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쏴라! 놈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마라!”
성벽 위에 올라선 43호는 목이 쉴 정도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을 막아야 한다.
43호의 눈빛에는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곳을 허락하게 되면 성내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이 무참히 살해 당할 것이며, 종막에는 무수히 많은 사도 앞에서 마족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마족의 명운은 바로 이 전장에서 결정난다. 43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했다.
“지, 지휘관님! 후방으로 물러나십시오! 당신께서 죽으시면 전부 끝입니다!”
“시끄럽다! 누구보다도 병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휘관이 지레 겁먹고 물러서면 그 누가 놈들을 상대할 것이더냐!”
“그… 그건….”
“걱정마라, 한때에는 최전선에 서던 몸. 적어도 몸 정도는 간수 할 수 있다.”
뜨거운 의지가 깃든 43호의 발언에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신체가 노쇠해서 그렇지, 살수로서의 전설적인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지휘관께서 그러신다면 저도 옆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 말엔 차마 거절하지 못한 43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린 43호의 시선에는 차분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부하의 앞이라 강하게 말했지만, 현실적으로 상황을 바라보자면 그들로선 손쓸 방법이 없었다.
마족들은 흑마법에 특화되어 있지만, 놈들이 다루는 신성력 앞에서는 쥐약이었다.
그러다 보니, 놈들에게는 총화기라는 구식방법밖에 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효과는 미미할 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거라곤….”
43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전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수많은 사도로 가득한 전장에는 신한별이 검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분명 43호가 알고 있는 그의 실력이라면 전장에 나서는 건 생죽음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왠지 몰라도 모두의 앞에 서 있는 신한별의 등은 믿음직해 보였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신입이라면…”
43호는 의미 없는 가정을 반복하며 모두의 기대를 짊어진 등을 바라봤다.
* * *
피지직! 채앵!
손에 쥐고 있던 빛의 정기가 산산조각나 지면에 떨어졌다.
차가운 바닥을 바라보던 천사의 눈에는 허무함이 감돌았다.
그럴 만도 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 기껏 얻은 기회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내가 보는 눈앞에서 와장창 깨뜨렸으니까. 할 말을 잃을 법도 하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이미 내가 가질 분량은 하늘 공원을 통해 충분히 복사해둔 상태였다.
덕분에 두더지의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긴 했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깨뜨린 빛의 정기는 혹시 몰라 복사해둔 비축분.
이 사실을 알 턱 없는 천사한테는 절망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어지간히도 원망스럽겠지.
그런 내 예상이 적중하듯 천사는 눈이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들었다.
“네 까짓 게 감히!”
파지지직!
천사가 양손을 한데 모으고 옆으로 손을 움직이자, 신성력이 응집하며 검을 만들어냈다.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양의 신성력.
마족인 지금으로선 저기에 닿기만 해도 상당한 치명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쫄 건 없지만.”
그녀에게 맞서 검을 꺼내 들었다.
곁눈질로 내 무기를 확인한 천사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조잡한 검으로 절 상대할 수는 있겠어요?”
“보면 알겠지. 난 템빨에 의지하는 편은 아니라서.”
“어디에서 나온 자만감인지는 몰라도 보기 추하네요.”
“글쎄 자만인지 자신인지는 보면 알겠지.”
난 말로 안 해.
눈에 훤히 보이는 조롱에 나는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지면을 박차고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처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천사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었다. 나는 지면을 손으로 짚고는 놈의 배를 걷어차 올랐다.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 그녀의 눈에는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것도 잠시, 천사는 날개를 이용해 다시 활공했다.
간신히 유지한 균형.
“갑자기 무슨….”
“왜? 싸울 때 어딜 가격할지 하나하나 알려줘야겠어.”
“칫, 겨우 한 번 기습에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하긴요!”
천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하늘 위에서 신성력이 뭉치며 수백, 수천 발의 탄환이 쏘아졌다.
그야말로 게틀링 건이라고 해도 부족 없는 화력.
나는 그 공격에 맞서 검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채앵!
더불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투 핸디드 소드로 변했다.
이전보다도 육중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들지 못할 무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딱 좋네.’
지금까지 검을 다룰 때면 너무 가벼워서 세세한 컨트롤이 어려웠는데, 이 정도 무게는 돼야지 휘두를 맛이 난다.
물론 검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질량이 커지기 마련이니 대인전에서는 불편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검의 면적이 크면 유용하다.
바로 이렇게.
씌이이이잉!
정면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공기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차게 나아간 풍압은 신성력에 강타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냈다.
얼마나 강력한지 검을 지지해 버티지 않았다면 그대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성벽이 걱정되어 뒤돌아보니,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난 둘리가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한별!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가라!”
