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생각지도 못한 진행자의 발언에 분위기는 살얼음 같이 얼어붙었다.
하나 사태를 이렇게 만든 진행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곰방대를 물었다.
[보통 이런 걸 두고 원코인이라고 부르던가요.]
제 딴에는 농담이라고 던졌겠지만, 이에 반응하는 이는 없었다.
당장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기에.
다들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가장 먼저 용기를 낸 이는 이단심판관이었다.
“그 조건은 누구 멋대로 정한 거지? 36층을 재도전할 수 있도록 만든 건 탑이잖아. 탑의 결정을 진행자가 제멋대로 바꿀 순 없을 텐데?”
이단심판관의 발언에 플레이어들의 분위기는 밝아졌다.
어쩌면 그라면 이 상황을 타파해 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하나 그 기대감이 부서지기까진 금방이었다.
[그 말씀대로, 이건 탑이 결정한 사항입니다.]
“……어째서?”
[탑의 숭고한 결정을 감히 제가 알 수나 있겠습니까. 그저 따를 뿐이죠.]
말과는 달리 진행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 말에 이단심판관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층의 규칙이 바뀌고 나서의 기념비적인 첫 도전자네요.]
진행자는 짙은 연무를 내뱉으며 씨익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당신들이 유일한 인류의 희망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희생양이 될진 모르겠지만요.]
진행자의 말대로였다.
‘만약에 우리가 실패하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지레 겁을 먹고 탑 등반을 포기할지도 모르니까.’
가령 예를 들자면 36층에서 등반을 포기하고 탑에 정착한 이들처럼.
놈의 말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악에 받치듯 소리쳤다.
“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역대 최강의 토벌대라 불리는 우리가 실패하면 밖에 있는 머저리들도 클리어 못 한다는 이야기잖아!”
일대에 정적이 감돌았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그의 말에 긍정은 하지 않았지만, 딱히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들 은연 중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여긴 까닭이었다.
그의 발언에 진행자는 입꼬리를 찢듯 올리며 말했다.
[유의 사항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상황은 36층에 계시는 플레이어 전원에게 실시간으로 송신 중이니 발언을 조심하시죠.]
“뭐, 뭐라고?”
[자기 소신껏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이미지가 나빠지는 건 모르겠네요.]
진행자의 말에 확인하자, 커뮤니티는 그 주제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채널10〉- 36층 전용 채널
- 님들 나만 보이는 거임?
⤷ ㄴㄴ 다른 사람들도 다 보이는 듯, 하늘 위에도 36층 토벌대 상황 스트리밍 중임
- 근데 저 새끼 뭐냐ㅋㅋㅋ 지가 뭔데 평가함?
⤷ 알아봤는데 랭커도 아님;;
⤷ 지인한테 들었는데 쟤 그냥 운빨로 이번 토벌대 들어갔다던데
- 실력도 없는 놈이 토벌대 들어가서 뭐함?
- 그냥 광대 포지션이라고ㅋㅋㅋ
- 와 근데 유채아 ㄹㅇ 여신이다
- 어? 저거 설마 신한별 아님? 신협이 왜 저기에 있음?
⤷ ㅁㅊ 3대 길드장에 유채아, 신협 조합? 이건 못 참지
커뮤니티를 살피던 도중이었다.
〈100코인이 적립됩니다.〉
〈50코인이 적립됩니다.〉
〈170코인이 적립됩니다.〉
……
……
…
후원금이라는 단어와 동시에 떠오른 무수한 시스템창.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문을 떠올리고 있자, 진행자는 말을 덧붙였다.
[후후, 이제야 떴나 보군요. 지금 문구가 뜬 분들은 아시겠지만, 36층의 시청자가 가진 돈을 이용해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어디에서 났을지 모를 금화를 하늘로 튕겼다.
허공에서 낚아챈 금화는 앞면과 뒷면에는 각각 해골과 심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 층에서는 1천 코인이 없을 시에는 자동으로 탈락! 아 참고로 바깥에선 그 사실을 모릅니다. 저들은 재미로 후원하겠지만, 이쪽은 목숨이 달린 게임. 크크큭, 건투를 빌겠습니다.]
진행자는 부정행위 위반 시에는 처벌이 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허공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놈이 자취를 감추고 난 직후.
분명 마음은 편할 터였으나, 다른 이유에서 분위기는 험악했다.
“제기랄… 하필이면 내가 들어왔을 때, 왜 일이 터지고 지랄이야!”
“크흐흑, 그냥 목돈만 벌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플레이어들은 절망했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 부담감에 그들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우리는 그렇다 쳐도 댁은 마음대로 돼서 좋겠네.”
어느샌가 다가온 흑룡은 옅은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누가 봐도 비아냥거리는 투.
그 말에 나는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항상 탑의 클리어를 목표로 등반해서 이제 와서 자잘한 규칙이 변한 건 신경 안 써서.”
내 대답에 흑룡은 미간을 구겼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직전, 중간에 난입한 유채아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한별 씨, 저긴 신경 쓰지 마시고 가시죠.”
