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41화 (141/175)

제141화

쿠웅!

시스템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열차에서 큰 진동이 느껴졌다.

소녀 역시 당혹스러운 상황이기는 매한가지인 듯 내 얼굴을 마주 봤다.

사등석 열차에는 몇 명이 탑승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창의 언급에 따르면 다섯 개의 시련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중 첫 번째가 사등석을 분리하는 것이다.

만약 차례가 지나면 지날수록 삼등석, 이등석, 일등석.... 특등석까지 분리된다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섣부른 생각인가.”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의해 너무 동요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레짐작을 하고 결정을 내리기에는 섣불렀다. 다른 패턴 역시 존재할 수 있으니 지금은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렀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좌석이 변동합니다.〉

〈현재 신한별 플레이어의 좌석은 [특등석]입니다.〉

※ 변동이 가능하니, 주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열차에서 또다시 진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특등석... 그대로네.”

“아무래도 아저씨랑 나는 이전과 똑같은 거 같은데.”

짤막한 내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소녀 역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특등석뿐만 아니라 다른 좌석도 다시 배치되었다는 뜻.

일순 싸한 불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4등석이 분리된 지금 이 시점에서 좌석이 변경된다?

어쩌면 다음 타켓이 삼등석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등석으로 상승하기 위해 플레이어들끼리 싸움을 벌일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아니라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일이었다.

“아저씨 이거....”

“그래, 큰일 난 거 같은데.”

소녀 역시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 사뭇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민은 짧았다.

“일단 확인해봐야겠어.”

* * *

철컥-!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일등석으로 향하는 문이 개방되었다.

특등석에 비해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는 일등석의 규모는 꽤 컸는데, 인테리어나 전체적인 질은 특등석에 비해 떨어졌다.

‘아무래도 당연한 거겠지.’

개별 좌석의 숫자로 봐서는 일등석의 인원은 열 명 남짓.

이전에 일어난 일로 인해 소란이 벌어졌던 모양인지, 내부는 엉망이었다.

아마도 내가 했던 것처럼 물리적인 힘으로 열차에서 탈출을 시도해본 듯했다.

당연히 결과는 나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돌아갔겠지만.

뒷좌석으로 가면 갈수록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북적거리는 분위기와 더불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탈출하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하던가!”

“뭐라고?”

“내가 언제 틀린 말 했어? 탈출 시도는 이미 해서 실패했잖아. 차라리 그 시간에 이등석 놈들을 처리하든가 해야지. 그 새끼들이 언제 칼날을 들이밀 줄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아무래도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인지, 그들은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몸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면면을 확인해보니, 유채아가 그 가운데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끼어있었다.

‘역시 일등석에 있었나.’

하긴 소녀가 특등석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스러운 일이라 그렇지, 유채아의 실력이라면 일등석이라는 자리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봐 아저씨, 또 이상한 생각했지.”

소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시선을 가뿐히 무시하고는 플레이어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또 어떤 새끼야! 별 시답잖은 결론만 내놓을 거면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던 남자는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을 확인한 그는 양손으로 눈가를 비비는가 싶더니, 이내 낯빛이 허옇게 변했다.

“시... 시, 신한별? 어떻게 신한별이 여기에....”

“왜긴 왜야. 특등석에서 왔지.”

“특등석이라니.”

그는 특등석 쪽으로 열려있는 입구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플레이어들에게 소리치던 그 모습은 온대 간 데도 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강약약강의 표본.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나는 유채아를 향해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고 있었던 거야.”

“다름이 아니라 방금 전의 일 때문에 조금 의견이 분분해서요.”

“그래?”

유채아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일어날 혼란이라면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무력을 통해 탈출이 무의미하다는 걸 파악한 이상, 플레이어의 의견이 분분이 나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쓸모없는 짓이나 하긴.’

다들 내 실력을 알기에 섣불리 덤비지 않을 뿐이지. 그들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열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플레이어들끼리의 내분이라니 완전히 막장이었다.

물론 이런 부분까지 탑에서 계산한 것이겠지만.

“우선 우리 쪽의 진행 사항부터 이야기할게.”

“진행 사항이라면...?”

내 말에 플레이어들은 눈썹을 들썩이며 관심을 보였다.

그들 역시 탈출을 시도해봤으면 이 열차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나라면 달랐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낼 생각을 하니 양심에 찔려왔지만, 그래도 정보교환은 필수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기대하는 것에 찬 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뭐 우리도 실패했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뗐다.

