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꿀꺽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그런지, 목울대에서 침을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언제나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던 소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진정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훤히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멀쩡히 나아가던 열차의 종착역이 지옥으로 향하는 종착역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마지막 다섯 번째 재앙은 아마도 저것이리라.
‘곤란하게 됐네.’
나야 여의찮으면 투명 팔찌를 사용해 열차에서 탈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럴 수단이 없다.
어쩌면 저승으로 향하는 프리패스행일 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돌려 기관실에서 벗어났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소녀는 뒤따라오며 의아스러운 목소리를 자아냈다.
“아저씨? 갑자기 어딜 가?”
“어딜 가긴, 우선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긴 해야지.”
“알리다니! 지금 알렸다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소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나도 알아.”
소녀의 발언에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 보지 않았다. 어차피 소란이 일어나봤자, 열차가 절벽에 부딪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짧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섯 번째 재앙을 알리는 시스템창이 떠오르면 모두가 알 일이다.
갑작스럽게 닥치는 것보다는 1분이라도 빨리 마음의 준비라도 해두라지.
“그, 그래도….”
철컥!
뒤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녀를 무시한 채, 특등실의 입구에 들어서자 어두운 암흑 너머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좌석에 앉아 있는 모습.
‘누구지? 아니, 그것보다도 특등실에는 어떻게…?’
머릿속에서 여러모로 의문이 떠올랐지만, 여유롭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나는 포켓에서 빛의 정기를 꺼내 앞을 밝혔다.
어지간한 마법보다도 밝은 광량에 특등실의 내부는 훤히 밝혀졌다.
그리고 좌석에 앉아 있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뭐야. 둘리였었나.”
그러고 보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특등실에 두고 왔었지.
스팩타클한 일들이 워낙 많아서 잠시 잊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호들갑 떠는 반응이 없어서 살펴보니, 둘리는 쌕쌕 숨을 내쉬며 자는 중이었다.
게다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손잡이에 쌓여 있던 과일이 죄다 사라진 채였다.
그걸 보고서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누군 고생이나 하고 있는데, 배나 채우고 곯아떨어져?’
탑에서 가장 태평한 녀석을 손에 꼽으라면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둘리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던 그때였다.
문득 둘리의 상태가 시야에 들어왔다.
‘음?’
네 번째 재앙으로 인해 열차의 내부에는 상당한 충격이 일어났었다.
다른 객실에 있었던 소녀의 발언에 따르면 그 충격으로 인해 위중한 부상을 입은 플레이어조차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둘리에게 상처는 온데간데도 없었다.
마치 혼자만 충격을 안 받은 것처럼.
혹시 다른 객실에 비해 특등실만 유난히 충격이 적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머지않아 사그라들었다.
‘그건 아니야.’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있었다.
그야 나도 그 당시에 특등실에서 충격을 겪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칫 손을 놓고 있었다면 튕겨 나가서 상당한 부상을 입을 뻔했다.
특등실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그만한 일이 있었는데도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있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묘한 상황.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도출해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둘리야.”
“으음… 어, 한별 왔나. 언제 왔었나.”
흔들어 깨우자 둘리는 짤막한 팔로 두 눈을 비볐다.
그것도 잠시, 실수를 깨달았는지 둘리는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섰다.
“아니다! 한별, 절대로 자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낯빛으로 연신 손을 흔드는 둘리.
그래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은 잘 알고 있나 보네.
여러모로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것보다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가 한별?”
“혹시 좌석에 앉아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느꼈어? 예를 들면 충격이라던가. 강한 압박감 같은.”
내 물음에 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딱히 느낀 적이 없는데, 혹시 큰일인가?”
“뭐,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둘리의 의문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덕분에 크나큰 수확을 얻었다.
“좌석에 앉아 있던 둘리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는데, 서 있던 플레이어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라….”
“혹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열차의 충격에도 면역이 생기는 건가?”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
곁에 있던 소녀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둘리는 특등석에서 내내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외의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현저히 줄어들 터.
“열차의 좌석에 앉아 있거나 잠들어 있으면 열차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지금으로서 추측 가능한 가설이었다.
마음 같아선 또 다른 변수나 열차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해보고 싶었지만, 느긋하게 있을 틈은 없었다.
열차가 절벽에 부딪히면 그때는 모든 게 끝장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는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가능한 일을 실험해보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 아저씨. 제정신이야? 정말로 시도해보려고?”
“시도해보는 게 아니야.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다급한 소녀의 외침에 나는 간략하게 대답하며 커뮤니티 창을 열었다.
* * *
〈53채널- 41층 전용 채널〉
- 방금 전에 신협이 살고 싶으면 좌석에 앉아 있어서라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함?
