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39층에 도착하셨습니다.〉
파앗!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음 층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섬광이 눈앞을 가렸다.
빛이 가시자, 낯선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디지?”
고작 5평 정도의 작은 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방에는 출입문은커녕 작은 창문도 달리지 않았다.
어딜 둘러봐도 새하얀 벽지밖에 안 보인다.
이 상황을 묘하게 여기고 있을 무렵, 때마침 시스템창이 시야 위로 떠올랐다.
〈옵션 선택을 위해 잠시 대기실에서 대기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기실?”
처음 보는 유형의 시스템.
당장 급한 일이 있으면 몰라도 굳이 난동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검을 지면에 내려놓은 채 벽에 기댔다.
작은 공간에서 오는 안락감 때문인지, 혹은 피로가 쌓였던 모양인지 점점 눈이 감겼다.
졸음이 왔지만, 나는 애써 정신을 일깨우며 38층에서 가져왔던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빛의 정기(B)〉
- 신성의 힘이 담긴 정기이다.
- 단독으로는 따로 쓸만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 보기에는 쓸 곳이 없어 보여도 열심히 7개를 모은다면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니면 말고요! (찡긋)
- 번쩍번쩍!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간 눈이 아플지도 몰라요!
시스템창을 확인하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마지막 문구는 무슨 이유에서 들어갔는지 봐도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이제 세 개네.”
지금까지 손에 얻은 정기는 번개, 어둠, 빛.
앞으로 남은 정기는 이제 네 개인데, 시스템의 말대로라면 과연 정기를 전부 손에 얻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궁금해지는 일이었다.
물론 마지막 문장이 영 거슬리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부 모았는데, 짠! 사실은 몰래카메라입니다.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아닌가? 탑이라면 정말로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게 딴청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이번 층에서는 진영을 택하셔야 합니다.〉
〈천사VS마족, 중에 한 곳을 골라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심심해지려던 찰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 내용을 읽다 말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스템의 언급에 따르면 39층은 38층과 연계되는 층이다.
물론 38층에서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종족 중 하나로 선택되긴 했으나, 일전의 일을 겪었던 나였다.
천사들의 본성을 뻔히 꿰뚫고 있는 마당에 전자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후자지.’
진영을 택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데, 또다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삐삑! 38층의 영향으로 신한별 플레이어는 마족 측 진영으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를 택하기도 전에 진영이 결정되었다.
“뭐, 어쨌건 마족 측 진영을 선택하긴 할 거였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기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비록 강제이긴 했으나 한쪽 진영을 선택하자 방의 천장과 벽면이 허물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와아아아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도 놈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성벽을 사수해라! 여기가 뚫리면 그대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아내, 자식이 저들의 손에 의해 무참히 베여나갈 것이다!”
기우뚱 넘어가는 벽 밖에서 거센 함성과 더불어 병장기가 마주치는 파쇄음이 들려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짙은 혈향까지 풍겼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하기도 전에 기우뚱 넘어가던 벽은 지면을 향해 쓰러졌다.
이윽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필사적인 전투가 한창인 전장이었다.
마족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허여멀건 형체의 괴수가 맞붙어 백병전을 치루고 있었다.
어느 한쪽도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살육의 현장.
그리고 나는 그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미친….”
당황하다 못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시스템적인 영향 덕인지 소환될 때까지만 해도 나를 인식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시점을 지나 내 존재가 인식되었는지 허여멀건 놈들은 이쪽을 바라보고는 창을 내던졌다.
천공을 꿰뚫고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창.
나는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창과 검이 맞부딪히며 가공할만한 파공성이 일어났다.
파지지직, 일어난 스파크는 사방으로 튀기더니 검면을 이용해 힘을 흘리자, 창은 그대로 땅바닥에 박혔다.
아주 짧은 격돌이었지만 손아귀에는 저릿저릿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익숙한 감각이다.38층에서 천사와 싸웠을 당시에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허여멀건 놈에게선 천사의 힘이 느껴졌다.
더욱 확실하게 정의하자면 신성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마족과 저 괴수가 싸우는지, 그리고 어째서 괴수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지는지, 여러모로 의문이었다.
하나 내가 취할 스탠스는 하나밖에 없었다.
〈클리어 조건(1): 마족 측에 협력하여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나는 시선을 돌려 시스템창을 확인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둘리야!”
“한별! 불렀나?”
“일단 묻고 따지지도 말고 저 허연 놈들 싹 다 때려잡아.”
“알겠다! 둘리만 믿고 맡겨라!”
간만에 활약할 시간이 찾아와서 그런지, 둘리는 기쁜 듯이 콧김을 뿜어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둘리가 공중으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 위를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둘리의 등장에 마족들은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바짝 얼어붙었다.
