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유채아의 얼굴이 보였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인지 유채아는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며 넋이 나갔다.
“한별 씨? 여긴 어떻게…….”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스스로 볼을 꼬집어 보는 유채아.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띄어서 도와줄 겸 왔지.”
너스레를 떠는 날 보고 유채아는 고개를 떨구며 어렵게 더듬거리듯 말했다.
“하, 하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서프라이즈 할 겸 일부로 연락을 안 했는데, 이거 제대로 먹혔나 봐.”
그 말에 유채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
그렇게 연락을 안 주고, 온 게 섭섭했나. 앞으로는 종종 연락을 해야겠다.
‘아, 생각해 보니. 이제 같은 층이니까. 그럴 필요도 없나.’
필요한 말이 있으면 커뮤니티를 통한 연락이 아닌,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되니까.
나는 머릿속 한편에 든 잡념을 지우며 검을 들었다.
“뭐,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풀고 저것들부터 처리해 볼까.”
“예? 하, 한별 씨 조심하세요. 저희로도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괴수인데, 지금은 우선 물러나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내 말에 유채아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여러모로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과한 걱정이다.
아직 남에게 걱정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녹슬진 않았거든.
“둘리야!”
“알았다! 둘리만 믿고 맡겨라!”
둘리의 이름을 부르자, 협곡 너머에서 준비 중이던 둘리가 성체화를 하며 나타났다.
그러고는 드래곤피어를 내뿜자 괴수들은 제자리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괴수들의 품에 다가가 검을 크게 베었다.
단 한 방.
한 방에 절반으로 쪼개진 괴수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며 몸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도 더 빠른 재생 속도.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아무것도 못 한 채 재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테지만, 이미 예상 내의 상황이었기에 당황할 것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내 앞에서는 안 통해.”
그 래퍼토리라면 이미 예상했다.
당연히 파훼법 역시 준비했다.
이터의 권능을 발동하며 손을 휘두르자 보랏빛의 아지랑이가 일어나더니, 이내 용과 같은 현상을 한 촉수는 괴수를 잡아 삼켰다.
괴수의 신체가 복구하기 전에 쓰러뜨렸다지만, 아직 남은 괴수는 많았다.
나는 괴수의 몸에 검을 쑤셔 박으며 확신했다.
‘역시 약해.’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36층에서 나올 법한 괴수라고는 믿기지 않은 강함을 지닌 것은 맞다.
그렇지만 내 기준에서 보자면 충분히 상대할 만한 괴수였다.
분명 진행자가 언급한 대로라면 지금까지 축척된 159회차의 강함과 내 능력치가 합쳐졌다면 괴수는 상대하기 벅찼으리라.
하나 괴수는 생각보다 쉽게 쓰러졌다.
“설마… 그 기준에 나뿐만 아니라 둘리의 능력치도 포함돼서 평균값이 책정된 건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검을 뻗었다.
여러모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물론 말은 쉽게 해도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플레이어들은 괴수의 손에 의해 크나큰 피해를 입고 있었기에.
나는 주변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전부 구할 수는 없으려나.’
아무리 둘리와 내가 이곳을 도맡아서 상대하고 있다지만, 우리들의 몸은 하나인 것에 반해 플레이어와 괴수는 숫자는 턱없이 많았다.
한 명을 구하면 다른 한 명은 포기해야 한다.
아찔한 현실에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자, 바로 뒤에서 내 등을 덮치려던 괴수의 발목이 부서지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에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괴수의 피로 얼룩진 유채아가 있었다.
유채아는 채찍을 휘둘러 괴수를 저만치 날려 버리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걱정 마시고 한별 씨는 가세요.”
“괜찮겠어?”
“네, 물론이죠. 비록 한별 씨처럼 활약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시간을 끄는 건 가능해요.”
분명 체력 소모가 컸을 텐데도 불구하고, 유채아는 애써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걱정이 들었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그녀의 실력이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별 씨에게 도움만 받아서 이제는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아직까지도 한별 씨에게 도움만 받네요.”
유채아는 조금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한테는 불과 얼마 전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천 년 전의 일,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녀였기에 더더욱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머쓱 쩍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냐, 충분히 도움이 돼.”
유채아의 어깨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그건 그것대로 또라이 같은 발언이 아닐까.
나는 내심 조소를 머금으며 생각했다.
뭐 그것도 그것 나름이지만.
탑을 등반하면서 의지할 곳은 둘리밖에 없었는데, 유채아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닳게 되어 있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특히나 언제나 죽음을 동반하는 탑에서는 정신적인 소모가 크다.
