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검을 세차게 휘두르자, 놈이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가 크게 베어졌다.
아예 반응도 하지 못할 작정으로 아주 빠르게 베어냈다.
이거라면 놈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며 검을 꺾어 다시 위로 베어냈는데, 어째서인지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묵직한 감촉 없이 비닐을 베어내는 듯한 가벼움.
“설마?”
서둘러 로브를 젖혀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쪽에 있던 존재는 온 데 간 데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한순간에 증발하기라도 한 광경.
오싹함마저 느껴지는 광경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기감을 끌어올렸다.
“……!”
기감을 끌어올리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감각에 나는 숨을 죽였다.
고민은 짧았다. 나는 곧바로 검을 세워 허리 방향으로 내리꽂았다.
그와 동시에 오싹한 기운이 허리 쪽으로 쇄도했지만, 머지않아 내 검에 막혔다.
촤아아악! 채애앵!
내가 지닌 힘과 막강한 기운이 맞붙이 치며 검신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강한 충격이 검신을 타고 흐르며 손아귀가 저릿저릿해진다.
당장에라도 검을 놓고 편해지자는 생각이 머리 한 켠에서 강하게 일어났으나, 이걸로 포기할 순 없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자세를 재정비 한 후.
상단부를 향해 검을 크게 휘두르자, 이곳을 향해 쇄도하던 일격은 금방 상쇄되었다.
〈백룡 시리즈의 효과로 정신 면역이 발동합니다.〉
시야 위로 떠 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쩐지 묘한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싶었더니 정신계 공격도 같이 했었나.’
여러모로 질이 나쁜 상대다.
“누군지는 몰라도 더럽게 싸우네.”
“어머, 칭찬 고마운걸요.”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영이 드리우며 말했다.
놈이 빛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검은 로브 속에서 숨겨져 있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백옥과 같이 하얀 피부에 등에는 순백의 날개 세 쌍이 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는 신성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하나 겉과 속은 다르긴 마련,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착각하면 곤란한데, 그거 칭찬으로 한 말이 아냐.”
“그래요? 재가 듣기론 어느 세계에서는 더럽게 싸운다는 건 상대에 대한 존경이라고 하던데 전 또 그런 뜻인지 알았네요.”
내 발언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니, 한발 늦게 도착했는지 43호가 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허억허억… 신입 말도 없이 달려가면 어떡하나. 갈 땐 그래도 같이 가는 편이….”
말을 내뱉다 말고, 뒤늦게 천사를 바라본 43호는 희게 질린 채 말을 더듬었다.
“처, 천사가 왜 이곳에?”
43호는 당황한 낯빛으로 나와 천사를 번갈아 보다 말고, 굳게 결심한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43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외쳤다.
“신입, 도망쳐라! 우리들로는 저놈을 상대할 수 없다, 여긴 내가 막고 있을 테니 서둘러 원군을 요청하도록. 그리고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도록.”
스스로 희생양이 되겠다는 발언.
그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43호의 모습에 놀라고 있을 때쯤이었다.
콰드득!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43호의 허리에 큰 구멍이 뚫리며 그대로 지면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43호의 허리에서는 피와 함께 내장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어, 어떻게….”
순식간에 쓰러진 43호는 텅 빈 동공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물음에 천사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마족 같은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 저희 천사에게 내려진 임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당신의 동료들도 죄다 같은 곳에 보내줄 테니까요.”
천사가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강렬한 신성력이 산탄총처럼 쇄도해 들었다.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마족에게 있어서 신성력은 상당한 극독이다. 신체에 닿으면 단순한 상처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둘리가 앞에 나타나 브레스를 내뿜었다.
신성력은 브레스에 상쇄되어 소멸했다.
둘리의 등장에 천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블랙드래곤? 어디서 저런 괴물이….”
예상치도 못한 둘리의 난입에 천사에게 빈틈이 생겼다.
그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Z자 형태로 책장을 즈려밟고 천사의 등 뒤를 밟았다.
그대로 목을 베기 위해 검을 움켜잡으려던 그때, 바로 뒤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아찔한 감각이 요동쳤다.
곧바로 검을 거두고는 풍압을 일으켜 다시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파앗!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강렬한 신성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서 망정이지, 만약 저기에 휩쓸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더군다나 지금의 나는 마족, 상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신성력이 느껴진 방향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손에는 새하얀 구체를 든 채 몸을 오돌오돌 떨고 있는 마족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게 놈은 43호와 내가 암살을 하려고 했던 놈이기 때문에.
‘어째서 놈이?’
왜 천사를 돕고 있지?
머릿속에서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내 시선은 놈의 손에 쥐어진 새하얀 구체를 향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익숙한 형체였는데, 그 아티팩트를 알아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 빛의 정기?”
혹시나 싶었지만, 틀림없었다.
처음이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몰라도, 이미 번개의 정기와 어둠의 정기를 경험한 나였다.
아티팩트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불길한 감이 번뜩였다.
천사의 손에 빛의 정기가 들어갔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늦게 발걸음을 뻗으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어머나, 벌써 찾아놨군요. 정말 잘하셨어요.”
마족의 앞에 한달음에 도달한 천사는 히죽 웃으며 빛의 정기를 손에 쥐었다.
천사에게 빛의 정기를 건넨 마족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제가 물건을 찾아드렸으니까. 야…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약속? 아아, 맞다. 그런 약속을 했었죠. 걱정 마세요, 저희가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요.”