기껏 기대하고 들었는데, 결말이 베드엔딩이면 맥 빠지잖아.

역시 내 예상대로 플레이어들의 어깨는 추욱 쳐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어쨌건 상황 확인을 위해서 기관실을 한 번 찾아가 봤는데.”

“자, 잠깐만 특등석에서는 기관실로 이동할 수 있다고?”

“어, 그런데?”

말을 하던 도중에 끊긴 건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중요한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사실 특등석인 그쪽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위치한 좌석에서 아래 등급으로는 갈 수 있어도 윗 등급으로는 이동할 수 없거든.”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특등석에 있을 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열차에서도 가장 선두인 특등석이라면 뒤로는 갈 수 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

“그, 그래서 기관실에는 뭐가 있었지?”

기관실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끌린 모양인지,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거렸다.

오죽하면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미미한 유채아마저 흥미를 보였다.

그도 그럴게.

일등석인 그들에게는 특등석 이상은 미지의 공간이다. 관심이 생기는 것도 그럴만했다.

그래서 나는 정보를 이용하기로 했다.

“글쎄, 너희도 알잖아. 탑에서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지. 어쩌면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는 정보를 막 알려주는 것도 좀 그렇지?”

내가 호기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탑의 저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은 모르겠지만, 최전선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였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에게 정보라는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때로는 히든 조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보가 될 수 있으며, 혹은 핵심 아티팩트를 획득 가능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쯧, 그래서 뭘 원하지.”

그 이유를 수긍한 모양인지, 일등석 플레이어들은 대화를 통해 결론을 내렸다.

하나 나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 미리 말해두는데 아티팩트니 하는 건 됐어.”

어차피 아티팩트나 금화 같은 건 저번 층에서 도박을 통해 넘칠 정도로 얻었다.

여기에서 더 받아봤자 폐기하기도 애매한 쓰레기였다.

“내가 원하는 건 일등석 플레이어들의 협력, 적어도 다음 좌석이 변동되기 전까지는 이쪽에 협력해줘야겠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등석 플레이어를 이쪽 편으로 끌어당기는 것만으로도 큰 이점이 있었다.

저들을 손아귀에 둘 수 있으면 적어도 큰 문제로 번지는 것은 방지할 수 있으니까.

“그게 조건이라면 뭐....”

내가 건넨 조건에 플레이어들 역시 큰 반발은 없는지 순순히 수긍했다.

이걸로 협약은 마쳤다.

그 뒤로 기관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플레이어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다섯 재앙 중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납니다.〉

〈삼등석에 웨이브가 생성됩니다. 웨이브에서 생성되는 괴수를 저지하시오.〉

〈열차의 전류 및 산소 공급 장치가 끊깁니다.〉

동시에 벌어진 두 번째, 세 번째 재앙.

시스템이 생겨남과 동시에 큰 충격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전기가 끊김으로써 암전이 도래했다.

때마침 소녀가 마법을 사용해 어두워진 열차를 환히 밝혔다.

“방금 전에 충격은?”

“열차의 후미에서 일어났어.”

내 물음에 소녀는 짧게 뇌까렸다.

그것도 그거지만, 내 시선을 끌어당긴 건 다른 문구였다.

“산소 공급 장치가 끊겼다고 하던데 혹시 알아?”

“음... 그러고 보니 기관실에서 본 거 같은데, 아마도 남은 산소로는 길어봤자 1시간 정도 버틸 수 있을 거야. 만약 괴수를 막지 못한다면 시간이 점점 줄어들겠지.”

“쯧.”

그 이야기에 나를 혀를 내둘렀다.

플레이어들이 숨 쉴 산소도 부족한 판인데, 웨이브에서 괴수가 나타나게 되면 괜한 산소 낭비였다.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후미에 들어가 괴수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려고 하자, 방금 전까지 나와 이야기하던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 나도 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지금 후미에 가면 더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급박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남자의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좌석이 변동된다는 것을 아는 지금으로선 후미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더 높은 좌석을 노리기 위해 이쪽의 인원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쪽 좌석이 부재라면 뒤쪽에 있는 인원이 앞칸으로 승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괴수보다도 더한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차에 남은 산소량을 생각하면 괴수를 저지해야 했다.

그를 뒤로한 채, 앞장섰다.

“그래도 간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이등석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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