⤷ ㅋㅋㅋㅋ 에바긴 해
⤷ ㄹㅇ 잘 가던 열차가 절벽에는 왜 부딪히냐?
- 갈! 신협의 말이시다! 믿고 따라야 하는 거슬
⤷ 응 너만 따라가~
- 애초에 절벽에 부딪히는데 좌석에는 왜 앉아 있음? 당장 탈출해도 모자랄 판인데
- 신협도 슬슬 끝물인 듯
- 신협단도 같이 나락 가즈아!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직후, 여론의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대다수의 반응이 그걸 누가 믿냐는 듯한 분위기.
신협단으로 의심되는 소수의 인원이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 제안은 여론에 의해 금방 묵살되었다.
그렇게 다수의 플레이어가 무시한 채, 넘어가려고 하던 즈음.
뒤이어 벌어진 일이 의해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 속보) 신협 말대로 3분 뒤에 절벽에 충돌한다는 시스템창 떴음
⤷ ㅁㅊ;; 이게 찐이라고?
⤷ 잠깐만 신협은 이거 어케 아냐? ㄹㅇ 미래예지 아님?ㄷㄷ
- 아, 이거 따라야 하나 신협 말대로 됐다는 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얘기가 아님?
⤷ 그래도 어떤 미친놈이 절벽에 부딪히는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냐
⤷ 그래서 열차 탈출할 방법은 있고?
⤷ 아니 씹… 이제부터라도 찾아야지
- 신협도 열차 부수는 건 실패했는데 그냥 앉아서 기다려야 할 듯
- 기도 메타 간다
- 일등석 일원은 신협 말에 따르기로 했음, 우린 믿는다
⤷ ㅇㄱㄹㅇ?
⤷ ㅇㅇ 찐임
- 모르겠고, 난 고백이나 하러 갈란다. 죽을 거면 차라리 고백이라도 하고 뒈질린다
⤷ ㄷㄷ 고백좌
⤷ ㅁㅊ 진짜네 이등석에서 고백함
⤷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결과는??
- ㅋㅋㅋㅋㅋ 열차가 절벽에 부딪히는 것보다도 이게 더 흥미진진하네
* * *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열차의 위.
나는 서서히 다가오는 절벽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뒤이어 시스템창이 떠오르고 내 발언에 대한 근거가 생기면서 다른 플레이어들도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던 와중에 고백을 했다가 시원하게 차이는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걸로 급한 문제도 해결했겠다.
나는 곧바로 열차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내 추측에 따르면 열차의 좌석에 앉아 있으면 생존할지도 모른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할 거 아냐.’
다른 플레이어들은 탈출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고 쳐도, 나야 탈출할 방법을 갖고 있는데 쓰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
만일의 상황에는 내 추측이 빗나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더라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좀 이기적인 발언일지 몰라도 탑을 등반하는 누구나가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절벽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당장 엎어지면 코가 닿을 법한 거리.
“둘리야!”
“알았다!”
짤막한 내 외침에 멀리서부터 날아온 둘리가 팔을 낚아채 상공으로 활공했다.
“한별 어디로 가면 되나!”
“일단 여기서 대기, 상황을 좀 지켜보려고.”
“알겠다!”
내 말에 둘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에 머물렀다.
이윽고 플레이어를 채우고 빠르게 질주하던 열차는 그대로 절벽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콰아아아아앙!
고막을 찢는듯한 굉음과 함께 열차가 충격으로 인해 상공으로 튀어 오른다.
그와 동시에 열차는 상공에서 붉은 홍염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얼마나 강한 화력인지 둘리가 날개로 앞을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화끈화끈할 지경이었다.
보기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법한 광경이었지만, 열차가 상공에 튀어올라 폭발하기까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차창 안으로 보이는 객실에서 수십 개의 섬광이 번뜩인 것을.
플레이어들이 다음 층을 향할 때만 벌어지는 현상.
틀림없었다.
‘성공했다.’
나는 손아귀를 움켜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41층을 클리어하는 핵심 열쇠는 좌석이었다.
둘리 덕분에 발견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아찔했을까.
“그나마 다행이지.”
활짝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즈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42층으로 등반하시겠습니까?〉
다음 층으로 올라가겠냐는 시스템의 물음.
평소라면 거리낌 없이 올라가겠다고 답하겠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저어 선택을 보류했다.
“한별…?”
생각지도 못한 선택에 둘리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협곡의 위를 향해 도약했다.
타앗!
그대로 지면에 착지한 나는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선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미안하게 됐지만, 이대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야.
‘이번 층에서는 얻은 게 없잖아.’
탑에서 주지 않으면 내 손으로 직접 거머쥘 생각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같은 보상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