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나는 고개를 돌려 이번 층을 클리어하면서 얻은 코인의 양을 확인했다.
〈총획득 코인: 23,800G〉
36층에서 필요한 코인의 양과 비교하자면 아득히 넘은 수치.
이번 층을 클리어 하는 데 가장 큰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신협단에서 코인을 천문학적으로 후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간 무시해서 그렇지. 커뮤니티에서도 많이 보였으니까.’
36층을 클리어하는 종종 커뮤니티를 살폈는데, 댓글의 절반이 신협단이라고 해도 만무했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대다수가 무지성 찬양 댓글.
탑의 최상층에 신협단이 그렇게 많은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미친놈의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다던데 그런 건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걸 뒤로하고 검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청명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36층에서 획득한 코인은 나만의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상점?”
보아하니 나한테만 떠오른 게 아닌 모양인지, 옆에 있던 유채아도 이쪽을 마주 보며 당황한 듯한 낯빛이었다.
요컨대.
코인을 사용하려면 저기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인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 연이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나만의 상점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N)〉
‘지금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오히려 바라는 일이다.
어차피 묵혀두면 까먹기밖에 더 할 텐데, 쓸 수 있으면 바로 쓰는 게 낫지.
유채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Y 버튼을 선택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느꼈던 추위와는 다른 종류의 한기가 엄습하는가 싶더니, 문득 정신을 차리니 자욱한 안개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혹시 몰라 기감을 끌어올렸지만, 둘리와 유채아의 인기척은 온대 간 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뜻은.
‘제3의 공간… 뭐 그런 곳에 온 건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 가량을 걸어갔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라, 헨젤과 그레텔에서 볼 법한 크기의 과자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은 알록달록한 사탕, 대문은 과자, 손잡이는 젤리로 만들어진 기묘한 건물에 나는 넋을 잃었다.
“둘리가 여길 따라왔으면 정신없이 먹어댔겠지.”
이걸 본다면 발을 동동 굴릴 둘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뭐, 둘리한테는 아쉽게 된 일이지만.
나중에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주면 좋아하겠네.
다음에 한번 찾아보자고 결심하며 젤리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잡았다.
젤리로 만들어진 만큼 물렁물렁한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손잡이는 딱딱했다.
끼익!
그대로 손잡이를 돌리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선명한 빛이 눈앞을 밝혔다.
동화에서 볼 법한 바깥 외견과는 달리, 안쪽은 마치 펍처럼 이뤄져 있었다.
신비로워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카운터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건가?”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카운터의 안쪽에서 짙은 연기가 일어났다.
익숙한 광경.
혹시나 싶었는데, 내 예상은 아주 정확히도 틀어 맞았다.
[이거야 신한별 플레이어 또 뵙게 되네요.]
연기 속에서 나타난 것은 진행자의 얼굴이었다.
능글맞은 웃음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티를 물씬 풍기자, 진행자는 어색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아하하, 이렇게 썰렁한 반응으로 받아주실 줄은 몰랐는데… 뻘줌하군요.]
“그래서 할 말은 그것뿐이고?”
[거참 서운하네요. 다른 플레이어는 전부 제쳐두고 신한 별 씨를 담당하려고 일부러 탑에 건의까지 했는데요.]
진행자는 익숙한 손길로 펍에 있는 양주를 하나 꺼내, 얼음컵에 담고는 나한테 슬그머니 건넸다.
녀석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양주가 담긴 잔을 흔들었다.
달그락!
겁에 담긴 얼음이 녹으면서 이슬이 맺혔다.
이슬은 잔을 타고 흘러서 테이블 위에 투박하게 떨어졌다.
진행자가 건넨 양주를 한 모금 머금고는 삼켰다.
목울대를 타고 차가운 술이 넘어가고는 뒤늦게 화한 감각이 목 전체에 퍼진다.
나는 그 감각을 즐기며 진행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면 탑에다가 건의하면 되는 건가?”
[그, 그게 무슨 섭섭하신 말씀을 또….]
연이은 내 발언에 36층에서 내내 보이던 근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진행자는 양손을 비비며 아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묘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항상 우위에 선 듯한 모습을 보이던 진행자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온다고?
묘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어떤 생각이 머릿속 한 켠을 스치고 지나쳤다.
고민은 짧았다.
“야.”
[네, 네넵?]
갑작스러운 내 말에 진행자는 화들짝 놀라며 남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확신을 거듭했다.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니 뭔가 있다.
지금 이 장소와 내가 처한 상황, 그리고 내가 지닌 물건.
이 세 가지를 연결 짓자, 놈이 원하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히죽 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바라봤다,
“내가 얻은 코인하고 관련 있지?”
