탑을 등반하면서 봤었던 샘물.
그게 이곳의 정체였다.
내가 샘물임을 인지함과 동시에 상의 안에 파묻혀 있던 로자리오가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성물이 표식을 연속으로 발견함으로써 우연이 아니라 간주합니다.〉
〈성물에 성신의 권능이 깃듭니다.〉
- 전체 수집률: 64%
수집률이 이전에 비해서 급격히 상승했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일정 이상의 힘이 집약됨으로 인해 성신 카르텔이 당신의 앞으로 현현합니다.〉
“잠깐만… 현현한다는 뜻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와 같은 거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틈도 없이 샘물의 중앙에서 빛무리의 힘이 강해졌다.
샘물에서만 빛나던 빛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더니 이윽고 공동 전체를 채울 만한 섬광이 번뜩였다.
정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자, 그 앞으로 신비로운 기운을 머금은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초면이지만, 여자의 정체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신 카르텔?”
“맞아요. 제가 카르텔입니다.”
의아스러운 내 물음에 여자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자칭 성신 카르텔을 일컬은 여신은 이쪽을 향해 손을 펼치며 말했다.
“신한별, 당신의 여정은 제 권능이 담긴 로자리오를 통해서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좀 그런데.”
“그렇다 한별, 아무리 여신이라도 관음증이 있는 건 둘리가 봐도 별로다!”
내 말에 둘리가 설명을 덧붙이자, 카르텔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과, 관음증이라뇨!”
“그게 아니면 뭔데.”
“그저 이 세계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제게 직접 선별된 신한별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성신 카르텔의 명예를 걸고 아무런 흑심도 없었어요.”
농담으로 한 말 가지고, 명예라니 아무래도 성신이라는 작자는 어지간히도 고지식한 모양이었다.
그것보다도 나는 의문을 지었다.
“그런데 선별되다니 내가 언제?”
“그야 제 권능이 깃든 아티팩트를 손에 얻었을 때부터죠.”
“그래?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결정하고 관음이나 했다는 뜻이네?”
아무리 성신이라도 이 정도면 소름이 돋았다.
“자, 잠시만요! 제 말을… 제 말만 들어주시고 가세요! 아! 거기 로자리오는 던지지 마시고요!”
목에 건 로자리오를 던져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서려고 하자, 자칭 성신이라고 언급한 카르텔은 손을 뻗어 제지하려고 했다.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나는 로자리오를 도로 내려놓았다.
“바쁘니까. 세 마디로 줄여서 말해.”
“아니… 세 마디라니. 너무 짧은….”
“두 마디 남았어.”
손가락을 접으며 말하자, 카르텔은 입을 다물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탑을 없애고 지구를 안정화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이어진 그녀의 언급에 일순 관심이 동했다.
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꽤 심하기도 했고.
“나한테 찾아온 걸 보면 대책도 없이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그, 그게 어렵단 말이죠. 탑은 어디까지나 마신의 영역, 제 권능을 사용할 수 없어요.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일개 화신체에 불과해요. 그래서 샘물도 일부로 마신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려고 놈의 손이 안 닿는 구역에 힘을 분산해서 봉인했죠. 구원자를 찾기 위해서.”
그녀의 말에 내내 지니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그러고 보면 샘물이 위치한 장소들은 죄다 일반적인 경로와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카르텔의 몸 주변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녀는 눈가를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윽…. 제기랄. 아무래도 마신이 여길 알아차린 거 같아요. 길게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이걸 드릴게요! 나중에 필요하실지도 모를 테니까요!”
“잠깐만….”
내가 저지할 틈도 없이 성신 카르텔은 말을 쏘아붙였다.
〈성신 카르텔이 시스템창을 해킹합니다.〉
〈성신의 가호가 몸에 깃듭니다.〉
〈업적: 성신의 사도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그, ■럼 다음에 만날 ■까지 기다■■ 있을 ■요. ■■■■ ■ 전까지는 ■■ 건강하■■■!!!”
카르텔의 말에서 노이징이 겹쳐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천장에서 전격이 떨어지며 그녀의 몸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오르며 섬광이 떨어졌다.
〈41층이 강제로 종료되었습니다.〉
〈42층으로 이동합니다.〉
* * *
〈이곳은 42층의 대기실입니다.〉
〈히든 직업을 지닌 플레이어만 입장할 수 있는 층입니다.〉
〈목표 인원을 달성할 때까지 대기해주십시오.〉
눈을 뜨자 환한 조명과 함께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모양인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우려했던 것대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원망스러운 눈초리는 없었다.
그야 41층을 클리어하는 것에 큰 기여를 한 게 나였으며 또, 기다리는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덕분인듯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찰나, 익숙한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별 씨!”
