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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22화 (122/175)

제122화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내 발언에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봐, 형씨 살아 돌아가는 걸 걱정해야 하는 게 누군데.”

“그러게 좋게좋게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 바쁜데 굳이 나까지 끼어들게 만들긴.”

각각 이단심판관과 흑룡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들이 원흉일지도 모른다⎯하는 의문을 계속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충격은 없었다.

하나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유채아는 당혹스러운 낯빛이었다.

하긴 그렇겠지.

줄곧 믿고 있던 동료가 뒤통수를 때린 셈이니까.

감히 상정이나 했을까. 같이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 나서던 동료가 배신했으리라고.

충격이 클 것이다.

혹시 몰라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폈지만,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의도적으로 이곳만 안 나오게 한 건가.’

하긴 이렇게 대놓고 나오는데, 뒷배가 없을 리가 없다.

아마도 진행자와 미리 말을 맞췄을 것이다.

상념에 빠져 있을 무렵.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시선을 돌리니, 흑룡과 이단심판관의 뒤로 신화 길드의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채아 씨, 이런 꼴로 뵙게 되어 아쉽군요. 하지만 너무 원망하진 마십시오. 이건 인류를 위한 일이니까요.”

“인류를 위해서?”

나지막한 유채아의 말에 회장은 과장스럽게 팔을 활짝 벌리며 입을 뗐다.

“그럼요! 이건 인류를… 플레이어를 위한 겁니다. 36층까지 오면서 저희들은 많은 피를 흘렸죠. 그렇게 노력하면서 피를 흘린 목적이 뭘까요?”

“그야….”

“그야 살기 위해서겠죠.”

불쑥 끼어든 회장의 발언에 유채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 유채아의 눈빛에서 배신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탑을 등반해봤자 저희는 목숨을 잃는 꼴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죽으면 그 지옥 같은 지구에서 다시 생활해야 하죠.”

지구에서의 생활.

나 역시도 그때를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그때와 비교하면 차라리 튜토리얼에서의 생활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하나 저희는 탑에게 보장받았습니다. 36층에만 머무르면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된다고 평화롭게 삶을 영위해도 된다고, 그 증거로 등반포기자들은 사선을 드나들지 않는 평화 속에서 살고 있죠.”

회장은 자신들이 선이라는 것처럼 즐겁게 말했다.

“그래서 뭘 대가로 바쳤지.”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탑은 죽음에 있어선 불공평하면서도 그 예외는 공평한 편이다.

지금껏 사선을 드나들고 죽음으로 이끌려고 했던 탑이 36층에 와서 갑작스럽게 삶을 보장해준다?

말이 안 된다.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을 터.

내 물음이 정곡이었는지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회장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오우, 서프라이징하네요. 신한별 당신의 견해는 놀랍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요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는 삶을 안위하기 위해 탑에 바쳤죠.”

“그게 뭐지?”

“플레이어의 전부.”

마치 벌레를 입에 넣어 씹는 것만도 못한 그의 발언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지만.

그의 입에서 이어질 내용은 궤를 달리하는 최악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36층을 벗어나면 또다시 끝없는 죽음이 벗어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뭔 짓을 했지?”

“그게 문제라면 도전 의지를 꺾어 버리면 될 터, 그래서 36층은 패배하면 패배할수록 플레이어은 점점 잃게 됩니다. 도전에 대한 집념을.”

드디어 밝혀진 36층의 이면.

그 이면은 아주 추악하고도 구역질 나오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고작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타인의 의지를 꺾다니.

그건 탑보다도 못한 행동이었다.

“당신들 미쳤어.”

그 이야기를 들은 유채아는 떨리는 동공으로 쥐어 짜내듯 목소리를 이었다.

직설적인 비판.

하나 그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폭소했다.

“푸하핫, 보기 좋은 반응인데?”

“그깟 거 가지고 미쳤다고 하면 어떡하니, 우리는 삶을 위해서라면 더 미칠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들만 만족하는 게 아니란다. 36층의 사람들도 만족하면서 지내잖아. 그걸 생각한다면 이건 숭고한 희생이지.”

곁으로는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 같아도 결국 궤변에 불과한 이야기다.

유채아는 차갑게 정색하며 말했다.

“그건 그분들의 의지가 아니잖아요.”

“쯔쯧,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아해야, 이 세상에서는 과정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결과란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만족한다면 충분한 셈이지.”

흑룡은 부채를 활짝 펴고는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그녀를 뒤로하고 회장이 앞으로 나서며 우리에게 양손을 뻗었다.

“여러분도 저희들의 파라다이스에 동참하시는 게 어떤가요. 돈과 명예, 평화… 당신이 원하시는 거라면 전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지금까지 들은 내용만 생각하면 꽤나 그럴싸한 이야기다.

“괜찮네.”

“한별 씨?”

