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39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곧이어 40층으로 이동합니다.〉
〈보상이 집계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천사를 쓰러뜨리자마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드디어 이번 층도 클리어했다.
그 증거로 성벽에서 둘리와 맞서 싸우고 있던 사도들이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따라가서 남은 병력도 싹쓸이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어차피 전쟁에서 싸우다가 패배한 잔당이다.
저들이 남아있다고 해도 대가리가 없는 이상, 더 이상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촤악 빠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후, 죽겠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경치를 구경하고 있을 무렵, 멀리서부터 검은 인영이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속도.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이내 내 품속에 뛰어들었다.
“한별!! 한별, 어디 아픈 곳 없나! 죽으면 안 된다! 죽으면 안….”
“쉽게 안 죽으니까. 좀 조용히 해 봐. 머리통 울리잖아.”
누군가 했더니 둘리였나.
‘누가 보면 상이라도 치른 줄 알겠네.’
품속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울음을 터뜨리는 둘리를 힘겹게 떼어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겨우 그깟 놈한테 당하겠어? 그리고 죽고 싶어도 쉽게 안 죽어.”
튜토리얼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어지간한 괴수의 공격으로는 피부에 흠집도 안 난다.
물론 이번에는 좀 벅차긴 했지만, 문제 될 건 없다.
나도 나지만, 이번에는 둘리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살이 훌쩍 빠졌다.
전투가 시작하고는 불과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둘리의 볼살은 비쩍 말라 있었다.
급격한 체중 변화에 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그렇게 다이어트 시켜도 안 빠지는 살이 이렇게 갑자기 빠진다고?’
여러모로 의아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말고 머릿속에서 문득 의문을 떠올렸다.
‘혹시 성체화의 부작용인가.’
지금까지는 짧은 시간 동안 성체화를 유지하곤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꽤나 긴 시간동안 성체화를 유지했다.
오죽하면 둘리가 가쁘게 호흡을 내쉴 정도로.
“뭐,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아직까진 성급하게 결정 내릴 일은 아니었다.
한창 머릿속에서 상념을 떠올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꼬르륵⎯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허기가 졌던 모양인지 둘리가 얼굴을 붉힌 채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슬쩍 챙겨둔 전투 식량을 던졌다.
“배고프지? 다음 층에 가기 전까지 그거라도 먹고 있어.”
“와! 한별 짱이다!”
둘리는 두 손으로 전투 식량을 잡고는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발길을 옮겼다.
성벽 앞에 다가가자, 그곳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43호가 서 있었다.
이번 전투를 겪으면서 많이 고생한 모양인지 43호의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하나 그 와중에도 그는 해맑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반겼다.
“왔는가. 자네의 활약이라면 병사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네.”
“그러셨습니까.”
“그래, 자네한테는 고마울 따름이라네. 우리가… 아니, 성벽 안에서 거주하는 모두가 살아남은 걸세.”
43호는 산 너머에서 떠오르는 여명을 응시하다 말고, 이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족을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게다가 골치 아픈 적까지 전부 궤멸시켰으니, 그가 보이는 호의도 이해될 만했다.
“모두가 자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네. 물론 술과 음식도 잔뜩 챙겨놨으니 걱정말게나.”
43호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하나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사정을 아는 NPC라면 몰라도 그는 플레이어라는 존재에 관해 모른다.
그 뜻은 즉, 탑에 관해서도 모를 가능성이 컸다.
“혹시 탑에 관해서 아십니까?”
“응? 자네 뭐라고 했나? 중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못 들었네.”
“탑과 플레이어에 관해서 아냐고 물었습니다.”
“음… 한 번 더 말해보게. 자네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안 들리는구만.”
내 말에 43호는 귀를 가까이하며 되물었다.
혹시나 싶어 기감을 끌어올려 봤지만, 거짓말이나 장난을 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난청 같은 질병은 또 아닌 거 같은데, 음….
‘탑에 관한 이야기는 알아서 필터링 되는 건가?’
추측이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컸다.
적당히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시하긴, 어서 들어가세. 모두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네.”
그는 내 손을 잡고 이끌었지만,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그들과 화포를 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해도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적들을 쓰러뜨린 게 아니다. 철저하게 탑을 등반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
그렇기에 그들과 함께 할 자격은 없었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같이 못 갈 거 같네요. 아무래도 슬슬 가봐야할 거 같거든요.”
“가야한다니 어딜… 혹시 자네가 이전에 말했던 흰색 공간으로…?”
“대충 그런 셈입니다.”
