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아무리 생각해도 발가락에까지 반지를 끼는 것은 뇌절인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실제로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 좋은 꼴로 보일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두더지에게 머릿속에서 떠오른 궁금증을 물었다.
“그나저나 전에 아티팩트의 등급이 높을수록 복사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것치고는 엄청 빠른 것 같은데?”
다른 아티팩트면 모를까.
자그마치 A+급 아티팩트.
등급이야 그렇다 쳐도 유채아와 대화를 나누고, 37층에 등반하기까지 길어봤자 10분 남짓인 거 같은데.
그 짧은 새에 A+급 아티팩트를 복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데…
‘진짜 복사 버그라도 일어난 건가?’
⎯하는 생각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자, 두더지는 곡괭이를 들어 올리며 반박하고 나섰다.
“형씨, 그런 건 아니니 착각하지 마소.”
아니, 아직 아무 말도 안 꺼냈는데?
혹시 텔레파시 뭐, 그런 것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내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두더지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딱 보면 압니다. 아까 전의 그 눈빛 누가 봐도 실례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거든요.”
두더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의 발언에 둘리는 어딘가에서 들고 온 수박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힘을 실었다.
“그렇다! 한별은 얼굴 자체가 실례다! 퉤퉤퉷!”
둘리는 입안에 잔뜩 모아놨던 수박씨를 총처럼 연사하며 외쳤다.
생각지도 못한 아군의 등장에 두더지는 눈물을 흘리며 둘리의 손을 붙잡았다.
“크흑! 흐흐흑, 드래곤 형씨 당신도 잘 알고 있나 보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반지와 함께 열 개나 만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드래곤 형씨! 당신을 위해서 복숭아도 준비해뒀으니까. 그것도 좀 드십쇼.”
“와! 먹을 거 주는 동물은 좋은 동물이다! 고마우니까, 그 마음 생각해서 맛있게 먹겠다!”
녀석의 발언에 둘리는 하늘 위로 양손을 올리며 기쁜 듯이 외쳤다.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둘리의 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넌 그만 좀 먹어. 과자를 그렇게 먹어놓고 아직도 들어갈 배가 남아있어?”
“하, 한별… 남의 호의는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럼 이것도 내 호의니까. 내 옆에서 손 번쩍 들고 가만히 서 있어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간식 없는 거 알지?”
“알겠다….”
그제야 둘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양손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먹는 거야? 뱃속에 죽다 만 걸신이라도 들렸나.
어쨌건.
생각지도 못하게 둘리의 난입으로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복사 버그가 아니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만든 거야?”
“그야 간단한 일이죠. 사실 하늘 공원과 탑에서의 시간 흐름은 다르거든요. 아마 형씨에게는 한 찰나의 순간이었겠지만, 저한테는 자그마치 몇 개월이나 걸린 일이거든요.”
아, 그래서 처음에 보자마자 다짜고짜 화부터 낸 거였나.
아마도 상황을 보건데, 나는 하늘 공원에 직접 연락을 넣을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안 되는 것 같았다.
이른바 일방통행.
그런데 그 와중에 아티팩트를 열 개나 주문이나 했으니 화를 받을 만도 한가.
“대충 튜토리얼과 탑의 시간대가 다른 것하고 같은 메커니즘인 건가 보네.”
“튜… 토리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뉘앙스를 들어보니 비슷한 것일 겁니다.”
두더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머리에 쓴 헬멧을 두들겼다.
“어쨌건 형씨 세계와 시간 흐름이 다르다고 해서 계속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 그건 알고 계십시오.”
그 말에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하늘 공원의 쿨타임: 190:59〉
아, 이런 뜻이었나.
하긴 제한도 없이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 있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시간은 대략 1주가량인가.’
그거면 충분하다.
잠깐만, 그렇다면 일주일 간격으로 복사 버그를 쓸 수 있다는 건가?
오히려 개꿀인데?
물론 직접 일하는 두더지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가라앉은 눈빛으로 힐끔 바라보자, 녀석은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섰다.
“어찌 됐건 한숨 쉬고 싶으니 한동안은 부르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지금은 복사할 물건은 없으니까. 그동안에라도 쉬고 있어.”
나는 시선을 옮겨 둘리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괴수도 때려잡고, 랭커급 플레이어들도 가볍게 상대하는 녀석이지만 겨우 손드는 게 뭐가 힘든지 얼굴을 찡그리는 둘리.
그만 내려달라는 무언의 압박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았으니까. 손 내려.”
“후욱후욱… 힘들어 죽을 뻔했다!”
“새끼가 엄살은.”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둘리에게 복숭아를 던져줬다.
“먹고 싶다고 했지? 이번 한 번만이야.”
“하, 한별…!”
