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쿠우웅!
협곡의 벽이 무너지며 쌓여 있던 눈이 파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광경에 스물한 명의 플레이어들은 새파래진 안색으로 외쳤다.
“짐은 버려도 상관없으니까. 피해라!”
“하, 하지만 짐을 버리면…….”
“닥치고 내 말 들어! 일단 살고 봐야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감정이 격양된 플레이어들이 소리쳤다.
흡사 산사태를 연상케 하는 광경, 하지만 규모는 그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나 그들은 바로 앞까지 쏟아져 온 눈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해도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었다. 날고 기는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다.
고작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다.
그게 평범한 상식이니까.
“다 끝났어.”
가장 선두에 서 있던 플레이어의 중얼거림.
36층의 플레이어 중에서도 정예라고 불리면서 선발되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나약한 발언이었으나 그들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렇게 누구나 할 것 없이 삶의 의지를 놓아 버리려던 그때였다.
“하앗!”
짤막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선두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여겼으나, 그 뒤에 벌어진 광경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채찍을 지면을 향해 세차게 휘두르자.
쫘아아아악!
파도처럼 밀려오던 눈사태는 한 방에 진정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무수한 양의 눈은 그 위력 그대로 반사되어 하늘을 향해 흩뿌려졌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에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이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어느 플레이어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 채아….”
현재 플레이어 랭킹에서 2등을 차지하는 괴물이자.
갖은 활약으로 명성과 무력을 떨친 플레이어.
비록 지금은 최단기 등반 기록을 신한별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골리엇 다음으로 가는 플레이어.
어느 수식을 붙여도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타공인 최강의 플레이어의 실력에 그들은 전율했다.
“와, 미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거야.”
“저분이 우리랑 같은 36층 등반자라고? 그게 말이 돼?”
플레이어들은 감탄하며 넋을 잃었다.
엄청난 활약이었지만, 유채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일축했다.
“집중하세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눈 속에서 괴수들이 솟아올랐다.
범상치 않은 기운에 플레이어들은 재정비하며 기합을 끌어냈다.
“전투 준비!”
“살려면 어떻게든 이곳을 돌파해야 한다!”
선두로 뛰쳐나간 유채아를 뒤로 플레이어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앞서 나간 유채아는 괴수들과 맞붙이 쳤다.
유려한 움직임으로 채찍을 휘두르자, 괴수의 몸이 우수수 무너진다.
몇몇 괴수들이 유채아의 배후에서 달려든다.
도저히 막아내기란 힘든 움직임처럼 보였지만, 채찍은 마치 자아를 지닌 것처럼 공중에서 방향을 틀더니 괴수를 떨쳐냈다.
마치 설원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는 듯한 광경.
유채아를 시작으로 뒤에서 한 자루의 성창이 쏘아졌다.
괴수의 심장부를 꿰뚫은 창은 이내 강렬한 빛을 일으키며 주변의 괴수들마저 녹여 버린다.
“으하하하! 이곳에는 나도 있다!”
이단심판관은 손을 뻗어 창을 회수하고는 괴수의 목을 다시 내려쳤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짙은 신성력이 남았다.
신성력은 점점 증폭하면서 창의 형태를 이루더니, 이단심판관의 손짓에 따라 전장에 휘날리며 괴수를 쓰러뜨린다.
그러던 도중, 눈에서 동화된 괴수가 날카로운 팔로 이단심판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주 빠른 일격.
날카로운 비수가 이단심판관의 목을 꿰뚫기 직전,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비단실이 앞을 가로막고는 괴수의 목을 날렸다.
“쯔즛, 명색이 성직자라는 녀석이 난폭하기는.”
검은 치파오를 입은 흑룡은 거미줄처럼 허공 위에 날아다니는 비단실을 밟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모습에 이단심판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늦게 온 사람이 할 말인가.”
“뻔뻔하기는, 됐었다. 앞으로는 내가 맡을 테니.”
흑룡이 부채를 휘두르자 선풍에 따라 비단실이 괴수들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그 속에 파고든 검은 정장의 남자가 장력을 날려 괴수를 쓰러뜨렸다.
“어이쿠, 저를 빼먹으시면 곤란합니다.”
마지막으로 난입한 회장의 끝으로 괴수들은 순식간에 쓰러졌다.
파죽지세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광경에 플레이어들은 열광했다.
유채아의 압도적인 무위에 이어서 3대 길드의 정점이 직접 선보인 퍼포먼스는 가히 충격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기에.
