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아티팩트를 사용하자, 열차의 바깥으로 손이 통과되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팔이 외부로 통과한 증거로 거센 강풍도 느껴졌다. 그것은 열차가 지금, 이 순간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이번 층을 클리어할 수 있는 활로 찾은 듯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아티팩트는 단 하나.
‘지금으로선 탈출은 혼자서밖에 못 하나.’
설령 내가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도하고 싶어도 열차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티팩트를 줄 방법은 없다.
게다가 하늘 공원의 쿨타임도 남아있는지라 아티팩트의 복사도 불가한 상태다.
‘그래도 바깥의 상황을 알아차리는 게 우선이겠지.’
열차의 안쪽에서는 탈출 방법이 없을지도 몰라도 외부에는 무언가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라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결심을 내린 다음, 나는 투명팔찌의 효과를 다시 발동하며 천장을 향해 도약했다.
예상대로 내 몸은 천장을 통과했다.
타앗!
천장을 통과해 착지하자,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위에 도달했다.
펄럭,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투명팔찌의 효력이 다하면서 미처 통과하지 못한 로브의 끝자락이 잘려 나갔다.
절단된 로브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간발의 차네.”
조금만 늦었으면 발목이나 손끝이 잘려 나갈 뻔했다.
‘앞으로 투명팔찌를 사용할 땐 타이밍을 잘 잡아야겠어.’
투명팔찌의 발동 시간은 약 3.5초.
유사시나 전투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라 할 수 있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대충 보니까. 협곡 사이를 달리고 있는 건가.”
열차는 메케한 매연을 뿜어내며 협곡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기관실에 있을 때는 시야가 한정되어 있어서 풍경이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삼등실의 위쪽.
나는 선두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맞바람으로 인해 움직임이 제한되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열차의 선두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멀리서부터 검은색 경고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Danger이라는 문구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라면 경고판의 내용을 곧바로 확인했겠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어둠과 더불어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쉽게 놓쳐버린 표지판.
“아, 좀만 더 집중했으면 볼 수 있는 건데.”
나는 혀를 내두르며 입맛을 다셨다.
“둘리야, 날아서 저것만 좀 확인…… 아, 맞다. 두고 왔지.”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둘리를 찾았지만, 내 희망과는 달리 옆자리가 허전했다.
뒤늦게 둘리를 특등석에 두고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특등석에 두고 왔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올 걸 그랬네.
지금쯤 녀석이라면 과일이나 씹으면서 편하게 누워있겠지. 비록 둘리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많이 봐서 그런지 뻔히 보였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는 열차 위를 통해 계속 이동했다.
“이제 이등석 쪽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이등석의 중앙에 도착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셨다.
한참을 걸어가던 도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열차에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좌석이 새롭게 배치된다.
그렇다면 좌석이 변경하게 되면 이전처럼 특등석이나 일등석에 배치될 가능성이 클 텐데, 이렇게 고생할 바에는 바뀌고 난 뒤에 움직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 고생했는데 좌석으로 순간이동을 할지도 모르고.
이거… 헛고생하는 건가?
일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애써 부정했다.
“암만 그래도 과한 걱정이겠지.”
좌석이 언제 변동되는지도 모르는데 대기해봤자 시간 낭비다.
또, 열차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움직이다 보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손에 얻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화를 호시탐탐 노리며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다섯 재앙 중 네 번째 재앙이 일어납니다.〉
때마침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네 번째 재앙.”
나는 얼굴을 사뭇 굳히며 중얼거렸다.
41층에서 재앙은 총 다섯 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 그렇다면 다섯 번째 재앙까지 극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번 층을 클리어할 수 있는 조건은 열차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재앙까지 클리어하더라도 열차를 탈출할 때까지 영원히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괜한 걱정은….”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재앙을 전부 극복한 것도 아닌데 쓸모없는 궁금증이다. 게다가 열차 안은 전력이 끊기며 산소까지 부족하다.
다섯 번째 재앙을 해결하기 전에 산소 부족으로 다 같이 요단강이라도 건널 판인데, 이런 궁금증 따윈 의미 없었다.
우선 이번 재앙부터 클리어하는 게 먼저다.
<네 번째 재앙은 외부에 의한 충격입니다.>
<외부의 충격으로 혼절하거나 뇌진탕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눈을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열차의 외부라면 여기잖아…?
갑작스러운 문구에 당혹스러워하는 도중, 협곡의 위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궁!
마치 단단한 무언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
그 소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상공에서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에 날리는 모래라고 생각했지만, 선로 위에 떨어져 있는 물체를 본 순간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돌멩이?”
방금 전에 떨어진 모래보다는 입자가 훨씬 굵었지만, 내 식견을 놓칠 리는 없었다.
