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33화 (133/175)

제133화

나는 43호를 바라보며 눈을 의심했다.

내 착각이 아니다.

38층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눈에 띄게 달라지긴 했으나 그의 이목구비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전했다.

‘그런데… 40년이 지났다니?’

설마 39층의 배경은 이전 층에서 40년이 흐른 시간대의 세계관인가?

머릿속에서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분명 이전 층에서 43호를 봤던 마지막 기억은 천사가 내뿜은 신성력에 의해 배가 뚫린 채, 쓰러져 죽어가던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앞에 선 43호는 노쇠했을 뿐이지 멀쩡해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43호에게는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 내 눈치를 알아챘는지, 43호는 슬쩍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어떻게 4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지도 그렇고, 아무래도 자네와는 나눠야 할 말이 많은 것 같네.”

그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나 그러기에는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치열한 전투로 전장에는 허여멀건 놈들의 시체는 물론 아군의 시체까지 즐비했으며, 소중한 가족과 동료를 잃은 마족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떠나간 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 속에서 느긋이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또, 남은 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아니지. 여기서 나눌 대화는 아니로군.”

43호 역시 주변을 의식한 모양인지 고개를 돌렸다.

“우선 장소를 이동해야겠네.”

* * *

〈적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조건이 주어집니다.〉

〈클리어 조건(2): 밀려오는 적들에게서 공성전에서 승리하십시오.〉

〈제한 시간: 12:59〉

슬쩍 고개를 돌려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창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자그마한 저택 복도.

나는 앞서 걸어 나가는 43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의문을 가졌다.

의문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43호의 언동 때문이었다.

‘39층에 도착한 날 보고 40년이 지났음에도 변함이 없다고 놀랐었지.’

평범하게 생각하면 수십 년 전에 봤던 상대가 여전히 변치 않은 모습으로 있으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놀라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43호는 탑의 NPC.

따라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탑의 NPC이면서 나를 플레이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 쳐도 이상한데.’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많은 NPC를 만났지만, 묘한 부분은 여럿 있었다.

일부 NPC는 탑의 존재와 플레이어를 잘 아는 것에 반해…

“43호, 혹시 탑과 플레이어라는 말을 아시나요?”

“탑…? 플레이어…? 자네 별난 소리를 하는군. 미안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혹시나 싶어 43호의 반응을 살폈으나 거짓을 고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걸로 확실하다.

43호는 이곳이 탑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 아닌,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탑의 존재를 인식하는 NPC와 인식하지 못하는 NPC.

‘그 차이가 뭐지?’

음… 까놓고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질문을 던져놓고서 아무런 말도 안 하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43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그건 왜 물었지?”

“뭐, 별 건 아닙니다.”

“싱겁군, 하여튼 도착했다.”

43호의 발걸음이 다다른 장소는 작은 규모의 접견실이었다.

전투가 반복되는 탓에 방의 내부는 정돈되지 않은 채 엉망이었지만, 은밀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비록 정리가 안 되서 엉망이긴 하지만 편한 곳에 않게나. 음료는 뭘 마시겠나?”

“맹물이면 됩니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바깥과 물자가 통하지 않은 탓에 물밖에 없었는데.”

“…….”

43호는 컵에 담긴 물을 내게 건네며 서두를 뗐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가? 그때의 일 이후, 나는 자네가 천사의 손에 잡혀서 죽은 줄만 알았다네.”“그게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그동안 새하얀 곳에 갇혀 있던 것밖엔….”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핑계를 만들어 둘러댔다.

적당한 핑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새하얀 방에 갇혀 있다가 눈을 뜨니, 39층의 전장 한가운데에 소환된 거니까.

“새하얀 곳? 음… 감도 안 잡히는군,”

내 대답에 43호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일에 관해선 추궁할 생각이 없는지

“보자,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43호는 노쇠해 떨리는 팔로 컵에 담긴 물을 홀짝이었다.

“40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천사와 마주했던 그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지.”

그의 발언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 나는 천사의 공격을 맞고 쓰러진 다음에 정신을 잃었었는데, 그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의 학생회장이 교수들을 모시고 지하를 순찰하던 도중에 발견한 덕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네.”

“아.”

그의 말에 나는 짤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현장에 있던 나조차도 목숨을 잃은 줄 알았다.

그걸 살다니 얼마나 목숨줄이 끈질긴 거야.

당시에 우리가 별동에 출입한 사실을 아는 건 소녀뿐.