“브, 블랙드래곤? 드래곤이 어째서 여기에….”
“설마… 우리 편인가?”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분명 저놈들이 레어에 침범하면서 드래곤님께서 노하신 모양이겠지.”
마족들은 지레 겁먹은 듯한 눈빛으로 둘리를 올려다봤다.
비록 내 앞에서는 한참 어린 둘리였지만, 녀석의 본질은 드래곤.
모든 먹이사슬의 정점인 드래곤 앞에서는 그 어떠한 생명체라고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 말을 증명하듯 둘리는 브레스를 내뿜었다.
화르륵!
시꺼먼 흑염이 부채꼴 모양으로 방사하며 허여멀건한 놈들의 몸에 붙었다.
한 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흑염은 꺼지지 않은 채, 살점을 태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족들이 생사결을 펼쳐가며 상대하던 괴수들은 둘리의 손톱에 갈기갈기 짖기며 사이좋게 쓰러졌다.
압도적인 광경에 마족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저게 드래곤의 힘이라니….”
마족들은 경악하며 경외 어린 눈빛으로 둘리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마족들의 모습을 보며 조소를 내둘렀다.
‘오바하기는.’
환상 속에서만 등장하는 드래곤의 이미지가 박혀 있는 그들과는 달리.
항상 둘리를 곁에서 바라보던 나였기에 상공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둘리는 연신 브레스를 뿜어대며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저거 브레스까지 사용 안 해도 되는 건데,”
전황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드래곤 피어만 내뿜어도 적당히 정리될 상대인데, 저런 피라미들에게 브레스를 뿜는 건 오히려 과했다.
‘둘리 저 녀석, 어지간히도 심심했나 보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둘리는 신난 듯 하늘을 누비고 다녔다.
몸은 드래곤의 것이라도 정신연령은 아직 어리니, 그럴 수밖에.
둘리에게 전부 맡기도 가만히 있기에도 뭐했기에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둘리의 등에 안착했다.
“하, 한별?”
생각지도 못해 내 등장에 둘리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등을 툭툭 쳤다.
“걱정 마, 널 잡아먹으려고 온 건 아니니까.”
단지 힘을 보태러 왔을 뿐이다.
하늘 위로 도약해 허공 위를 날아 허여멀건 놈의 경추에 검을 쑤셔 박았다.
단 한 방에 척수가 박살난 괴수는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놈의 등을 다시 밟고 같은 방식으로 괴수들을 쓰러뜨린다.
속전속결로 괴수들이 쓰러지자, 경각심을 느꼈는지 놈들은 이쪽을 향해 신성력이 담긴 창을 투창했다.
마족인 지금의 몸으론 저걸 맞았다간 치명상이다.
하나.
“나라고 그냥 당해줄 거라고 생각했으면 곤란해.”
방법이라면 있다.
좌수로 허공을 긋자, 이터의 권능이 발동함과 동시에 창을 잡아 삼켰다.
그 빈틈을 노리고 날아온 둘리가 잇따라 브레스를 내뿜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우리를 상대하기엔 무리라고 여겼는지 그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별! 저놈들 도망친다! 나머지도 둘리가 책임지고 쫓겠다!”
“됐어, 어차피 패잔병들이야. 안 쫓아도 상관없어.”
“우응… 알겠다. 한별이 그렇다면야.”
기세 가득한 목소리로 건의했으나 곧바로 거절당하자, 둘리는 시무룩해졌다.
둘리한테는 안타깝게 된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상황을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다.
나는 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에 나중에 나타나면 네가 활약할 수 있도록 해줄게.”
“와아! 한별 약속한 거다! 그 약속 기억하고 있겠다!”
내 말에 시무룩 처져 있던 둘리가 양팔을 올리며 환호했다.
생기발랄한 둘리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는지, 원.
나는 상황을 정리하고는 전장을 둘러봤다.
불과 몇 분조차 지나지 않아 정리된 전황에 마족들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다.
마족들을 바라보던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아카데미에 생활하면서 마계의 정세에 관해서라면 공부를 했었다.
그런데 전쟁이라니?
게다가 전투의 양상에서 보건대, 한두 번 전장을 겪은 초심자가 아니라 죽음에 익숙한 자들의 움직임.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전쟁터를 둘러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어… 어, 자… 자네? 자네가 어째서 여기에….”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흰 머리카락에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지만, 이목구비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43호?”
분명했다.
노병의 정체는 43호, 38층에서 나와 함께 했었던 그였다.
급변해버린 그의 얼굴에 당황하고 있는데, 43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자… 자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4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옛날 얼굴 그대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