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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35화 (135/175)

제135화

가장 큰 고비도 넘겼으니, 다음은 잠입한 천사 측 플레이어를 해결해야 했다.

기껏 시설이나 무기를 보수해놓고서 막상 전투 시에 내분이 일어나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셈이니까.

그런 꼴이 일어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일단 대책은 생각해놨으니까.’

나름 떠올려둔 대처법은 있으니 그 방법을 사용하면 급한 불은 끌 것이다. 당장 급한 일은 아니므로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나는 일을 뒤로한 채, 43호를 찾아갔다.

43호는 성의 지휘관 대리를 겸하고 있었기에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만나기는 까다로웠을 테지만, 그의 손님으로 있었기 때문에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산처럼 쌓인 서류더미였다.

군자부터 시작해 대장간이나 각 상점에서 온 건의서.

‘한창 바쁜가 보네.’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전투만 있는 게 아니다.

성내에는 수많은 마족이 살아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나 물자 관리는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바쁜 거 같은데 괜히 찾아온 것 같네요.”

“누군가 싶더니 신입이었나. 아니, 이젠 내 밑에 있는 것도 아니니 호칭을 달리해야 하나.”

말을 걸자, 서류 속에 묻혀 있던 43호가 손을 흔들며 일어났다.

안 그래도 노쇠한 바람에 늙어 보이는데, 밀린 업무로 인해 20년은 더 늙어 보인다. 아니, 착각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다가가자 43호는 기쁜 듯이 서류를 덮었다.

보기에는 한참 남은 거 같은데, 한 치의 고민도 없다니.

오히려 이 정도면 내가 오길 바라고 있던 게 아닐까.

“됐어요. 신입이라고 해도 딱히 상관없습니다.”

그깟 호칭이 뭐가 중요한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된다.

내가 털털하게 대답하자 43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신세 한탄을 내뱉었다.

“이러다간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오늘 새벽이라고 했었나… 업무가 끊기지 않구만.”

슬쩍 집무실의 창밖을 바라보니, 이곳에서는 요새 전체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아무래도 둘리가 나타났을 때의 풍경을 이 자리에서 직관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의 아찔함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았는지, 43호는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원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아무런 대처도 못 한 채, 당하고 말았을 테니까.

“사담이 길었군. 그래서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43호는 의자를 돌려 다리를 꼬며 물었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그를 바라봤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긴 했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이다.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이번 전투에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참여하겠다니?”

생각지도 못한 내 발언에 43호는 눈을 번쩍 뜨며 이쪽을 응시했다.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돋보였다.

머지않아 결정을 내렸는지 43호는 단호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네. 나와 병사들한테는 이 성을, 그리고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하는 마땅한 의무가 있다만 자네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는 단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조금이라도 병력이 부족한 이 상황에서 전장에 참여하겠다고 하면 팔 벌려 환영해줄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43호는 이유를 덧붙였다.

“자네한테는 여러모로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네. 자네는 그저 일에 휘말렸을 뿐이네.”

그는 왠지 모르게 감동한 듯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43호는 이 사태에 책임을 느낀 내가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겠다고 나섰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한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걸 고려해서 제 딴에는 배려한답시고 내뱉은 말인 거 같은데.

‘아니, 부족한 일손 거들어주겠다는데 뭐 이리 말이 많아.’

나라면 얼씨구나 좋다 생각하고 없는 일도 만들어내서 시켰을 것이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없는 감동이라도 만들어내야지, 뭐.

“제가 돕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나는 안색을 바꿔 사뭇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돕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

“비록 40년 간 몸은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마족, 동족의 위기를 모른 척하는 파렴치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돕는 게 도리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니… 그래, 자네가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될 걸세. 전력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더 이득일 테니까.”

내 말에 43호는 옳다구나 박수를 짝하고 치며 표정을 바꿨다.

한 번은 튕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빠른 태세 전환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이거 딱 보니까. 기다리고 있었구만.’

염치가 있으니 곁으로는 내색은 못 하고 거절했지만, 실상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빨리 대답할 수 있을까.

그의 모습에 피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이었다.

“다만… 네 실력으로는 전장에서 힘들 테니. 후방에서 보조하는 편이 좋겠지.”

