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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30화 (130/175)

제130화

상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던 그때였다.

끼이이익!

마치 철근이 휘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천장이 주저앉았다.

육중한 무게를 지닌 잔해는 생도들의 머리 위로 수직 낙화했다.

대처할 틈도 없이 떨어져 내린 잔해들로 인해 생도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수백 명이 모인 강당.

한 번 일어난 혼란은 줄줄이 이어 상당한 파장을 일으켜냈다.

“비, 비켜!!”

“가… 감히 이 몸이 누군지 알고 미느냐! 내가 먼저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단 말이다!”

“내 알 바야! 좀 앞길 막지 말고 꺼지라고!”

생도들은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보고는 아연해졌다.

뒤늦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잔해가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잔해가 지면에 떨어지기 바로 직전.

“워워! 작은 소동이지 별난 일은 아니니까, 다들 진정해.”

단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소녀는 싱긋 웃으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소녀의 손짓에 떨어져 내리던 잔해가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신비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소녀의 진두지휘로 혼란은 금방 정리되었다.

한순간에 정리된 상황 속에서 나는 손아귀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쯧, 하필이면 그런 일이 일어나서.’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인파가 몰려들면서 놈을 놓치고 말았다.

분명 우연의 일치로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모로 유감스러운 상황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곤혹스러운 표정의 43호가 서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군. 가능하면 개인 행동은 삼가도록.”

사뭇 심각해 보이는 내 표정에 43호는 더 이상 물어보길 주저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에 그놈에게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방치했다간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던 것이 걸렸던 모양인지, 품속에 있던 둘리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한별, 걱정하지 마라! 아까 전에 그 사람이라면 둘리가 냄새를 맡아놨으니 언제든 찾을 수 있다!”

“그래? 그렇다면야.”

둘리가 덧붙인 말에 나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상대의 정체는 둘리가 파악하고 있으니 견제도 금방 할 수 있을 것이고.

하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은 괜한 일이다.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딴 일에 신경 쓸 순 없지.’

〈클리어 조건: 목표물을 암살하시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목표물의 암살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 외의 사람의 일 따윈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일단 저놈부터.”

나는 바깥으로 나서는 암살대상자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 * *

다사다난한 일들로 가득했던 입학식이 끝난 후.

그로부터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설레고 무궁무진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동안, 나는 나날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주된 내용은 암살대상자의 관찰.

언제 암살할 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때만을 기다리며 나와 43호는 놈의 생활 반경은 물론 습관까지도 철저하게 조사했다.

물론 기왕 아카데미에 온 김에 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그 증거로 나와 같이 38층을 등반하는 소녀는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아카데미를 즐기는 중이니까.

하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다음 층으로 등반하게 되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연.

그럴 시간에 어서 탑을 등반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도록 시늉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만월이라더군. 괜히 바깥에 나서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수업이 끝나기 직전 담당 교수가 엄숙한 분위기로 말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생도의 대다수는 고위급 마족이거나 흑마법사의 비중이 상당수였다.

마족의 주된 약점은 햇빛과 달빛.

그로 인해 아카데미는 가능한 바깥 환경과 단절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주의로 인해 경미한 부상자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만월이라니.

‘교수들도 골머리를 앓겠는데,’

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교수를 바라봤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생도의 대다수는 내로라하는 고위급 마족의 자제들이다. 단순히 공무원인 그들한테는 살아있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듭 주의를 주고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 폭풍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특히 추가로 이야기해두지만, 최근 들어 별동에서 실종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아카데미 측에서도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아무쪼록 별동에는 접근하지 말도록.”

“예에, 알겠습니다!”

거듭되는 교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생도들은 들은 둥 마는 둥 대답했다.

교수의 경고보다는 어서 수업을 마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선 까닭이었다.

생도들의 모습에 교수는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난 직후.

내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저씨! 잘 지냈어?”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소녀가 복도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아카데미의 인기인이 된 모양인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휘어잡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당사자는 못 알아차린 듯한 모습이지만.

그대로 소녀는 내 곁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오래간만이네.”

“아저씨 아니라니까.”

“하하, 어쨌건 호칭은 상관없잖아.”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더니, 이윽고 눈치를 살피듯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건네왔다.

“글쎄, 들어봐. 이건 학생회에만 알려진 사실인데 최근에 별동에서 실종자가 생기고 있다는 거 알지?”

“듣긴 했어.”

안 그래도 방금 막 교수가 말해준 참이었다.

시큰둥한 내 대답에 소녀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 실종이라는 게 말이지? 사건 현장이 좀 수상하더라고.”

“현장이?”

“맞아, 아저씨! 사건 현장에는 당시 실종자의 옷이나 물건밖에 없고 마치 증발하기라도 한 거처럼 행방불명, 게다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실종자는 죄다 마족이야. 어때?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지 않아?”

적당히 대꾸해주자, 소녀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그 대답에 나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서 그걸 말한 이유가 뭔데?”

“그냥 필요할까 봐.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모르는 거잖아.”

소녀는 그리 대답하며 어디에서 꺼냈을지 모를 사과를 크게 베어 물었다.