아무래도 소녀가 난입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 그때 지하에 있던 천사와 마법진은?”

“이야기는 이제부터라네.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에 설치된 마법진은 마계와 천계를 잇기 위한 천사놈들의 계략이었다네.”

“마계와 천계?”

“그래, 놈은 모종의 힘을 이용해 마계로의 침공을 꾸미고 있었어.”

43호의 설명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 계획은 실패했지. 아무래도 마법진의 핵이 되는 매개체가 부족했던 탓이었던 모양이야.”

“역시.”

나는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빛의 정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확신이 들었다.

마법진을 완성하기 위해선 빛의 정기가 가진 힘이 필수적이리라.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실패, 천사들이 마계로 넘어오는 건 실패하고 말았지만 놈들의 영향을 지닌 사도들의 출입은 허락하고야 말았네.”

43호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울분을 내뱉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뒤의 상황은 내가 몸소 몸으로 겪었으니까.

“전장에 있던 허여멀건한 놈들이 사도인 모양인가 보네요.”

“그렇네. 우리는 어엿 40년째 천사 놈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유리잔은 그의 입에 닿기도 전에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그의 손에서 떨어진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수십 개의 조각으로 쪼개진 유리 조각은 나와 43호를 각각 비추고 있었다.

“크흠, 미안하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힘이 달리는구먼.”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나이가 나이인데, 노인공경을 해줘야지.

땅바닥에 흐트러진 유리 조각을 쓸어 담으며 38층에서 조우했던 천사를 떠올렸다.

늦든 이르든 내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천사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

그렇다면 놈은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빌 가능성이 컸다.

“그년이 원하는 거라면 내가 갖고 있으니까.”

나는 손에 쥔 빛의 정기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 * *

허물어 쓰러져가는 거대한 왕성.

수많은 마족의 시체로 쌓인 산을 앞에 두고 순백의 날개를 지닌 여자는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 위에는 둥근 엔젤링이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정체가 천사라는 것을 뜻하는 방증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와인을 즐기고 있을 무렵.

멀리서부터 수십 채의 사도들이 공중을 날아 그녀의 앞으로 도달했다.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족들을 공포에 내몰아 넣던 존재였으나 사도들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와인은 발효하는 방법과 만든 인물, 온도, 습도 등 모든 게 최적의 상태에 맞혀줘야지. 본연의 맛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죠.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재료가 재배된 환경. 천계의 와인에 비하면 이곳의 와인은 헛구역질이 절로 나오네요.”

천사는 사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땅바닥에 와인을 흩뿌렸다.

와인에 스민 지면이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성은 처리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사도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이상하네요. 분명 놈들의 전력은 파악하고 있을 터인데.”

천사가 사도의 머리에 손을 얹자, 닿은 부위부터 시작해 사도의 육체는 종이처럼 구겨졌다.

이윽고 작은 구슬로 변모한 사도의 몸은 그대로 손아귀 속으로 흡수되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양팔을 펼치던 천사는 미간을 구겼다.

그것도 잠시.

“찾았다. 오호라 그렇게 된 일이군요.”

천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침내 눈을 뜬 그녀의 눈빛에는 서슬 퍼런 한기가 느껴졌다.

“빛의 정기를 훔쳐 간 도둑놈이라….”

권능을 사용해 사도의 기억을 엿보던 천사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40년 전, 놈이 빛의 정기를 후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단 며칠이면 끝날 일을 그놈의 횡포 때문에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상대가 직접 나타나 준다면 찾을 수고도 줄일 수 있으니까.

물론 놈은 마족들에게 다시 붙은 모양이지만.

고작 해봤자 전장에서 죽 다 남은 패잔병.

천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마족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후훗, 마족들의 본거지에는 제가 친히 내통자들을 심어놨거든요. 그들이 있는 한 제게 이길 방법은 없어요.”

천사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마족의 시체를 불태웠다.

* * *

〈클리어 조건(2): 밀려오는 적들에게서 공성전에서 승리하십시오.〉

〈제한 시간: 10:02〉

43호의 양해를 얻어 저택에서 머무른 지도 벌써 2시간이 흘렀다.

앞으로 있을 적들의 침공은 10시간 남짓.

새벽이 찾아오면 사도… 아니, 천사는 내가 지닌 빛의 정기를 노리고 탐욕의 손길을 드리울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39층을 머무르면서 쓸모 있는 정보를 여럿 얻을 수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나는 커뮤니티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에 첩자를 심어둔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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