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19화 (119/175)

제119화

‘으음, 왠지 모르게 익숙한데?’

커뮤니티에서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유채아의 손목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휘이이잉!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내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검은 형체를 붙잡았다.

고무공을 만지는 듯하게 말랑말랑한 손맛.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의아스러워할 때쯤, 검은 형체가 움직이더니 내 얼굴을 향해 뛰어올랐다.

“으아! 한별, 날개에 쥐가 나서 더 이상 날지 못하겠다!”

“둘리야?”

얜 또 왜 이래?

녀석의 행색에 의문을 가지고 있자, 둘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한별이 주변을 살펴봐라고 시키지 않았나! 추워 죽을 뻔한 걸 겨우 참으면서 움직였다!”

아, 맞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시켰었지.

신경 쓸 틈이 없어서 일을 시켜놓고 까먹고 있었다.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바로 옆에서 감탄사와 함께 유채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와! 한별 씨 그 귀여운 친구는 누군가요!”

평소보다도 한 층 더 올라간 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채아는 둘리의 몸을 움켜 안듯이 끌어 앉았다.

둘리는 불편하다는 듯이 짤막한 손으로 유채아의 몸을 밀어냈지만, 품 안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인지 혀를 내밀며 헥헥 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같이 다는 녀석이야.”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아요. 커뮤니티에서 보면 항상 한별 씨 옆에 다니는 동물이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게 이 친구군요.”

유채아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품속에 안겨 있던 둘리는 입술을 삐죽 튀어나온 상태로 불만을 표출했다.

“도, 동물이 아니다! 둘리는 블랙드래곤이다!”

“어머, 이름이 둘리라고 하시나 봐요. 귀여운 이름이네요.”

둘리는 가슴을 쫙 펴며 대답했지만, 유채아는 그것마저도 어린 애의 투정을 들어주듯 둘리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쪽은 좋아하는데, 다른 한쪽은 싫다는 듯이 밀어내는 광경.

꽁트 같은 그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둘리야, 이렇게 된 김에 유채아랑 같이 다녀. 이것도 인연인데 어때?”

“네, 좋아요!”

내 말에 유채아는 활짝 웃으며 좋다는 듯이 대답했으며, 둘리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상반된 반응.

둘리야 미안, 그러기엔 유채아가 너무 널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래.

줬던 걸 도로 뺏는 것만큼 못 할 짓은 없잖아.

“아, 안 된다! 한별, 한별!”

나는 유채아의 품속에 꼭 안긴 채,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둘리의 모습을 외면했다.

솔직히 나도 개인적인 시간 정도는 있어야지.

둘리야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주길 바라.

* * *

그렇게 둘리의 절규를 뒤로 하고, 우리는 예정대로 목적지를 향했다.

몇 시간가량, 폭설과 괴수들을 뚫고 나아가자 붕괴한 도시가 나타났다.

마치 모스크바를 연상케 만드는 도시의 풍경.

하나 괴수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은 도시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광경.

이곳에는 처음인 나와는 달리, 다른 플레이어들은 익숙한 모양인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들 익숙한가 봐?”

“아무래도 36층에서 쉴 수 있는 곳은 이 도시밖에 없으니까요.”

내 물음에 유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곤 해도 도시 전체를 파악하고 있진 않아요. 워낙 넓어서 극히 일부분만 파악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시작으로 유채아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160개의 포인트는 이 도시에서 랜덤으로 생성된다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플레이어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바닥을 쓸더니 맨홀 뚜껑을 열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쪽이 신한별 플레이어라고 하셨소?”

“어, 그런데?”

“다소 냄새는 역하긴 하겠지만 지하철로 향하는 빠른 장소라네. 뭐, 따로 움직이겠다고 하면 막지는 않겠지만, 그쪽은 어떻게 할 건가?”

의례상 물어보는 말투.

그래서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뭐, 그러지.”

혼자서 움직여도 상관은 없지만 도시의 지리도 잘 모르는데, 굳이 떨어져서 다닐 이유는 없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들과 같이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적당히 얻을 것만 취하고 나서 따로 행동하면 되겠지.’

지금까지 튜토리얼과 탑을 등반하면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습관을 지닌 나였지만 단 하나,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육감.

본능적으로 느끼는 육감만큼은 무시하지 않았다.

직접 말하기에는 뭣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의 적중력은 은근 높은 편이었다. 굳이 맞나, 틀렸나로 분류하자면 전자에 가까울 정도로.

그런 내 감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3대 길드장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플레이어와는 엮어선 좋은 일을 보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일단 경계는 해둘까.”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맨홀을 향해 뛰어내렸다.