지금 뭐라고…?

누구 실력으론 힘들 거라고?

순간 귀를 의심하며 다시 43호를 쳐다봤다.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43호가 내 실력을 본 적이 있던가?

문득 떠오른 의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해보니 38층에서도 그렇고, 그의 앞에서 전력을 보인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에 천사와 전투했을 때도 43호는 신성력에 의해 배에 구멍이 뚫린 채 기절한 채였다.

그러면… 전장에 나서지 말라고 했던 이유도 전부?

‘내가 전장에서 뒈질까 봐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물론 그는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만, 내내 약자 취급을 당했다고 떠올리니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물론 이것 가지고 탓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전보다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43호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의아스럽다는 듯 이쪽을 마주봤다.

“뭐,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뭐… 별 건 아닙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쪽이 착각하고 있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다.

다만 이 수모는 어떻게든 갚아줄 생각이다.

* * *

〈클리어 조건(2): 밀려오는 적들에게서 공성전에서 승리하십시오.〉

〈제한 시간: 00:08〉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 무기를 들고 성벽에 섰다.

불과 침공까지는 8분 남짓.

어둑어둑한 한밤중이었지만, 성벽에는 전 병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돋보였다.

그도 그럴 게.

곧 있으면 천사들이 침공할 것이라고 예언한 시간.

성벽에는 싸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점점 시간이 흘러 병사들이 지쳐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적이 온다!”

망루에 서서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병사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술렁거리며 동요가 일어났다.

적들의 습격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받아들이는 것과 몸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다.

병사들의 모습에 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미 예견된 일이다. 그에 대비해 만반을 준비했으니 자신을 믿어라.”

“옙! 알겠습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고무된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호기로운 웃음을 지었다.

“얼추 상황도 정리된 거 같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대충 전황을 살피며 다른 병사와 함께 포탄을 옮겼다.

43호의 권유에 따라 나는 지원 부대의 말단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솔직히 지원 부대라고 해서 별 기대는 안 했는데, 위치의 이점으로 성벽 너머가 훤히 보였다.

오히려 잘 됐다.

‘대충 돕다가 움직이면 되겠지.’

둥! 둥! 둥⎯!

그렇게 주변 상황을 살피며 있을 때쯤,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성벽 너머로 사도들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엄청난 숫자였다.

한밤중임이었음에도 대낮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광량.

저게 전부 신성력에 의해서 발생한 거라고 생각하면 아찔해졌다.

“전과 비교하면 2~3배인가.”

적들의 숫자를 가늠하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많은지 성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딧불이 떼가 덮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적들의 등장과 함께 성벽을 지키던 병사 중 몇몇이 자리를 이탈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사 측 플레이어들이네.’

어림잡아 열 명가량.

아니,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만 세어서 그렇지. 그 외에도 많을 것이다.

저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전황은 금방 무너지리라.

물론 나라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커뮤니티 창을 열었다.

〈54채널- 39층 전용 채널〉

- 아아, 안녕하십니까. 마족 측 진영 신한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드리고픈 제안이 있습니다.

⤷ 신한별? 구라치네

⤷ ㄹㅇ 징글징글하네. 개나 소나 죄다 신한별이지?

⤷ 사칭범 어서 오고

- ㅋㅋㅋㅋㅋㅋ개웃기네. 인증 없으면 뭐다?ㅋㅋ

- 오자마자 샌드백 ON

커뮤니티 반응을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나를 사칭하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카메라 기능을 켰다.

- [JPG.] 인증합니다.

⤷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이왜진?

⤷ 신협 강림!

⤷ 아, 아닛…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 엄마 난 커서 신협이 될 거야!

- 신협 커뮤니티에 나타난 거 진짜 오래간만이네

- 아아, 다들 반겨주셔서 감사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부터 마족을 제외한 천사 진영을 고르신 분은 멈춰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엥? 갑자기 무슨 소리임?

- 천사 측 고른 사람들 오열ㅋㅋㅋㅋㅋ

- 물론 제 말을 듣고 안 듣고는 자기 자유죠. 다만 한 가지만 경고하겠습니다.

나는 히죽 웃음을 지으며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 방해하시는 분은 저랑 개인 면담이 있을 예정이니, 그런 줄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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