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그로부터 나와 유채아는 지하철 통로를 통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160개의 포인트를 찾기 위해 무작정 움직였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도.”
간단한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자,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창에는 마치 이곳을 3D로 재구성한 지형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각 지형마다 새빨간 점이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빨간색 점의 의미는 바로.
“160개의 포인트.”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히든 스팟을 최초로 발견하고 나서 얻은 특전이었다.
저길 샅샅이 뒤져보면 히든 스팟 역시 찾을 수 있으리라.
며칠간의 노력 끝에 우리들은 포인트 중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결과.
“남은 히든 스팟은 마지막 한 군데인가.”
“네, 그렇네요. 이제 한 곳만 찾으면 끝이에요.”
갖은 노력 끝에 히든 스팟 중 네 곳은 전부 찾아두고, 단 한 곳만 남겨둔 채였다.
남은 시간은 불과 10시간.
어떻게 보면 꽤나 빠듯해 보이는 시간인 것처럼 보여도 다른 플레이어들도 분발하고 있으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은 아니리라.
‘이제 곧인가.’
이미 발견한 히든 스팟은 3대 길드장과 플레이어 한 명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물론 의미는 없을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지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만약 저들이 뒤통수를 때린다면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파악하고 대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상념은 뒤로 제쳐놓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동안 많은 괴수와 마주쳤지만, 괴수 중 대다수는 유채아의 선에서 처리되었다.
이래 봬도 유채아의 실력은 플레이어 랭킹에서도 2등을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
아무리 괴수들이 강하다고 한들, 유채아의 앞에서는 금방 처리되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그 플레이어 랭킹은 기준이 뭐야?”
나는 지하철의 통로를 통해 이동하다 말고 의문을 던졌다.
때마침 주변에는 괴수도 없었기에 유채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 별 건 아니에요. 3대 길드에서 따로 주최해서 만든 통계인데, 탑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야매로 만든 랭킹이죠.”
유채아는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그래?”
“네, 기준도 단순히 강함뿐만 아니라 사회에 공헌이나 인기도 같은 것도 포함돼요.”
그녀의 자세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명목상 내놓은 거지. 큰 의미는 없어요. 당장 랭킹권에 랭크되지 않은 한별 씨가 저보다 훨씬 강할 정도니까요. 물론 그 랭킹에 목매는 플레이어도 여럿 있다는 것 같지만요.”
그 이야기에 줄곧 지니고 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몇 년째 플레이어로 활동을 안 한 골리엇이 어째서 1등인가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다면 수긍할만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골리엇은 플레이어 사이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니까.
‘강함도 강함이지만, 항상 신비주의로 다닐 정도니까.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지.’
성별도, 얼굴도, 실제 실력마저 제대로 알려진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는 골리엇이라는 이름마저 가명일 정도였을 정도니.
단지 36층에 도달하기 전까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두를 이끌며 엄청난 속도로 등반했다는 점만 알려져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종적을 감췄다는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한때는 그 일로 골리엇이 죽어서 지구로 송환된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퍼질 정도였으니까.
그 의문에는 3대 길드가 직접 나서서 부인한 덕에 단순한 해프닝인 걸로 끝났었다.
‘혹시 3대 길드와 골리엇이 협력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거나 하는 일은….’
음… 역시 과한 추측인가.
직접 골리엇과 만나봤으면 감이 느껴질지도 몰라도 일면식도 없는데 그런 게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만약에 그게 가능했으면 무당이라도 하고 있었겠지.
둘리 역시 나와 매한가지인 모양인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포인트를 향해 이동할 때쯤이었다.
…치지직!
지하철의 선로를 따라 걷고 있을 무렵, 천장에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딸깍! 딸깍! 딸깍!
천장을 비추고 있던 불빛이 깜빡거리며 불통을 일으켰다.
왠지 묘하게 으스스한 감각마저 드는 기분, 단순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온도까지도 내려간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묘한 현상에 유채아가 입을 뗐다.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형광등이 말썽이네요.”
“그러게, 그래도 지도상으로는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포인트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포인트만 점령하면 그 에리어는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생기니, 그때 대처해도 늦지 않다.
그리 생각하면서 발자국을 뻗었을 때였다.
띠디딕, 띡⎯⎯!