유채아의 발언에 흑룡의 목은 기이하게 꺾였다.
“신… 한별? 설마 네가 그 신협단의 신한별이라고?”
그녀의 발언에 부정할까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이내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상대는 3대 길드의 수장.
굳이 기선 싸움에서 꿇릴 필요는 없잖아.
“어, 맞아. 그래서 이쪽에 볼일이라도 있나 봐?”
- 오오! 미쳤다. 신협단 VS 살룡문 매치업
- ㅁㅊ 신한별이 신협단 공식적으로 인정한 거 아님?
- 신협단 떡상ㅋㅋㅋ
- 앞으로 4대 길드 되는 건가
⤷ 에이, 그래도 신협단은 아직 못 비비지
- 신멘!
⤷ 신멘!
⤷ ㅋㅋㅋㅋ 신협단 개같이 부활하네;;
내 발언에 커뮤니티에서도 덩달아 화젯거리를 불러일으켰다.
나쁠 건 없었다.
바깥에서도 이 상황이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중인지, 그만큼 수많은 후원이 들어왔다.
이 기회로 가뜩 땡기려고 할 때쯤, 날이 선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예전에 신협단이 우리 길드를 습격했던 일, 그걸로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는데 그 일에 관해 책임은 어떻게 질 거지?”
흑룡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기억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신협단 중 한 명이 3대 길드를 습격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 길드가 살룡문이었나.
그녀한테는 미안하게 된 일이지만, 나한테도 치가 떨리는 사건이긴 매한가지였다.
‘신협단이 유명해진 계기가 그 일 때문이었으니까.’
하여간 신협단이 엮여서 좋은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임을 질 일은 없다.
“그쪽 3대 길드와 달리 이쪽은 방임주의라서 말이지. 애당초 길드도 아닌데 책임질 이유도 없잖아.”
- 엥? 난생 처음 듣는 말인데 진짜임?
- ㅇㅇ 길드 중에 신협단이라는 이름 없음
- ㅋㅋㅋ 놀랍게도 팩트다
- 그래서 3대 길드 사람들 중에 신협단인 사람도 있음ㅋㅋㅋ
⤷ 이중스파이ㄷㄷ
- 자고 일어났더니 산업스파이가 된 건에 대하여
⤷ 우욱 ^^ㅣ발
⤷ 학생 없는 티 내지 말고 글 내려
내 말에 흑룡은 혀를 찼다.
동등한 길드 사이면 몰라도, 신협단은 딱히 정해진 형태가 없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제약 없이 나갈 수 있는 일종의 클럽과 같은 구조.
그러니 책임을 물릴 수도 없었다.
애당초 나도 신협단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3대 길드라고 해서 대단한 것인 줄 알았는데, 습격자 한 명도 제대로 못 막는 걸 보니 뭐, 대충 알겠네.”
굳이 뒷말은 잇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은은한 살기가 꽃봉오리를 통해 송이송이 피어난다.
“왜, 하려고? 그 전에 말하자면 봐주는 건 없어.”
내 말에 명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흑룡은 어금니를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36층의 플레이어 전원에게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는 지금으로선 조심해야 한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짊어진 게 많은 이일수록 말이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지겠지.
‘가소롭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3대 길드라…….
아무래도 그놈들하고는 기나긴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플레이어들은 짧은 회의 끝에 목적지를 정했다.
“우선 인근에 있는 도시로 가기로 정했어요.”
“도시?”
“네, 도시에는 지하철이 있어서 그걸 작동만 시키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거든요.”
유채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36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장기적으로 계획을 짜야 한다.
따라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선 거처를 정해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겠지.
그 의견에 관해서라면 나 또한 이견은 없었다.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유채아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나저나 넌 여기에 있어도 괜찮아?”
“예?”
“그래도 같은 길드원들이잖아.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따지고 보면 저들에게 나는 불청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그런 불청객과 움직이면 꼴사납게 보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질문을 던졌으나.
유채와는 내 물음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쪽과 있을 바에는 한별 씨하고 있는 게 훨씬 낫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지?
그녀가 꺼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유채아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한별 씨는 코인을 후원받으셨나 보네요.”
“뭐, 어쩌다 보니까.”
유채아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후원 시스템이 알려지고 난 직후로부터 무수한 후원금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손에 들어온 코인은 총 680코인.
바깥에서 코인의 가치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적은 금액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목숨값인데 적을 리는 없겠지.’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었다.
“꽤 들어오긴 했지만, 아마도 신협단 놈들이 제멋대로 보낸 거겠지.”
적당히 대꾸하는데, 일순 유채아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목에 특이한 색상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신협단의 그 미친놈들… 아니, 플레이어들은 소속을 인증하기 위해서 나와 관련된 굿즈를 착용하고 다닌다던데.
나는 그녀의 팔찌를 유심히 살펴보며 되물었다.
“그 팔찌, 어디에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와 동시에 유채아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화악 물들었다.
갑자기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