“정말이죠?”
“그럼요. 저는 신의 말씀을 따르는 숭고한 사자,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게 당연한 걸요.”
천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녀의 웃음에는 섬뜩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이걸 구하는 대신에 당신의 아비를 살려주는 게 약속이었죠?”
“맞아요. 어서 저희 아버지를….”
“당신의 아비라면 여기에 있어요.”
천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강렬한 빛과 함께 피곤죽이 된 남성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얼굴은 퉁퉁 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온몸에 난 상처는 새파랗게 멍이 들다 못해 괴사했는지 시꺼멓게 변해있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꼴.
천사에게 빛의 정기를 건넨 생도는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의 품에 안겼다.
잔혹하기까지 한 광경.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사는 박수를 치며 감탄을 내질렀다.
“아름다운 부자의 상봉이네요. 아쉬워요. 정말 아쉬워, 그게 마족의 것이 아니었다면 신께서도 감명 받을 정도로 아름다웠을 텐데.”
천사는 손에서 새하얀 창을 소환해 낸 후, 남자의 목 뒤를 찔렀다.
순식간에 목을 찔린 남자는 ‘컥컥’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맥을 찔린 남자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개에 생도는 완전히 숨을 잃은 자신의 아버지를 부둥케 안으며 노성을 질렀다.
“사, 살려준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어째서 아버지를…!”
“아, 그거요? 살려서 드리긴 했잖아요. 드리고 나서 어떻게 할 건지는 상의하지 않았으니까. 제가 목숨을 취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생도의 외침에 천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족을 토벌하는 건 신께서 제게 내려주신 유일한 임무, 당신의 아버지는 그 숭고한 뜻을 다하기 위해 이용된 거니 잘된 일이죠. 당신도 곧 저자와 같은 곳으로 보내드릴게요.”
천사는 입가에 짙은 웃음기를 띄우고는 마족을 향해 신성력을 내뿜었다.
마치 탄환처럼 쏘아진 수십 발의 신성력은 마족의 몸을 꿰뚫었다.
그대로 마족은 숨을 잃고 쓰러졌다.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을 학살한 천사는 빛의 정기를 들고 마법진의 핵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사탄도 실직할 만한 상황이었다.
약속을 발로 차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부친을 죽이고서 같이 죽이다니, 이 정도면 사탄도 고개 젓지 않을까.
물론 덕분에 들일 수고를 줄였다는 것에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클리어 조건: 목표물을 암살하시오.〉
〈조건을 완수했습니다.〉
〈곧 39층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창을 바라봤다.
덕분에 금방 층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에선 다행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좋아하기에는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 손이 아닌 타인의 손으로 이번 층이 클리어 됐다는 점도 거슬리긴 했으나 그 때문이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천사부터 시작해, 빛의 정기, 그리고 의미 모를 마법진까지.
‘이게 뭐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38층의 아카데미와 천사와는 도저히 연관성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나도 빠른 급전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으나… 어찌 됐건.
‘저건 막아야겠지.’
나는 마법진을 향해 다가가는 빛의 정기를 보며 눈을 빛냈다.
빛의 정기는 마법진과 가까워질수록 동화 작용이라도 일어나는 모양인지, 강한 기운과 함께 빠르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어차피 다음 층으로 등반하면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감이 들었다.
당장 놈을 막지 않으면 다음 층에도 영향이 갈 정도로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
그리고 저 마법진의 용도를 모르는 지금으로선 함부로 빛의 정기를 이용하게 둘 수는 없었다.
서둘러 그들을 향해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려는데, 그보다도 먼저 마법진이 발동했다.
파아아앗!
마법진이 발동하자마자 강한 압박력과 함께 새하얀 섬광이 눈앞을 물들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다름이 아닌 신성력이라는 것을.
저기에 닿으면 내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리라.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천사는 손에 빛의 정기를 쥔 채,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어림도 없어요. 이걸 갖고 싶나 봐요? 갖고 싶으면 줄 수 있어요. 다만 저한테 복종하면….”“복종은 무슨… 필요 없어. 둘리야, 뺏어!”
“알았다!”
내 외침에 한 켠에 몰래 숨어 있던 둘리가 빛의 정기를 낚아챘다.
한순간에 물건을 빼앗긴 천사는 뒤늦게 반응했지만, 둘리의 스피드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둘리에게서 빛의 정기를 전해 받고는 옅은 웃음기를 얼굴에 띄었다.
“아, 이걸 찾고 있어?”
중요한 물건을 내게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쪽을 얕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그걸 뺐으면 뭐라도 될 줄 알았어요? 후후, 이미 당신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신성력으로 된 결계를 쳐놨어요. 어차피 당신은 궁지에 몰린 쥐, 다시 뺐으면 될 일이죠.”
천사의 말대로였다.
슬쩍 기감을 통해 살펴보니, 이곳에서 발동된 마법진은 일종의 결계로서 안과 밖을 출입을 막고 있었다.
당장 빼앗겨도 다시 회수하면 된다고 판단한 천사.
그렇게 굳게 믿는 천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통용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바깥에 나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는 일이니까.
〈다음 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에 고개를 끄덕이자, 강렬한 섬광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천사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천사를 향해 나는 보란 듯이 빛의 정기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가져갈게.”
* * *
〈신한별 플레이어가 3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따라서 연계층, 39층 시나리오: 선과악이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