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54채널- 39층 전용 채널〉
- 아니 씹, 천사 진영이라고 해서 예쁜 눈나들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임?
⤷ ㅋㅋㅋㅋ 갑자기 왜 발작임?
⤷ 아. 몰라;; 그런 게 있음
- 정보: 천사 진영 고른 놈들 전부 마계에 있다
⤷ 놀랐게도 ㄹㅇ임;; 지금 마족 측에 잠입 중임
⤷ 개웃기네 이중스파이냐? 실토하네ㅋㅋㅋㅋ
⤷ 아! 맞다. 못 들은 걸로 해줘ㅎㅎ
- ㄹㅇ 이정도면 웃음벨인데
- 이번 층에 신협있다는 거 사실임?
- ㅇㅇ 맞음. 본인 신협 싸우는 거 봤음
- 하 36층에서 빨리 등반한 보람 있었네. 나중에 싸인 받아야지
⤷ 갈!! 무엄하다! 신협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거늘!
⤷ 아 신틀딱들은 좀 꺼지셈ㅡㅡ
- ㅋㅋㅋㅋㅋ 신틀딱 네이밍 센스 무냐고!!
* * *
내가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단 이번 층은 단체층이라는 것.”
39층에 떨어지기 직전, 나는 마족과 천사 측 진영 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 뜻은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양자택일을 했다는 뜻이다.
어느 쪽은 천사 측을.
또 다른 한쪽은 마족 측을 말이다.
전체 인원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내가 38층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번 층에 도달했을 터.
나는 커뮤니티에서 소통 중인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마족 측에 내통자를 심어둔 건 좋은데, 이건 생각지도 못했겠지.’
기껏 첩자들을 심어뒀는데, 그 당사자들이 실시간으로 배신하고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하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9층의 NPC는 탑의 시스템에 대해 모른다.
그래서 일어난 해프닝.
오히려 이쪽으로선 환영할 일이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다는 뜻이잖아.”
“한별, 그게 그리도 좋나? 괴팍하다!”
“괴팍하긴 뭐가 괴팍해.”
나는 손날을 세워 둘리의 머리를 툭 내치면서 말했다.
뭐, 그렇게 말하긴 해도 이쪽에게 이득이기만 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상대가 마족 측에 내통자를 심어놨다는 사실만 알 뿐, 당장 그게 누군지 판별할 방법은 없으니까.
커뮤니티에만 밝혔을 뿐, 각자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길 것이다.
〈클리어 조건(2): 밀려오는 적들에게서 공성전에서 승리하십시오.〉
〈제한 시간: 07:34〉
적들이 침공이 오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7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이네.”
하지만 적들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사전에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성의 지휘관이 저번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인해 지휘권은 43호가 이어받았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성벽을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한별! 여기 너무 구리다! 벽도 군데군데 박살 나 있고 대포도 거의 없다!”
둘리의 외침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이곳을 필사적으로 지킨 병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다음 차례에 사도들이 총공세를 펼친다면 그때는 이 성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에도 내가 나서서 버텼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진즉에 함락되고 남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최악이네.’
도저히 타파책이 보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당황할 건 없었다.
이런 위기쯤은 탑을 등반하면서 여럿 겪어왔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위기를 타파해 새로운 기회로 삼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위해선.
‘어느 정도 대비책 정도는 세워놓아야 하려나.’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병사들의 위세와 적장의 목을 먼저 따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은 7시간 동안 성벽의 보수와 사기를 고무시키는 것에 집중할 때였다.
또, 마족 측에는 천사가 숨겨둔 첩자… 즉 플레이어들이 있다.
“이것도 어떻게든 해야겠지.”
적어도 대처법 정도는 생각해둬야지, 나중에 일이 터지면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할 일을 손꼽으며 맨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망할, 하나하나 세고 보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하나둘이 아닌데.
게다가 내게 권한이 있으면 몰라도 공식적인 권한은 43호가 지니고 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설득을 하려면 43호를 꿰어내는 법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잠깐만… 그럴 필요가 있나?”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편하게 진행하면 되잖아.
나는 곧바로 둘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둘리는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입에 호밀빵을 물고 있었는데.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둘리야.”
“응? 한별 불렀나?”
“그래, 계속 활약하고 싶다고 했었지. 이번에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해볼래? 둘리 네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이야.”
“두, 둘리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응응! 하겠다! 그 일 무조건 둘리가 맡아서 하겠다!”
달콤한 목소리로 미끼를 던지자, 둘리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콧김을 내뿜는 둘리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럼 너만 믿고 있을게.”
나는 둘리에게 막대사탕을 건네며 능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네.
* * *
더위가 한풀 꺾이고, 해가 산 뒤로 넘어가는 일몰 즈음.
병사들은 승리에 취해 술에 잔뜩 꼴은 채로 성 내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그 뒤에 이어진 술판은 끝날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적의 침공? 아아, 괜찮아. 어차피 놈들도 전쟁을 벌였는데 곧바로 전투를 치를 리가 없잖아.”
“걱정도 많은 놈이네. 아, 누군가 했더니 신입이었나? 오늘은 걱정 말고 들이마셔!”
“껄껄껄, 놈들의 손에 뒈질 바에야. 술에 취해서 뒈지는 게 낫지.”
“죽을 때까지 들이부어라! 건배!”