“알았어. 그럼 맡길게.”
내가 병사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둘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외쳤다.
드래곤으로 성체화 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하더라도 장기간 유지할 순 없다.
분명 한계에 다다랐을 텐데도 불구하고 둘리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녀석한테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지.’
다시 상공을 올라가려고 하던 그때였다.
슈우우웅! 쾅!
“윽!”
상공에서부터 수십 발의 창이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하나하나가 아득한 양의 신성력이 담긴 창.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사도들이 창을 잡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도착했는지 사도들은 내 주변을 빙 둘러 포위망을 펼쳤다.
그야말로 천라지망天羅地網
삼엄한 포위망이었다. 내 눈으로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사도 따위야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동안, 분명 천사는 갖은 수를 쓰겠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즈음, 인근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신협!”
“여긴 저희 신협단이 맡겠습니다! 그러니 신협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저놈만 상대하십쇼!”
“으하하하! 신⎯멘! 아무도 못 막아!”
인근에서 몇몇 무리가 달려오는가 싶더니, 내 곁에 다가와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의 정체는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마음 같아선 천사와 같이 저놈들도 때려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쪽팔림을 삭히며 발걸음을 뻗었다.
다들 나만 보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렇지, 무력만 따지자면 동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의 두 배가량의 전력이었다.
나는 믿고 맡기기로 결정하곤 둘리를 향해 달려나갔다.
“둘리야 등 좀 잠깐 빌릴게.”
“드, 등 말인가? 윽… 알았다!”
한창 사도들을 상대하던 둘리는 내 말에 당혹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내가 말하자고 하는 뜻을 알아듣고는 드래곤피어를 사용해 주변을 둘러싼 사도를 떨쳐냈다.
딱 좋은 타이밍이다.
나는 지면을 박찬 후, 둘리의 등을 다시 밟고 상공을 향해 도약했다.
도중에 둘리의 힘까지 합쳐지자 평소라면 일반적인 점프로는 불가능한 상공까지 튀어 올랐다.
슈우우웅!
강풍으로 인해 머리칼이 세차게 흩날렸다.
드높은 상공까지 올라온 내 시야에는 고고하게 은은한 빛을 내뿜는 달과 무수한 별의 빛이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이 풍경을 느긋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럴 틈은 없었다.
짙게 깔린 구름 속으로 파고 들어가자, 그 밑으로 넋을 잃은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사의 얼굴이 종이짝처럼 구겨졌다.
“끝까지 저항을….”
“막을 수 있으면 한 번 막아봐.”
나는 하단으로 검을 뻗으며 빙그레 웃었다.
떨어지는 중력 가속도에 육중한 무기의 무게까지 더해져 가공할만한 일격을 만들어냈다.
상대가 저항한다면 저항하지 못하도록 무참히 밟으면 될 뿐이다.
바로 이렇게.
“제… 제기랄!”
심상치 않은 기세라 판단했는지, 천사는 허겁지겁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수십 겹의 투명한 막이 정면을 가로막았다.
하나.
채애앵!
검을 하단을 향해 강하게 긋자, 나와 천사 사이를 가로막은 수십 겹의 막은 허무하리만치 박살 났다.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벽 앞에서 천사는 초조한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어림없어요!”
마지막 남은 방어막이 박살 난 직후, 천사는 세 쌍의 날개를 이용해 둥근 형상의 구체를 만들었다.
앞선 방어막을 뚫느라 검에 실린 위력이 급격히 떨어졌기에 놈의 날개를 뚫어내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역공을 허락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가 있는 곳은 지면에서 수백 미터나 떨어진 상공
날개의 조작이 미숙한 지금으로선 천사가 공격하면 그대로 당하고 마리라.
정체 절명의 위기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가에는 완만한 호선을 띄고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이 뭔지 알아?”
나는 한치의 미련도 없이 검을 내팽개치고는 오른손을 뒤로 팽팽히 당겼다. 그리고는 극한까지 치달은 주먹을 일거에 내뻗는다!
재차 들어간 일격은 날개를 뚫고는 천사의 면상을 타격했다.
“크억!”
눈 깜짝할 새에 타격을 허락한 천사는 지면을 향해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신성력을 지닌 놈이라고 해도 내 주먹을 정면으로 맞고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증거로 천사는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그녀의 옆에 착지하자,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거센 바람이 성벽을 타고 상승했다.
복잡한 전장을 휘어잡을 만한 충격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마치 만화 영화 속 슈퍼 히어로와 같이 스탠딩 포즈를 취한 나.
나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뻗어 올렸다.
〈39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