“여어, 아저씨 늦었잖아.”
유채아와 소녀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 서로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이전에 비해서 꽤나 친근해 보이는 눈치였다.
“좌석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죽은 줄 알고 놀랐잖아. 도대체 뭘 한다고 늦은 거야?”
“뭐, 이래저래 볼 일이 있어서 말이지.”
소녀의 물음에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유채아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간 모양이었지만, 소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해서 꼬치꼬치 캐물어 볼 생각은 없는듯했다.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물기로 했다.
41층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해도 상관없지만, 굳이 알려줘서 혼란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의 물음에 적당히 대답을 하고 있을 때쯤.
하늘에서 가지각색의 폭죽이 화려하게 터졌다.
[자자⎯ 다들 바쁘신 건 알겠지만, 오래간만입니다~!]
폭죽에 시선을 향하고 있을 무렵, 하늘에서 균열이 발생하며 그곳에서 곰방대를 문 진행자가 나타났다.
30층대 이후로는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오래간만이긴 한데, 또 봐서 좋은 기분은 썩 들지 않았다. 그다지 심장에 안 좋달까.
[뭐, 아무개 씨는 절 봐서 딱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그건 용서해주시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제는 전매특허라고 해도 될 곰방대를 물며 진행자가 손을 활짝 펼쳤다.
[이미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이번 층은 히든 직업을 지닌 분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히든 직업만?”
“그럼 히든 직업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걱정마시죠. 히든 직업이 없는 분들은 이번 층은 그냥 통과입니다.]
이어진 이야기에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총 3가지였는데, 그중 첫 번째는 히든 직업을 지닌 파벌.
“탑이 그냥 보내준다고?”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잖아! 탑이 가끔 좋은 짓도 하구만 크하하하핫!”
두 번째는 히든 직업을 지닌 파벌.
“젠장! 지랄하지 마! 누구 마음대로 그걸 결정하고 있어!”
“누군 좋아서 히든 직업을 가진 줄 알아?”
마지막은 나와 같이 무표정을 한 자들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진행자는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공정성을 위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까놓고 말할게요. 히든 직업을 가져도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물론 불이익은 없어요. 다음 층으로 보내드리죠.”
이어진 진행자의 언급에 플레이어들은 얼굴을 활짝 밝혔다.
“그럼 지체 없이 가시죠. 히든 직업을 지닌 분들 중에 이번 층을 등반할 분만 오세요.”
그의 발언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히든 직업을 나만 가진 게 아닌 모양인지, 다른 플레이어도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총 인원은 일곱 명.
그리고 그중에는 유채아와 소녀도 있었다.
“뭐야. 아저씨도 가는 거야?”
“누가 아저씨라는 거야.”
“네네⎯ 알겠고요. 역시 아저씨도 같은 생각인가 보네. 아, 생각해보니 여기 있는 사람은 전부 마찬가지겠구나.”
능글맞은 소녀의 언급에 나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말 대로였다.
진행자는 등반할지 말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 말은 뻔하디 뻔했다.
‘이번 선택으로 크게 폭이 생길 거라는 거겠지.’
탑은 냉정하면서도 보상은 확실히 한다.
선택을 못 한 자, 선택을 포기한 자, 선택을 한 자.
과연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
분명 함정이 있을 것이다.
진행자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자, 역시 그는 이죽거리며 곰방대를 휘둘렀다.
[남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지 마시고요. 그럼 큰 결정을 해주신 여러분에게 부디 행운이 깃들 것을 기원하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발언과 동시에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눈을 뜨자, 곤히 잠든 둘리의 얼굴과 함께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호텔의 객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둘리를 깨우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는데, 그 순간 시스템창이 번뜩 떠올랐다.
〈42층은 히든 직업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도전한 플레이어들은 히든 직업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잃습니다.〉
※ 히든 직업의 권능은 42층을 클리어할 시에 복구됩니다.
시스템창을 읽은 다음, 나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뭐야, 워낙 난리 쳐서 엄청난 건가 싶었는데, 별거 없잖아.”
내가 지닌 히든 직업은 [이터].
솔직히 말해 상대방의 힘을 뺏어 제 것으로 만드는 것 외에는 그다지 쓸모없는 힘이다.
그런 힘을 빼앗아봤자... 어? 잠깐만 [이터]의 권능을 빼앗는다는 이야기라면 지금까지 내가 얻은 스탯은?
문득 뇌리에 떠오른 의문,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엄습해왔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의 벽면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슈우우웅!
힘차게 날아간 주먹은 호텔의 벽에 격돌했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어?”
* * *
※ TIP. 42층에서는 히든 직업으로 획득한 스탯이나 능력치, 권능이 전부 무효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