필터링이 있기에 43호에게는 탑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건넸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자네에 대해 잘 모른다네. 하지만 한 가지는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자네를 반길 거라네.”
“…….”
“자네는 아무래도 스스로를 외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우리한테는 엄연한 동지이자 식구라네.”
그는 눈빛에는 연륜이 돋보였다.
“그러니 마음이 내킬 때 다시 찾아온다면 언제든 반겨주겠네.”
“감사합니다.”
그의 호의에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가느다란 섬광이 떨어졌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 * *
〈40층은 통합 공간입니다.〉
〈플레이어 간에 적대 행위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력 분쟁이 일어날 시, 그에 따른 처벌이 내려집니다.〉
〈또한 원하면 언제든 휴식 공간으로도 출입이 가능합니다.〉
파앗!
강한 빛줄기와 함께 나와 둘리는 다음 층으로 이동했다.
눈을 뜨자, 이전과는 달리 넓은 규모의 공원이 펼쳐졌다.
항상 마주하던 10평 남짓한 크기의 방안이 아닌, 새로운 공간의 등장에 둘리가 날개를 펼치며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와! 한별, 어딘지는 몰라도 엄청난 공간이다!”
“통합 공간?”
처음 들어보는 명칭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이었다.
상공에서 수십 개의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무수히 많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40층에 도착했을 때와 같은 현상.
아니나 다를까, 빛이 떨어진 장소에는 플레이어들이 서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명.
그중에는 안면이 익숙한 플레이어도 여럿 있었으며, 처음 보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모인 것은 탑에 들어온 직후로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나만 그렇게 여긴 건 아닌 모양인지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엇비슷했다.
다들 하나 같이 얼떨떨한 표정.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가 등을 두들겼다.
“아저씨 오래간만이야.”
“뭐야 너였어. 그리고….”
“알고 있어. 아저씨 아니라는 거, 아저씨는 항상 레퍼토리가 똑같아서 알기 쉽다니까.”
소녀는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에게는 38층에서 한 번 빚을 졌었다.
만약에 소녀가 없었다면 39층에까지 영향이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저번 층을 클리어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38층에서는….”
“아, 맞다! 아저씨, 38층에서는 나한테 빚진 거야. 내가 그때 지하실에 들이닥치지 않았으면 거기에 쓰러져 있던 남자는 지금쯤 골로 갔을 테니까. 나중에 갚아야 해?”
아니, 그걸 자기 입으로 뻔뻔하게 이야기한다고?
어지간한 철면피가 아니고선 말하기 힘들 텐데, 직접 입으로 내뱉은 그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알겠어.”
“아저씨 약속한 거야! 기다릴게.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흥겹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겸사겸사 둘리도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층은 40층을 등반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한데 모이는 장소, 간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서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니 소녀가 바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소녀가 떠나간 방향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보였다.
“유채아?”
“어, 어라…. 한별 씨? 우연이네요.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는데.”
내 부름에 유채아는 시선을 옮기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일이 있어서 등반하는 게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요? 예상치도 못했는데 볼 일이 빨리 끝마쳤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등반했죠. 갈 길은 멀잖아요.”
유채아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잠시, 유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둘리는 어디 갔나요? 항상 같이 다니니까.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요?”
“둘리라면 아까전에 주변을 둘러보러 간다고 하던데 아마 금방 나타날….”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늘 위에서 쩌렁쩌렁한 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별! 내가 좋은 밥집을 찾았다! 둘리랑 같이 가자.”
“어머, 저기에 있었네요.”
“게엑…! 전에 봤던 그 여자! 끈질기다! 이제 그만 좀 따라와라! 이 스토킹범!”
유채아를 바라보자마자 둘리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도망치려고 했지만, 유채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유채아의 품에 안긴 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우적거렸다.
“누가 스토킹범이라는 거에요.”
“한별! 한별!! 살려달라! 갑갑하다!”
“한별 씨는 바쁠 테니까. 저희끼리 놀아요.”
“아니다! 한별은 나랑 있는 편이 훨씬 좋을 거다! 한별… 한별은 어떤가?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은가.”
둘리는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저번 층에서는 둘리가 활약도 해줬으니, 여기에서는 둘리의 편에 서는 게 좋지 않을까. 나중에 삐지면 곤란하기도 하니.
그런 생각으로 둘리를 되돌려달라고 말하려던 도중이었다. 내 시선 위로 시스템창이 떠오른 것은.
〈39층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생각이 바꼈다.
“아, 지금은 바빠서 유채아랑 잠깐 있어.”
“하… 한별!”
둘리는 배신을 당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녀석한테는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보상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