혹시라도 입학식 당시에 봤던 그놈하고 관련 있는 이야긴가 싶어 집중해서 들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맥이 풀렸다.

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소녀는 툭툭 치며 한 입 베어문 사과를 내게 건네왔다.

“어때 아저씨도 한 입 할래?”

“안 먹어도 돼. 그리고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는데, 넌 이번 층을 클리어하는 조건이 뭐야?”

문득 떠오른 의문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소녀는 시시하다는 듯 내밀었던 사과를 다시 한 입 베어물었다.

“응? 내 조건이 궁금해?”

“어.”

“별건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9할 이상의 생도에게 호감을 받기.”

소녀는 깜찍하게 윙크를 날리며 대답했다.

상큼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다.

맙소사.

그냥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이번 층을 등반할 수 있다고?

소녀의 대답에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내가 지금의 클리어 조건이 아니라 저 녀석이 받은 조건을 받았다면...

“한별이라면 인기는커녕 악명만 늘었을 거다!”

만약을 생각하며 가정하고 있을 즈음,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품속에 숨어있던 둘리가 외쳤다.

악명이라...

인정하긴 싫지만, 둘리의 의견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왜인진 몰라도 그럴 거 같단 말이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무렵, 소녀는 얼굴을 불쑥 내밀어 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 저번에 봤던 꼬마 돼지구나!”

“둘리는 돼지가 아니다! 그 유명한 블랙드….”

“응응, 알아. 흑돼지라고?”

“그게 아니라… 읍읍!”

“알았어, 알겠으니까. 사과나 한 번 먹어 봐.”

뒤늦게 둘리가 항변했지만,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소녀는 사과를 둘리의 입에 물렸다.

둘리는 사과에 매료되어 항변할 생각을 잃었는지, 기쁜 듯이 사과를 베어 물고 있었다.

뭐, 어쨌건 이걸로 볼 일은 끝이다.

슬슬 일어나서 소녀와는 헤어졌다.

마음 같아선 시시콜콜한 대화나 하고 싶지만,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서로 할 일이 있다.

바깥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43호가 서 있었다.

“조금 늦었군.”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탓하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아차린 사실인데, 평소에 말투가 날카로워서 싹수없게 느껴져서 그럴 뿐이지 누구보다도 정이 많은 남자였다.

살수 주제에 정이 많다니 우스운 이야기지.

곁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조소를 머금고 있을 즈음.

43호는 평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상자가 별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암살대상자가 별동으로 움직였다.

여기에서 뜻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아카데미에서 드디어 놈을 암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뜻.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번째는…

“이거 찜찜한데.”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별궁을 향해 움직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에서 소녀가 해줬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별동에서는 마족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대.’

그건 그렇다 치고.

“놈은 왜 별동으로 갔답니까? 아카데미 측에서 폐쇄 명령이 내려진 걸로 아는데.”

“알 필요 없다. 우리는 살수, 검에 감정이 이입되면 안 된다.”

궁금해도 그 이유를 묻지 말라는 뜻.

‘말 한 번 어렵게 하네. 그냥 자기도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이지.’

어쨌건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드디어 암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다는 것, 만약 이번 기회를 놓쳤다간 이 황금 같은 기회가 언제 찾아볼지 모른다.

시시콜콜한 감정을 배제한 채, 우리는 별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별동은 원래 동아리실이나 아카데미의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사용하던 곳인데, 폐쇄 명령으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아서인지 음침한 기운이 가득했다.

우리는 반쯤 깨진 창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주의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놈은… 지하인가.’

암살대상자의 흔적은 입구부터 시작해 지하로 이어졌다.

무슨 이유로 별동의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을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자, 지하에는 거대한 규모의 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책 냄새.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움직이고 있을 때쯤이었다.

파앗!

묘한 인기척이 느껴져서 순간 시선을 돌리자, 언제부터 쓰여 있었는지 지면에는 각종 글씨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적혀 있었다.

“이건….”

서둘러 도약해 책장의 위에 도달한 나는 도서관의 지면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진…?’

마법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래도 탑을 등반하면서 보고 겪은 게 있다.

그런 내 눈썰미는 놓칠 순 없었다.

도서관의 지면에는 거대한 규모의 진법이 원의 형태를 그리고 있었는데, 저건 틀림없는 마법진이었다.

어디에서 쓰이는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좋은 예감이 들진 않았다.

만약 저 마법진이 그대로 발동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서둘러 기감을 넓혀서 주변을 살펴보자 도서관에는 나와 43호 외에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중 한 명은 내가 따라온 암살 대상자일 것이고.

나머지 한 명은…

품속에서 강한 움직임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둘리가 바깥으로 나오며 외쳤다.

“하, 한별! 놈의 냄새다!”

둘리는 횡설수설하며 외쳤지만, 녀석의 말은 금방 알아차렸다.

둘리가 칭하는 놈은 38층에서는 단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입학식날 내가 놓쳤던 그놈이렷다!

서둘러 지면을 박차고 그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주 짧은 찰나에 벌어진 상황, 갑작스러운 내 모습에 그들은 당황한 듯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걸 놓칠 내가 아니다.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로브를 있는 힘껏 베어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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