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자코 대기실에 앉아 대기하고 있자, 관계자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신한별 씨 다음 차례입니다. 준비하고 앞에서 대기해주십시오.”
그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계자의 인솔에 따라 측정실 앞으로 다가가자 바로 앞의 도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는 작은 원석이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도전자는 원석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위이잉!
도전자의 몸에서는 섬뜩한 기운이 감도는 검붉은 기류가 은은하게 풍겼다.
43호에게 사전에 들어놨었기에 저 힘의 정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마기.’
마족과 흑마법사들은 마기를 응용해 힘을 발현시킬 수 있는 동력원으로 사용한다.
도전자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그 힘을 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기는 원석을 잠식시키더니, 이내 강한 폭발력을 일으켰다.
지면이 미약하게나마 떨릴 정도의 충격.
원석의 주변으로 풍기는 검은 연기가 가시자, 그 위로 점수가 떠올랐다.
[점수: 810점]
[합격 축하드립니다! 입학 대상자입니다!]
입학대상자라는 문구에 양손을 위로 뻗으며 감탄사를 흘리는 도전자.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그러는 와중에 내 차례가 다가오고, 나는 원석의 앞에 섰다.
“아아- 참가자 신한별 씨 들리시나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위력으로 그 앞에 있는 원석을 강타해주시면 됩니다. 앞서 보셨겠지만, 본교의 입학 커트라인은 500점이니 이점 참고해주십시오.”
그 안내를 끝으로 원석의 앞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커트라인은 500점.
잘됐네.
앞서 도전한 사람을 봐두어서 요령은 대충 알고 있다.
“후우.”
나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뒤로 젖힌 주먹을 일거에 터뜨리듯 짧게 내뻗었다.
파앗!
내뻗은 풍압이 원석에 직격하며 나를 중심으로 강한 바람이 사방을 일렁인다.
앞으로 뻗은 주먹을 회수하며 바람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딴청을 피우며 점수를 기다리고 있자, 관계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 어… 신한별씨 축하드립니다. 입학 확정되었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그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그러자 관계자는 얼떨떨한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요. 정말 다행이네요. 500점이 커트라인인데 정확히 500점이 나오실 줄이야. 1점이라도 떨어졌으면 불합격할 뻔했습니다. 운이 좋으시네요.”
[점수: 500점]
[합격 축하드립니다! 입학 대상자입니다!]
정확히 커트라인에 걸친 점수.
그렇게 입학서를 받은 채, 바깥으로 나서려는데 문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드리웠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해놓고는 그 점수인가.”
바로 다음 차례였는지 43호는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 있게 말해놓고선 정작 점수는 입학 커트라인에 걸쳐 있다.
그가 보기에는 오만감으로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오해를 다시 되잡아 주기로 했다.
“그야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하다고? 뭐가 당연하다는 거지?”
내 반박에 미간을 꿈틀거리며 되묻는 43호.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입학자들에게 섞여서 조용히 잠입해야 하는 암살자, 그렇다면 당연히 높은 점수를 획득할 시에는 눈에 띄게 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부로 점수를 조작한 거다. 그건가?”
“잠입을 위해선 살수의 기본이죠.”
“…….”
능청스러운 대답에 43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눈을 부라렸다.
높은 점수를 받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간 당연히 잠입에는 마이너스가 되는 요소다.
살수는 은밀히 사람들의 흐름에 녹아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그 의미를 깨달은 43호는 비장한 얼굴이 되었다.
“옳았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에는 선배로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43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측정실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객기를 부리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렇게 43호 역시 원석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힘을 최대한 억제하고 입학 커트라인을 맞추려고 한 듯한 일격.
하나 결과는 유감스러웠다.
[점수: 570점]
“아, 그럭저럭이네요. 네, 입학 확정되었습니다. 귀가해주셔도 됩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이지도, 살수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닌 애매하기 짝이 없는 점수.
나와는 달리 시큰둥한 관계자의 발언에 43호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측정실을 나섰다.
나는 43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평범하네요. 역시 선배입니다. 평범한 걸 보니 살수로서 귀감이 되네요.”
“…….”