내가 한발 앞서 그들 앞으로 걸어 나가자, 유채아는 당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와는 반면 회장은 활짝 웃으며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하하! 역시 신한별 씨입니다. 당신이라면 저희들의 대업을 이해해주시리라 확신하고 있었…….”

하나 회장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바로 직전, 앞으로 뻗은 회장의 손은 팔뚝 채 잘려나가 지면에 떨어졌으며 잘려나간 절단 부위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단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짤막한 침묵 속에서 나는 걸어 나가 회장의 팔뚝을 주었다.

회장의 손가락에는 아티팩트로 보이는 반지가 끼여져 있었는데, 나는 반지만 회수한 채 팔뚝의 뼈를 부숴뜨렸다.

콰득!

나는 산산조각난 팔을 집어 던지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어쩌나. 팔을 다시 붙인다고 하더라도 신경이 망가져서 멀쩡히 움직이지는 못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반지를 살펴봤다.

〈생명의 반지(A)〉

- 약 5분간 은신할 수 있습니다. 냉기저항 +50

- 어이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엿보지는 맙시다! 그건 범죄 행위에요!

역시 3대 길드장이라는 명성답게 끼고 있는 반지마저 고급품이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내 거지만.

저쪽을 바라보자, 어지간히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것은 유채아도 마찬가지.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놈들을 향해 발걸음을 뻗자, 회장은 팔뚝을 부여잡으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어, 어째서죠? 방금 전에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배신을…….”

“아아, 그거? 아무 의미 없이 해본 말이야.”

“…….”

능청스럽게 꺼낸 말에 그들은 모멸감에 매서운 시선으로 이쪽을 쏘아봤다.

눈에서 레이저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기세.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에 내가 선보인 힘을 보고서 섣불리 행동했다간 불리한 쪽을 명백하게 깨달았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검을 어깨에 기댄 채, 놈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은 다급해진 모양인지, 서둘러 진행자를 불렀다.

“지, 진행자! 어서 저… 저 새끼를 막아라!”

이단심판관의 다급한 외침에 자리에서 내내 방관하고 있던 진행자는 입에서 곰방대를 뗐다.

진행자의 움직임에 그의 눈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계약 내용을 이제 와서 잊었다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 그거 말인가요. 그야 물론이죠, 잊었다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탁탁! 화르륵!

진행자는 익숙한 손짓으로 곰방대 끝의 담뱃재를 털어낸 후, 다시 담배를 담아 불을 붙였다.

숨을 깊게 빨아 들이쉰 후, 날숨에 새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평상시와 같은 행동이었지만, 묘하리만치 짙은 연기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후우, 하나는 확실하게 하셔야죠. 저희가 한 계약의 내용은 무엇이었죠?]

“그야, 우리가 네 흥미를 채워준다면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네, 그땐 그랬죠. 그런데 어쩌나, 저는 당신들의 안위보다도 지금 이 상황이 더 흥미롭거든요.]

와그작, 와그작.

진행자는 어디에서 꺼냈을지 모를 팝콘을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풍미를 풍기는 팝콘은 탐욕스럽게 입안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진행자는 관심을 잃었다는 듯 팝콘을 땅바닥에 흩뿌렸다.

공중에서 떨어진 팝콘은 무슨 이유에선지 반짝이는 보석이 되었다.

그 누구나 바라지 마지않는 아름다운 보석.

찬란한 보석은 마치 어디에서나 보일 법한 돌멩이처럼 바닥을 굴렀다.

[이봐요. 다소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들은 장기말로서 이용 가치를 전부 잃었어요.]

“그, 그게 무슨….”

[처음에는 조금 흥미로운 것 같았지,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했으니까요.]

“…….”

[결국 여러분이 보여준 건, 그저 그 자리에서 안주하는 것뿐 실망했습니다.]

사형 선고와 같은 발언에 그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지만 기회를 바라시는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그 한 몸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죠.]

진행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짙게 깔린 연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연기가 사라진 허공에는 36층에서 봤었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띄워져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배신감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전부 36층에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길드장 여러분의 행동 또한 송출됐겠죠.]

“…….”

[딱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저들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 죽을힘을 다해 신한별 플레이어를 쓰러뜨려 보십시오. 이상입니다.]

진행자는 그 발언을 마지막으로 다시 곰방대를 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를 노리고, 이쪽을 향해 살기를 흩뿌리는 3대 길드장들.

그 상황에서 나는 조소를 머금으며 검을 뽑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뻔히 눈 뜨고 있는데 무시하면 쓰나.”

내 목소리에 3대 길드장들은 이쪽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나 내 시선이 향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상대였다.

“위에서 조잘거리느라 바쁜 건 알겠는데, 내 사냥감은 저 새끼들뿐만이 아냐.”

미안하지만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 내 성미에 안 맞다.

그럼 어떻게?

때려치워야지.

나는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세우며 차갑게 일갈했다.

“진행자 너도 포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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