지구라 해서 다를 것은 없지만, 그래서 탑급 플레이어 중에서는 자살을 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있다고 할 정도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채아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지였다.
“금방 끝낼 테니까. 최대한 버티고 있어.”
나는 검을 움켜쥐곤 괴수를 향해 나아가며 말했다.
* * *
우리가 전투에 난입한 직후로부터 상황이 마무리되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와 유채아의 활약에 등 업어 기세를 끌어올린 플레이어들은 협동해 괴수를 쓰러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적다는 말은 아니었다.
상황을 일단락 시켰다는 말뿐이지, 사상자부터 시작해 부상자까지 수두룩하게 나왔으니까.
게다가 사상자는 두 명.
듣자 하니 그중 한 명은 36층을 클리어하면 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해서 탑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아, 그놈이었나.”
전장에 도착한 직후에 본 남자를 떠올리며 나는 지었다.
이미 죽은 고인한테는 미안한 발언이지만……
“그러게 사망플래그는 왜 씨게 세운 거야.”
안타깝긴 했지만 동정은 들지 않았다.
그런 말을 안 꺼냈으면 통계학적으로 생존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아님 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부상자를 수습하던 플레이어가 메모하며 입을 열었다.
“부상자는 더러 있지만, 중상을 입은 자는 없습니다.”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유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아의 대답에 플레이어는 깍듯이 인사하며 뒤로 물러섰다.
항상 쪽지로 전해 듣기로는 신화라 불리는 3대 길드에 들어갔었다던데, 이제 보니 확실히 체감되었다.
역시 권력이 최고네.
딱히 소속 욕구는 없지만, 저건 조금 부러워질 정도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편의를 봐주면 편해질 테니까.
혼자서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플레이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곁으로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들.
그들은 이쪽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귀관께서 저희 파티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혹시 소속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입을 뗐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유채아로부터 들은 바가 있어서 누군지 대충 감이 잡혔다.
‘분명 회장, 이단심판관, 흑룡이라고 했던가.’
현재 3대 길드의 톱.
그런데 이름이 왜 저따구야.
불현듯 머릿속에서 든 의문을 떨쳐 내며 대답했다.
“딱히 소속된 곳은 없어.”
“그렇군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유형들이라면 많이 만나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내 대답 하나만으로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에 대한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겠지.
“시간이 급박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쉽게 되었지만, 저희는 36층의 도전을 여기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숨이 찰 법도 한데, 회장은 한숨에 연달아 말을 이었다.
“물론 이것은 저희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의 의견을 받아 결정지은 내용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채아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도 별다른 말없이 저들끼리 결정한 내용이겠지.
“아아, 무슨 뜻인지 알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을 위험에 처한 걸 기껏 구해 주니까. 감사 인사는커녕 그냥 여기에서 빤스런 치겠다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이야기지. 그럼 무슨 이야기인데? 이대로 쌩까고 가겠다는 말 아냐?”
필터라곤 하나도 거치지 않은 적나라한 발언에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좀 심한 것 같군. 그대의 말대로 받은 은혜가 있어서 딱히 입을 대지 않았지만, 우리들이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시건방지게 구는 것이지?”
“지랄하네.”
“지금 뭐라고?”
“너희들이 누구인지 내 알 바야.”
내 말에 이단심판관은 불쾌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과열될 때쯤이었다.
[자자, 싸움은 거기에서 멈추시길 바라겠습니다.]
하늘에서 새까만 벼락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진행자가 나타났다.
진행자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은 경계심을 보이며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놈과 무덤덤하게 마주한 것은 나뿐이었다.
뜬금없는 진행자의 등장에 의아스러워하는데, 놈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제가 이렇게 등장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새로운 정보를 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정보라고?”
날카로운 인상의 흑룡의 물음에 진행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 다들 아시다시피 36층이 LV.160으로 격상함에 따라 개정 사항이 발생했거든요.]
진행자는 파이프를 길게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원래 36층은 원하면 언제나 등반을 포기할 수 있지만. 개정사항으로 인해 등반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진행자의 기분 나쁜 웃음에 이단심판관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진행자는 짙은 연무를 내뿜으며 입고리가 귀에 거릴 정도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현재 이 인원으로 여기서 죽거나, 혹은 36층을 클리어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 * *
〈클리어 조건: 160개의 포인트 중 히든 스팟 5곳에 동시에 점령〉
- 실패 시: 죽음
※ 제한 시간: 1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