그들의 머릿속에는 하루 안에 또다시 습격을 받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일전의 전투로 사도는 완전히 패배한 채, 물러섰다.
나야 시스템을 통해 놈들이 다시 습격할 시간을 알고 있다지만, 그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
설사 말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순전히 믿어줄 이는 없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사도의 습격을 술에 잔뜩 꼴은 채로 맞설지도 모른다.
‘방법이야 있지.’
명분이 없으면 새롭게 만들면 될 일이잖아.
나는 성벽에 걸터앉아 술병을 훌쩍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한참 흘러 해가 산 뒤로 완전히 넘어갔을 때쯤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성 위로 드리운 것은.
휘이이이잉!
하늘에서 불어온 강한 바람으로 인해 성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은 술에 잔뜩 취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록 취기에 의해 비틀거리긴 했으나 그들의 눈에는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 드래곤이다.”
그의 짤막한 중얼거림에 병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천사와 사도면 몰라도 탑에서 드래곤의 존재는 해일과 화산폭발과 같은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의 존재로 여겨진다.
감히 어떤 자가 천재지변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면 재앙 속에서도 버터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외의 대다수는 천재지변의 앞에선 파리 목숨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느낀 충격과 공포는 전염되듯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드, 드래곤이 어째서….”
“설마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도 같이 죽이러 온 건가?”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우리로는 못 막아.”
일전에 둘리가 사도들을 학살했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는지, 그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기를 버리고 전의를 상실했다.
모두가 할 것 없이 절망한 가운데, 둘리는 장엄한 자세로 말을 내뱉었다.
“그대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 진정해라.”
평소와는 달리 장난기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은 엄숙한 목소리.
전율할만한 목소리에 마족들은 경외 어린 눈빛으로 둘리를 바라봤다.
수백, 수천 명이 둘리의 입에서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둘리는 말이었다.
“승리를 즐기는 건 좋지만, 적들은 이곳에 다시 도래할 것이다. 때는 다가오는 새벽.”
“새, 새벽이라고?”
“미친, 그럴 리가… 하지만, 드래곤께서 직접 하신 말인데.”
“다시 천사가 침공한다면 이젠 끝이야.”
마족들은 절망한 듯한 눈빛으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남아있던 전의조차 상실한 듯 보였다.
비록 괴로운 사실이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은 수십 년간 마족과 전투를 겪으면서 피와 함께 수많은 가족과 동료, 그리고 소중한 이를 잃었다.
가령 그중에는 바로 눈앞에서 잃은 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헤아릴 순 없다.
목숨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견될 수 없기에.
“포기할 자는 탓하지 않겠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도록.”
뜻밖의 이야기에 마족들은 눈을 부릅뜨고 상공을 바라봤다.
“……!”
둘리를 바라보는 마족의 눈빛에는 경악이 깃들어있었다.
“하나 도망친다고 해도 그건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뿐이다. 비록 여기에서 도망치면 당장 목숨은 부지할지 모르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놈들을 너희들의 가족과 연인, 그리고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것이다.”
둘리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밑을 둘러본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말을 내뱉고 있는 주체는 둘리가 아니었으니까.
더욱 확실하게는 둘리는 적당히 타이밍에 맞혀 립싱크만 할 뿐이고, 정작 목소리를 내뱉는 것은 재액의 가면을 이용해 변조한 내 목소리였다.
사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믿기 마련이다.
앞서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준 둘리의 모습에 마족들은 감화되어 있었다. 필요한 건 그들에게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면 될 뿐.
나는 결정타를 꽂았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결심을 한 이들은 이곳에 남거라. 함께 맞서 싸우겠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가족을 지킬 각오가 된 자들에게는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도록 하지.”
그 외침을 끝으로 둘리의 몸은 강한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둘리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마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땅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들어 올렸다.
“함께 싸우겠습니다!”
“드래곤 님의 말씀이 맞다! 우리의 보금자리는 내 손으로 직접 지켜야지!”
“뭐해! 결전의 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잖아! 어서 성벽을 보수해라!”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지휘관을 모셔서 이 일을 이야기해야 된다!”
순식간에 고무된 마족들은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마족들의 시선을 피해 내 곁으로 다가온 둘리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우, 한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괴물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립싱크만 했을 뿐인데 힘들게 뭐가 있다고 그래.”
정작 말한 건 나인데, 엄살도 심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둘리에게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꽤 긴 시간 동안 성체화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던 모양인지, 둘리는 컵에 얼굴을 박은 채 물을 벌컥 마셨다.
그것도 잠시 둘리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한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되나?”
둘리의 물음에 나는 심드렁히 와인잔을 기울이며 턱짓을 했다.
“마지막에 한별이 싸우는 힘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어, 그랬었지.”
“그 힘은 어떻게 줄 수 있는 건가? 둘리도 궁금하다!”
둘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 그거? 구라야.”
“구, 구라라니? 그렇다면 힘을 나눠주는 건 불가능한가?!”
“당연하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설령 가능해도 세상에 자기 힘을 나눠주는 호구가 어딨어.”
내 발언에 둘리는 새삼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사기다! 사기!”
둘리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외쳤다.
뭐, 그게 사기라도 상관없다.
“사람은 눈에 안 보여도 굳게 믿고 있으면 정말 있다고 착각하기 마련이거든.”
하물며 당장 안 보이는 힘 따위 알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