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38층입니다.〉
〈플레이어 직업에 따른 적절 종족을 탐색 중입니다.〉
〈띠링! 직업 [이터]의 적절 종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사 종족군으로 배치됩니다.〉
〈종족명: 마족〉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자, 강렬한 섬광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창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말고, 이질적인 느낌에 몸을 더듬거렸다.
이윽고 손에 잡힌 형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개랑… 뿔?”
착각이 아니다.
서둘러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자, 머리와 등에는 날개와 뿔이 달려있었다.
또 내 눈동자도 평소와는 달리 보란 빛의 띄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었지만, 금방 수긍했다.
시스템창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이번 층에서는 마족이라는 종족이 되었다니까.
등에 달리 날개를 조금씩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둘리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 것은.
“한별! 한별, 웃긴 모습이다! 머리에 뿔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둘리는 내가 바라보고 있던 수면 속에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둘리는 짤막한 다리를 꼬며 수면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 모습에 나는 둘리의 머리를 물속으로 밀었다.
“이게 어디서 놀리고 있어.”
“어푸! 우으으읍! 하, 한별! 입 안에 물 들어온다! 어푸푸우웁!”
“알고 있으니까 하는 거야.”
한동안 물속에 빠져 있던 둘리는 지면 위에 올라와선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빠져 있는 동안 물을 많이 마셨는지, 둘리의 배는 물풍선처럼 빵빵하게 튀어나온 상태였다.
아니, 그냥 살쪄서 그런 건가.
아무튼 나는 손을 펼쳐서 37층의 보상을 확인했다.
〈환영의 보옥(B)〉
- 머릿속에서 떠올린 물건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 무엇이든지 전부 변할 수 있다고 황금으로 만들어 거래하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그건 범죄예요!
내 손아귀에 쥐어진 것은 작은 크기의 구슬이었다.
설명을 읽고는 머릿속으로 거울을 떠올려보자, 아티팩트는 내가 떠올린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티팩트의 쓰임새를 발견한 나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 괜찮은데.”
시험 삼아 아티팩트를 몇 번 더 조작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록 당장은 필요로 할 일은 없을 것 같아도 나중에는 큰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티팩트를 포켓에 수납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고요한 적막이 감도는 숲속이었는데, 하늘에는 유난하리만치 큰 초승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가슴을 안정시키고 고양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
무언가에 홀리듯 초승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 한별! 죽으면 안 된다!”
한쪽에서 입으로 물을 내뱉고 있던 둘리가 버럭 소리를 외치며 몸을 밀어뜨렸다.
둘리의 몸통 박치기에 나무의 그늘에 넘어진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윽, 뭐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둘리의 행동에 다그치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양팔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통증에 고개를 내리자, 무슨 이유에선지 내 피부는 붉게 그을려 있었다.
마치 강력한 산성을 양팔에 끼얹은 듯한 모습.
‘뭐야? 누구한테 당한 건 아닌데?’
뜻밖의 상황에 이맛살을 구기고 있을 무렵, 둘리는 내 품에 몸을 내던지듯 안기며 외쳤다.
“괜찮나? 한별 이상하다! 아까전에 하늘을 보고 있는데 한별의 몸은 돼지통구이처럼 구워지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하필이면 비유가 돼지통구이야.”
둘리의 비유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둘리에게 그 말의 의미를 물었다.
“그래서 돼지통구이처럼 구워졌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다! 한별이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몸이 노릇노릇 구워졌다!”
“구워졌다고?”
그 말에 의아심을 가지려던 그때, 시스템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주의! 마족의 특성상 햇빛에 닿으면 치명상을 입습니다.〉
뒤늦게 떠오른 시스템창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왕 알려줄 거면 빨리 알려주지.’
왜 뒤늦게 알려줘서 이런 꼴을 당하게 하는지 참...
나는 가볍게 넘기려다 말고, 머릿속에서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밤이라서 햇빛이 없지 않던가?
그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부가 설명을 하듯 시스템창이 새롭게 떠올랐다.
〈달빛도 결국에는 햋빛이 반사되어 일어나는 거니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튼 빛을 조심하세요!〉
시스템창을 바라보던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조금만 더 일찍 알려주면 어디 덧나냐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뒤늦게 알려주는지 모르겠다.
“일단 하나는 확정났네.”
“음... 어떤 게 말인가?”
“종족 가챠에서 꽝이 걸린 게 말이야.”