[그게 무슨….]
“시치미 뗄 생각은 치워. 대충 보면 감오니까.”
내 물음에 진행자는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양주를 병 채로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양주를 내려놓고는 입가에 짙은 웃음기를 띄웠다.
[역시 신한별 플레이어의 감은 못 속이겠네요. 이렇게 됐으니, 툭 까놓고 밝히겠습니다.]
따악!
진행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강풍과 함께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눈을 뜨자, 진행자의 뒤로 무수한 물량의 아티팩트가 쏟아졌다.
아티팩트는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공중으로 부유하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렬했다.
진행자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신한별 씨가 지닌 코인으로 여기에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걸 판매하는 진행자들은 실적이 되거든요.]
“아, 그래서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코인이 많은 나한테 온 거고?”
[물론입……. 아, 그게 아니라…]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양손가락을 맞대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쭈글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아티팩트를 둘러봤다.
그중에는 최하급 포션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있는 반면.
꽤나 값어치가 나갈 것 같은 물건도 여럿 보였다.
‘이거… 잘만 구슬려 먹으면 좋은 걸 얻을 수도 있겠는데.’
모처럼의 기회다.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래서 여기서 내가 살 수 있는 물건이 뭐야?”
[신한별 플레이어라면… 대충 이 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진행자가 손을 펼치자, 갖가지 아티팩트가 눈에 들어왔다.
〈코퀴토스의 대검(A)〉
〈대천사의 신전봉(B+)〉
〈부활의 열매(A+)〉
〈세계수의 신물(A)〉
하나하나가 상당한 값어치를 할 법한 아티팩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내가 지닌 코인 정도 되는 값이었다.
슬쩍 진행자의 표정을 바라보자, 놈의 얼굴에는 내가 반드시 이걸 구매하고 마리라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확실히 하나 같이 구매가 당기는 것밖에 없긴 하네.’
만약에 진행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구매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진행자의 말을 들은 이상,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는 천천히 서두를 뗐다.
“확실히 전부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이네.”
[그렇죠? 일부로 만족하실만한 아티팩트들만 고르고 골라 갖고 왔습니다.]
진행자는 옳다구나 웃으며 양 손바닥을 비볐다.
아마도 놈의 머릿속에서는 행복한 나래를 펼치고 있겠지.
그렇지만 얕보면 곤란하지.
“이것보다도 더 비싼 건 없어?”
[예? 신한별 플레이어가 구매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이게 최대 한도인데요?]
“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그, 그게 무슨….]
계속 재촉하자, 진행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살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한참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잔에 담긴 얼음을 와그작 씹으며 말했다.
“부족한 돈이야. 네가 좀 채워주면 되잖아.”
[예?]
“못 알아들은 척 하지마 새꺄. 내가 하는 말을 알면서 뭘 모르는 척이야.”
[…….]
“내 덕분에 너도 성과급을 받는 거잖아. 버스를 탈 거면 정당한 값을 내는 건 상식이지.”
당당하게 요구하자, 진행자의 얼굴을 차갑게 얼어붙었다.
눈을 바르르 떨며 매서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덩달아 공기까지 쌀쌀해진 기분이었지만, 나는 괘념치 않다는 듯 얼음 컵에 양주를 더 따랐다.
“그게 싫으면 말고, 탑한테 한 번 담당자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해볼까? 계속 바꾸다 보면 한 명쯤은 해주겠지. 그치?”
[쯧, 알겠습니다!]
그냥 한 번 찔러본 건데 아무래도 정곡인 모양이었는지, 진행자는 눈을 부라리며 혀를 내둘렀다.
‘담당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가 보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양주를 곁들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진행자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이상은 제 권한으로도 힘들어요.]
“알았어, 알겠으니까. 걱정 마.”
내 확답을 마지막으로 진행자는 아티팩트를 꺼내들었다.
녀석이 꺼내든 아티팩트는 총 세 가지.
확실히 전보다도 더 비싼 거라서 그런지. 이전에 꺼낸 아티팩트들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연히 달랐다.
최소 S등급부터 시작해 SS급까지.
비슷한 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조차 얻지 못하는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전부 다 내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 이건….”
익숙한 형태의 아티팩트.
서둘러 아티팩트에 향해 손을 가져다 대자, 내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과 부츠에서 공명음을 일으키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시스템창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떠올랐다.
〈백룡의 투구(SS+)〉
※ 백룡 시리즈의 세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그토록 찾고 있던 물건 중 하나.
나는 입가를 귀 끝까지 끌어올리며 진행자에게 말했다.
“내가 선택할 무기는… 이걸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