내내 점멸하던 형광등은 빠른 속도로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시점에 들어서자 갑자기 전원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전이 도래했다.
그리고 내내 기분 탓인 줄만 알았던 추위가 점점 뚜렷해졌다. 마치 지하철이 아닌 바깥에 있는 것처럼.
서둘러 기감을 넓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주변의 지형이 느껴지지 않았다.
“둘리야! 유채아!”
“한별 불렀나!”
“예! 저도 있어요.”
다급한 내 부름에 둘리와 유채아는 각자 대답했다.
목소리에 긴장감이 사뭇 느껴졌지만,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베테랑답게 당황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된 일이다.
‘우선 빛을 밝혀야….’
기감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물론 별일은 없겠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이상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상황을 모련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려던 그 순간, 몸에 걸치고 있던 로자리오에서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윽고 로자리오에서 시작된 빛이 주변을 물들였다.
〈은빛의 로자리오(B)〉
- 성신 카르텔의 갸륵한 은혜가 깃들어 있는 아티팩트. 삿된 힘을 물리친다.
파아아앗!
시스템창과 함께 강림한 빛은 암흑을 물러냈다.
강렬한 섬광에 앞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자, 앞으로 넓은 설원과 더불어 눈 속에 푹 묻힌 도시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얼마나 눈이 쌓인 모양인지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건물의 옥상뿐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
그것뿐만이 아니다.
피라미드부터 시작해 63빌딩, 도쿄 타워까지.
다른 건물과 같이 눈 속에 파묻혀 끄트머리만 드러난 지구의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의 정체를 모르는 둘리와는 달리, 건축물을 잘 알고 있는 유채아 역시 당황한 낯빛을 보였다.
한순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지하철이 있던 선로로부터 그 위에 있는 도시로 전이했음을.
“아까 전에 일어났던 빛… 분명 탑에서 층을 이동할 때 느끼던 그 섬광이었지?”
그렇다는 뜻은 탑의 개입이 들어갔다는 뜻.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 뒤에 취해야 할 행동은 더욱 명료해졌다.
한순간 유채아와 눈길이 스쳐 지나갔는데, 유채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서둘러 기감을 넓히며 주변을 살피자, 상공으로부터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지만 그 정체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진행자.”
[네, 신한별 플레이어 부르셨나요.]
내 부름에 능청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잉!
찰나의 순간, 차가운 바람이 머리를 스치며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뼈가 사무칠 정도로 따가운 추위였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앞으로 향해 발걸음을 뻗었다.
“그래서 이건 무슨 짓이지? 진행자가 개입하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었던가?”
[틀린 말은 아니시지만, 저도 어쩔 수 없거든요. 어느 분들과 계약한 게 있어서 지켜야 하거든요.]
진행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 위에서 도깨비불 같은 불꽃이 화르르 일어나더니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곰방대를 들이빨자, 새하얀 연무가 짙게 일어났다.]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그보다도 진행자가 꺼낸 이야기에 의문을 지녔다.
‘계약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
나는 서둘러 시스템을 확인했다.
〈점령한 히든 스팟- 1/5〉
“그럴 줄 알았지.”
서둘러 시스템 창을 열어서 점령한 히든 스팟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점령했던 4개의 스팟 중에 3곳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3대 길드장이겠지.’
그 생각과 동시에 남아 있던 마지막 스팟마저 소멸했다.
〈0/5〉
순식간에 제로가 된 숫자.
나는 시스템창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진행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네가 말한 계약한 3대 길드장 그놈들하고 나눈 거지?”
[그건 기밀 사항이라.]
굳이 밝히진 않았지만, 그 대답을 하는 진행자의 입가에는 완만한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더이상 안 봐도 뻔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이전의 층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아진 등반 난이도.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록 클리어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토벌대.
단순히 탑의 변덕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누가 의도적으로 층을 등반하지 못하도록 조절하고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지.’
그러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의 신용을 얻고 있으면서도 상당한 권력과 실력을 지닌 이여야지만 가능했다.
진행자와 직접 계약을 나눌 정도면 어지간한 플레이어의 수준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해답은 쉽게 나왔다.
‘3대 길드장.’
기감을 넓히자,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세 명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변명은 언제든지 해. 내 손에 뒈지고 나면 묘석에 적어둘 테니까.”
해볼 만한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