수십 미터가량 떨어지던 나는 지면을 향해 가뿐히 착지했다.

뒤이어 둘리의 비명 소리와 함께 유채아도 옆으로 착지했다.

“으악… 끔찍한 냄새가 난다. 엄청 고약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유채아의 품속에 안긴 둘리는 인상을 찡그러뜨리며 코를 막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지하이니만큼 꿉꿉한 곰팡이 냄새는 풍기지만, 그 이상의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의아스럽긴 했지만, 드래곤의 후각은 수키로 미터나 떨어진 곳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고 하니, 허언은 아닐 터.

둘리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유채아는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둘리의 코에 박았다.

“어때요. 조금은 낫죠.”

“어? 확실히 낫다! 냄새 안 난다!”

양쪽 코에 천을 박은 채,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둘리.

어쩐지 모르게 우스운 모습이지만, 둘리는 만족한 모양이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기만 편하면 됐지.

나는 둘리를 뒤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각자 파티를 꾸려 흩어진 모양이었다.

확실히 160개나 있는 포인트 중에서 다섯 곳을 찾아야 하니까. 뭉쳐 있는 것보다 흩어지는 게 낫겠지.

〈제한 시간: 117:59〉

‘남은 시간은… 5일 정도인가.’

짧은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롭다고도 부를 수 없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마당에 막무가내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시 여기에 지도 같은 게 있을까?”

“지도요? 음…… 아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네요.”

내 물음에 유채아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부정했다.

형식상 그냥 건네 본 말이었기에 실망하진 않았다.

하긴 지도가 있었으면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유채아가 먼저 알려 줬겠지.

적당히 주변을 둘러볼 생각으로 움직이려고 한 그때였다.

내내 유채아의 가슴에 안겨 있던 둘리가 벌떡 일어나며 귀를 쫑긋거렸다.

“음? 한별! 저기에 뭐가 있는 거 같다.”

둘리는 지하철이 통하는 통로를 손짓하며 버럭 외쳤다.

빛이 통하지 않아 어두컴컴한 통로, 습한 공기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연출했다.

혹시나 싶어 기감을 넓혔지만,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저기에 뭐가 있는 거 같은데.”

“으으……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저기에서 묘한 느낌이 난다!”

내 물음에 둘리는 과장스럽게 제 머리를 붙잡으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 또한 육감적인 감은 좋다고 확신하는 편이었지만, 둘리는 나를 넘어설 정도로 감이 뛰어난 편이었다.

지금까지 어지간한 일이 있으면 죄다 둘리가 먼저 알아차렸으니까.

‘뭐, 지금은 딱히 상관없겠지.’

어차피 지금으로선 사소한 계기라도 상관없으니, 지푸라기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둘리가 손짓한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몇몇 플레이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군가 했더니, 3대 길드 쪽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신한별 씨, 여기는 통제 구역입니다.”

“통제 구역이라고?”

경계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3대 길드에서 정한 규칙입니다. 이 너머로는 어떤 플레이어도 진입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 알았으니까 거기서 비켜.”

“방금 한 말, 못 들으셨습니까? 이곳은 통제 구역이니….”

“나 참 살다 살다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를 다 듣겠네, 여기가 너희들 사유지라도 되나 보지?”

“…….”

내 말에 플레이어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내가 너희들 말을 따를 의무가 있으면 몰라도 그것도 아니잖아.”

설사 내가 그들과 같은 3대 길드의 소속이면 몰라도.

그게 아닌 이상, 저들이 나를 막아 세울 근거는 없었다.

“시, 신한별 플레이어!”

“신한별 씨 거기에서 멈추세요! 멈추라고! 어서 길드장님께 연락해!”

나는 뒤에서 들리는 소란을 무시하고는 어둠 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바깥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점점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음침한 기운이 강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크르릉!”

질퍽한 살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빛났다.

비록 어두운 탓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살기가 온몸을 옥죄었으나 나는 싱겁게 웃으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정면을 향해 검을 길게 내리긋자, 파공음과 함께 나아간 검격이 괴수의 몸을 베었다.

단 한 방.

괴수의 몸은 절반으로 쪼개져 절명했다. 그와 동시에 청명한 알람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첫 번째 히든 스팟을 발견하셨습니다!〉

〈앞으로 남은 스팟: 1/5〉

〈최초로 히든 스팟을 발견한 특전으로 지도가 지급됩니다.〉

나는 눈앞에 뜬 시스템창을 바라보며 옅은 웃음기를 입가에 띄었다.

“3대 길드라고 했었나. 뭔가 비릿한 느낌이 난다고 했더니 역시는 역시네.”

내내 지니고 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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