잘게 부서져 있어서 그렇지, 저기에 떨어진 돌멩이는 분명히 거대한 바위가 낙하해서 부서진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상공을 향해 바라본 나는 곧이어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한다고?”
협곡의 벽이 무너져내리며 잔해가 떨어져 내렸다.
거의 산사태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
아니, 물론 열차가 어지간한 충격에도 끄떡없고 만일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금방 복구된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그것도 잠시, 나는 안색을 굳혔다.
이렇게 불만을 토로할 틈은 없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나는 순식간에 떨어져 내리는 돌무더기에 맞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특등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탑한테는 미안하게 됐지만, 여기에서 멈출 생각은 없다.
언제 좌석이 새롭게 배치될지도 모르는 상황, 강행 돌파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압!”
간결한 외침과 함께 나는 정면을 향해 대각선으로 검을 그었다.
그러자 위에서 쏟아진 거대한 바위가 깍둑썰기하듯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
쿠우우웅!
“윽…!”
거대한 바위가 열차의 선두와 맞부딪힌 모양인지, 크게 흔들거리며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붙잡은 나는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흔들 다리의 위라도 걷는 기분인걸.’
안전장치라고는 눈을 크게 떠도 찾아볼 수 없다는 차별성이 있지만, 뭐 어때.
탑이 상냥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내달린 끝에 나는 삼등석을 지나 이등석의 위를 달렸다.
삼등석에 비해서 열차의 폭이 훨씬 좁아졌으며 평평하던 바닥도 뾰족하게 변하며 밟을 발판이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바위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균형까지 생각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이쪽을 통해서 가라고 만들어 둔 것도 아닐 테니까.”
이대로 균형을 잃고 떨어지면 그대로 끝이다. 단순한 찰과상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버거워졌지만, 어금니를 깨물고는 발걸음을 뻗는다!
“후, 힘들어 뒈지겠네.”
마지막에 이르러 특등석의 선두에 도달한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정면을 바라보자, 열차의 헤드라이트의 빛이 비치는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 나는 사색이 되었다.
“미친…….”
무심결에 나온 욕지거리.
틀림없다.
일순 눈을 의심했지만, 잘못 보거나 한 게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경악하기도 잠시, 협곡 위에서 강렬한 파장음이 들려왔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에 드리웠다. 지금까지 떨어져 내리던 돌무더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크기의 암석.
열차를 뭉개 버리고도 남을 만한 규모의 암석을 목격한 나는 사색이 되었다.
시간이 넉넉하면 모를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만한 규모의 암석을 단기간에 부서뜨릴 순 없었다.
“쯧, 어쩔 수 없나.”
나는 서둘러 투명팔찌를 발동했다.
아티팩트를 발동함과 동시에 발밑이 쑤욱 꺼지며 특등실의 공간이 펼쳐졌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암석에 깔리는 것은 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순 없었다.
저만한 크기의 암석이 열차에 맞부딪쳤다간 상당한 충격이 몸을 덮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좌석을 있는 힘껏 끌어 잡았다.
쿠우우웅!
공중에서 떨어진 암석이 열차와 충돌함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열차 내부를 강타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멀뚱히 서 있었다면 그 충격으로 몸이 튕겨 나가기에는 충분한 위력.
좌석을 강하게 끌어 앉고 버티자, 암석과의 충돌이 끝난 모양인지 곧이어 시스템음이 들려왔다.
〈네 번째 재앙은 이겨내셨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의 충격이 네 번째 재앙의 끝이었던 모양이었다.바짝 끌어안은 좌석을 놓으며 한숨을 돌리려는데, 일등석으로 향하는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산발이 된 소녀가 들어왔다.
“아저씨? 뭐야! 갑자기 사라져서 한참을 찾고 있는데 여기에 있었어?”
방금의 충격으로 팔이 부서지거나 금이 간 모양인지, 소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팔을 부축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소녀의 부상을 치료하고, 다른 플레이어의 상황도 살피고 싶었지만 불과 몇 분 후에 벌어질 참극을 알고서도 느긋하게 있을 틈은 없었다.
말로 전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여 주는 게 빠르겠다고 판단한 나는 소녀의 팔을 끌어당겨 기관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녀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상치 않은 일임을 파악한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기관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관실에 도착한 소녀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저… 저건? 자, 잠깐만! 아… 아, 아저씨,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지?”
“맞아. 보이는 대로야.”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인지 소녀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자아냈다.
그도 그럴게, 기나긴 선로는 끝에 있는 장소는 드높은 절벽.
만약 시속 200km로 달리는 열차가 절벽에 맞부딪히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은 간단했다.
“이거 x된 거 같은데.”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심경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