아침이든 밤이든 빛이 있는 곳에선 활동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으면 뭐 어쩌라는 건가.
아무튼 결국 이것도 이겨내야 하는 역경이다.
이제 와서 죄다 불만이라고 찡얼거릴 순 없었다.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을 찾아보기 위해 시스템창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거기서 뭐하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향해 한 남성이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음침한 인상.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뿔과 날개가 달린 것을 봐선 같은 마족인듯했다.
“거기에서 뭘 하냐고 물었다. 못 들었나?”
저쪽은 날 아는 눈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내 기억 속에는 남자의 얼굴은 없었다.
그것은 둘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슬쩍 시선을 돌리자, 녀석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 팔을 들어올렸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눈치.
나뿐만 아니라 둘리도 초면이라는 것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참 기억 속을 뒤지고 있을 무렵, 남자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쪽을 불렀다.
“신입! 대답 안 할 생각인가?”
신입?
지금 날 보고 하는 말인가?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다시 바라보자, 남자는 얹짢은 기색을 곁으로 내뿜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 너 말이다! 쯧, 하여간 요즘 것들은 빠져서, 임무 중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니…….”
그 이야기에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혹시 이번 층은 탑에서 나에게 역할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 남자는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력자 역할 중 하나고.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꽤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탑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다면 우선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말에 맞추는 것이 최선이리라.
“하하, 죄송합니다. 잠시 식량을 찾는다고….”
“식량? 그런 것치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즉흥적으로 꺼낸 말에 그는 의아스러운 눈치로 주변을 살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내뱉은 거라 당연히 식량이라고 할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둘러 대신할 만한 걸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와중.
내 시선에는 익숙한 형체가 걸렸다.
고민은 짧았다.
“아, 이놈입니다!”
“으으읍⎯”
둘리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리자 녀석은 난동을 피웠지만, 나는 재빨리 둘리의 입을 가로막았다.
한동안 둘리를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음… 뭔가 싶었더니 야생 돼지였나. 한참 작은 걸 보니 한 입 거리도 안 되겠어. 그냥 혼자서 먹어라. 난 비상식량을 갖고 왔으니 됐다.”
여전히 의심은 남아있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수긍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안심했다.
우선 가장 큰 의심은 벗어났다.
그렇게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넘기고 있는데,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됐으니까. 출발할 테니까. 빨리 챙겨라!”
“출발한다고 하면 어디에?”
“쯧, 이래서 요즘 것들은….”
남자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눈길을 흘리며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하고 혼자서 가고 싶었지만,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이 나오지 않은 이상 남자가 유일한 단서였다.
어떻게 해서든 남자를 통해 이번 층에 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
그런 결심을 하며 인내하자,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다시는 안 알려줄 거니까.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도록.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카데미에서 마계 대공의 후계자 암살이다.”
〈클리어 조건: 목표물을 암살하시오.〉
* * *
그렇게 남자와 동행하면서 몇 가지 알아낸 정보가 있었다.
우선 우리의 소속은 암살 단체의 살수.
아무래도 나는 그 단체에서 신입이라는 게 기본적인 배경 설정인듯했다.
그리고 시스템창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들은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 대공의 후계자를 암살하러 가는 중이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우리가 살수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 주의하도록.”
남자 43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검붉은 빛이 감도는 단을 건넸다.
“혹시 누군가에게 정체가 발각되는 일이 있다면 이걸 어금니에 끼워뒀다가 가차 없이 깨물도록, 적어도 고통 없이는 갈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금니에 끼우는 시늉을 했다.
설사 남에게 들킨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나는 탑을 등반하는 게 목표지, 기껏 이곳에서 자살하는 건 사절이다.
‘살벌하긴 하네.’
마족이라서 그런가, 발상도 칙칙했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 간의 동행 끝에 아카데미의 입구에 도착했다.
43호에게 사전 정보를 들으면서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아카데미는 마계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고 불리는 명성답게 상당한 규모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위조 신분을 지니고 입학 시험에 참여했다.
입학 시험이라고 해서 혹시나 어려운 문제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긴장했지만, 의외로 시험은 간단했다.
시험 내용은 구체로 된 계기판에 자신의 힘을 써서 일정 점수를 넘는 것.
대상자가 지닌 무력에 따라 점수가 각기 다르게 나오는듯했다.
그렇게 대기 시간이 한참 지나, 내 차례가 다가오고.
“어디 잘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43호는 거만한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콧대를 꺾어줄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