이죽거리는 내 발언에 43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너털너털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모처럼의 해프닝이 생기긴 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입학식 당일이 되었다.
입학식은 아카데미의 생도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
내가 암살해야 할 대상은 무려 마계 대공의 후계자.
제 권력만 믿고 마음대로 하는 망나니였지만, 제아무리 놈이라도 입학식을 빠질 순 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나와 43호는 목표물을 기다렸다.
“찾았다. 저 녀석이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던 43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손짓했다.
그가 손짓 한 곳을 살피자, 그곳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무잡잡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흐음... 그냥 평범하게 생겼는데.”
특이점이 있다면 다른 생도에 비해서 음침해 보인달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자, 43호는 쥐고 있던 종이를 손으로 구겼다.
“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놈은 마족임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금기를 저질렀다.”
이번 층을 등반하면서 안 사실인데, 마족과 흑마법사에게 신성력의 존재는 존재를 위협할 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성력을 다루는 건 물론 관련된 아티팩트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할 정도.
“분명 방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암살 후 신성력의 획득 루트까지 취해야지.”
43호는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남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혹시나 싶어 무언가 느껴지지 않을가 싶어 감을 기울어봤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 외에도 딱히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뭐지?’
차라리 위화감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마족마다 영역 싸움이 심하다고 하던데 신성력을 핑계로 그냥 적의 전력을 암살하려는 건가.
문득 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설령 정치적인 이유로 휘말렸다고 해도 그건 놈의 사정.
나야 놈을 암살해 이번층만 클리어 하면 된다.
“신입 어쨌건 조심해라. 기회는 단 한 번쁜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우리도록.”
43호는 경고를 건네고는 다른 장소로 돌아갔다.
그의 말에 의문이 생겼는지 품속에 숨어 있던 둘리가 얼굴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한별, 궁금한 게 있다. 여기에서 표적을 죽이면 안 되나?”
충분히 궁금증을 가질만한 의문.
나 또한 한때 둘리와 마찬가지로 생각했었다.
놈이 문제면 암살을 할 게 아니라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슥삭하면 되지 않나 하고.
하나 그 생각은 이내 고쳐먹었다.
그도 그럴 게.
“안 돼. 이번 층의 조건은 암살이잖아.”
탑이 융통성이 있는 편이라고 해도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편이다.
암살이 아닌 공개석상에서 처리하면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실험할 필요는 없다.
“기왕이면 안전하게 하자고.”
“뭐... 그렇다면 알겠다! 한별의 말대로 하겠다!”
둘리는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암살 대상자를 살피면서 대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강당을 밝히던 전등이 꺼진 것은.
달칵!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예정 중 하나였는지 당황하는 생도는 없었다.
이윽고 조명은 아무도 없는 단상에 집중되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쯤, 단상 방향에서 새하얀 연기가 일어나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안녕, 얘들아!”
단상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백발의 숏컷이 인상적인 소녀.
다소 이질적인 행색이라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나는 반 박자 늦게 상대의 정체를 알아봤다.
‘37층에서 봤던 그 소녀?’
확실하다.
하긴 소녀가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36층부터는 단체층.
37층에서 동시에 층을 클리어하고 같이 등반하기 시작했으니, 같은 층에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녀는 빗자루에 타고 단상 위를 맴돌다가 고깔모자를 손에 쥐며 외쳤다.
“반가워. 오늘부터 회장을 맡게 되었어.”
회장이라고…?
소녀의 난데없는 선언에 당황하고 있는데, 다른 생도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예상 밖으로 싱거운 반응이었는지 소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두가 귀찮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가운데,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묘한 살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건?”
갑작스러운 살기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주 미약한 기운이지만 착각일 리가 없다.
끈적거리면서도 언제라도 덮칠 것 같은 따가운 살기.
비단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품속에 숨어 있던 둘리가 살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한별! 저기다! 저기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렇지?”
둘리의 조용한 속삭임에 나는 검을 스프링 나이프로 전환하며 생도 사이를 가로질렀다.
나 혼자면 몰라도 둘리까지 살기를 직감했다.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순 없는 일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묘한 긴장감 속에서 발걸음을 뻗었다.
이윽고 나는 놈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잠시 나 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