그들을 선봉으로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치켜들고 괴수와의 전투에 가담했다.
“그래, 이만한 전력인데 당연한 거지.”
“저 새끼들 다 죽여 버려!”
“이걸로 36층만 클리어 할 수 있으면 나중에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그녀도 나를 자랑스러워하겠지.”
플레이어들은 합심하여 괴수들을 쓰러뜨렸다.
어느 한쪽이 유리하다 싶은 것도 없는 팽팽한 전투 속, 다시금 채찍을 휘둘러 괴수의 몸을 양분한 유채아는 냉철한 눈빛으로 전투를 바라봤다.
‘영 이상한 느낌이야.’
분명 전황은 더할 나위 없은 분위기를 타고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대승리는 기대하기 어려워도 최소한의 피해로 괴수들을 무찌를 수 있을 터.
그게 최선의 시나리오일 텐데… 분명 그럴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36층에 도전해서 실패한 것도 벌써 수십 번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채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약해.’
유채아는 채찍을 이용해 괴수의 심장을 터뜨리며 의구심을 가졌다.
벌써 적지 않은 피해가 일어났는데, 이를 가지고 약하다고 말하는 건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우습게도 이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36층은 이렇게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36층의 레벨이 올랐다는 뜻은, 괴수들의 힘 역시 더 강해졌다는 것.
“오히려 약해지면 약해졌지 더 강해지지는 않았어요.”
그 증거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길드장들의 표정은 아리송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더 파고들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하나둘, 이를 악물고 남은 괴수들을 쓰러뜨리던 도중이었다.
“어? 뭐야?”
어디에선가 새어 나온 목소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생긴 동요는 점점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채아 역시 동요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스스스슷!
바로 직전에 유채아가 심장을 터뜨렸던 괴수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그녀가 직접 상대하기 전의 상태로 말이다.
비단 그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협곡에 즐비한 괴수 전체가 거짓말같이 재생되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듯 역재생되어서.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일.
“이럴 수가…….”
유채아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길드장들도 처음 겪은 일에 어쩔 줄을 모르고,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현실이라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으악! 사, 살려 줘!”
“제… 제발! 나는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저… 그저 가볍게 돈을 좀 벌어 볼 생각뿐이었는데 어째서…….”
“시발,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왜 괴수들을 끌고 오냐고!”
이러는 와중에도 플레이어들은 괴수의 손에 의해 쓰러져갔다.
순식간에 역전된 상황.
썩어도 준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36층에 선별된 플레이어들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경험이 있기에 이변이 일어나도 충분히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몸이 사고를 따라가지 못한 까닭이었다.
“내가 움직여야 해.”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건 몇몇 플레이어와 유채아뿐.
유채아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나마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다고 해도, 저들이 일을 해결하기에는 무력이 약했다.
‘적어도 이럴 때 한별 씨가 있었더라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채아의 머릿속에는 신한별이 스쳐 지나갔다.
튜토리얼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면 언제나 먼저 나타나 일을 해결해 주던 듬직한 신한별의 뒷모습이.
하나 지금은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수 없다.
설사 신한별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36층에 등반할 리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해결해야 해.”
유채아는 있을 수 없는 일말의 희망을 가슴 속에 숨긴 채, 괴수를 향해 뛰쳐나갔다.
* * *
“저게 진행자가 말한 플레이어들인가.”
나는 협곡 위에서 전투 중인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치열한 전투였지만,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플레이어들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도와줘야겠지.’
마음 같아선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러기에는 진행자가 말했던 부분이 걸린다.
36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그들의 힘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발언이.
뭐,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보상이나 두둑하게 받아 내면 되겠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한 번쯤은 구해 줘도 상관없으려나.
그걸 끝으로 나는 검을 움켜쥐고는 전투가 벌이진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달음에 괴수의 앞에 도달한 나는 검을 횡으로 그었다.
촤아악!
복잡한 묘리나 기술이라곤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짧은 일격.
내 검은 괴수의 몸을 깔끔하게 베었다.
하나 아까 전에도 보았듯 괴수의 신체는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나는 비릿한 웃음기를 삼키며 이터의 권능을 발동했다.
내 손아귀에서 뻗어져 나간 촉수는 괴수의 코어를 집어삼켰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재생하던 괴수는 거짓말같이 쓰러졌다.
‘베어도, 베어도 계속해서 부활한다면 그냥 그 원인을 없애 버리는 되는 거잖아.’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괴수를 향해 달려가려던 그때였다.
“어? 하, 한별 씨?”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