두 손에 복숭아를 받아든 둘리는 감동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는 녀석을 뒤로한 채, 나는 37층으로 이동하는 버튼을 선택했다.
〈37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하늘 위에서 강렬한 빛기둥이 떨어졌다.
* * *
〈37층입니다.〉
〈클리어 조건: 왕좌를 탈취하라!〉
〈10:00〉
눈앞을 비추던 섬광이 가시자, 새하얀 풍경이 펼쳐졌다.
“우와… 예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백옥과 같이 새하얀 석재로 만든 콜로세움이었다.
마치 신들의 신전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듯한 풍경.
콜로세움의 거대한 위엄에 나와 둘리는 넋을 잃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에 도착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콜로세움의 곳곳에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건가?”
혹시 몰라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이후에 37층에 도착하는 플레이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너무 늦은 건 아닌 모양인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딱히 불쾌한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아는 사이인가 보네.”
“한별은 외톨이다! 둘리가 아니면 놀아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아싸다 아싸!”
가만히 서 있는데, 둘리가 명치가 때리고 들어왔다.
묵직한 한 방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제자리에서 멈춰섰다.
아니… 탑에서 아는 사람이면 유채아도 있는데.
⎯라는 변명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구태여 입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걸 입 밖으로 내뱉으면 남아있는 자존심마저 더 추할 거 같아서.
그 대신 손가락으로 둘리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는 너도 아는 친구 없으면서.”
소소한 논쟁을 뒤로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서로 익숙한 안면인지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인원은 20명가량.
왠지 모르게 플레이어의 얼굴은 나한테도 익숙했는데, 자세히 보니 36층을 같이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같이 클리어했다기보단 내가 운전하는 버스를 탑승한 거나 마찬가지지 않나?
머릿속에서 그런 의문을 떠올릴 때쯤이었다.
“혹시 신한별이 맞지?”
조금 전부터 쭈뼛쭈뼛 다가오던 한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나이는 대략 이제 막 20살이 얼추 넘어 보였을까.
소녀는 마법사 계열의 직업인 모양인지 스태프를 들고 있었는데, 스태프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뼈 형상을 띄고 있었다.
상당한 악취미다.
마법사 중에는 고약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던데, 그런 부류인가?
“지금 고약한 악취미라고 생각했지.”
“......!”
불쑥 튀어나온 발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소녀를 바라봤다.
내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서 드러난 모양인지 소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그야 날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그것도 잠시, 소녀는 표정을 바꾸곤 나를 향해 손짓했다.
“뭐, 별 건 아니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온 거야. 36층 말이야. 영원히 탑을 클리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다들 어색한 탓에 말을 못 건네서 그렇지 비슷하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걸.”
슬쩍 고개를 돌리니, 소녀의 말대로 다른 플레이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이곳을 곁눈질로 보는 중이었다.
“맞지?”
소녀는 가볍게 손키스를 날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겠지만, 문득 관심이 동했다.
어쩌면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에 나는 서둘러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넌 이름이 뭐야?”
“글쎄, 그건 노코멘트로 할게. 너도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곧 알 수 있을 거라고?
소녀의 말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보다도 먼저 하늘이 갈라지며 무수한 별빛이 하늘에 도래했다.
밤하늘을 가르고는 검은 중절모를 쓴 진행자가 나타났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이거야 절 많이 기다리셨던 모양이네요.]
“사설은 됐고, 바쁘니까 본론부터 말해.”
진행자의 말을 끊고 중간에 끼어들자, 놈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걸 보니 이 진행자는 슬프군요. 뭐, 신한별 플레이어의 말씀대로 본분을 다해볼까요.]
진행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부터 멋들어진 왕좌가 다섯 개 떨어졌다.
콜로세움의 곳곳에 떨어진 왕좌.
갑자기 벌어진 이변에 플레이어들은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행자는 말을 이었다.
[자,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플레이어는 제한 시간 동안 왕좌를 지킨 5인뿐, 뭣들 하십니까? 티켓을 어서 차지하셔야죠,]
진행자의 짙은 미소에 플레이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왕좌를 향해 뛰쳐나갔다.
모두가 다급히 서두르는 와중이었지만,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단지 이것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어서.
그러던 내 시야에 왕좌 중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그 왕좌는 다른 곳에 비해서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물들로 돋보였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진행자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건 보너스 왕좌! 저걸 차지할 시 내내 능력치 50% 저하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큰 보상을 준답니다!]
도전해볼 거면 도전해보라는 듯한 도발적인 어조.
녀석의 말에 일찌감치 포기하는 플레이어도 있었느냐 하면 도전심을 활활 불태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후자에 속했다.
“찾았다.”
왕좌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누구보다도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