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도전 구역에 진입하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몰아닥쳤다.
뼛속까지 시릴 듯한 추위였으나 곧바로 아티팩트의 효과가 발동했다.
〈백룡 시리즈의 효과로 한기 내성이 발동합니다.〉
〈백룡의 부츠(SS+)〉
- 설원 위에서 움직임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치이이익⎯
아티팩트에서 뜨거운 증기가 새어 나오며 얼어붙은 신체를 따뜻하게 데웠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외투를 매만졌다.
‘다행이네.’
물론 추위에 대해선 어느 정도 내성은 있지만,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다.
내성을 가졌다고 해도 얼어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추위 자체는 그대로 느끼니까.
당연히 장기간 추위에 노출되면 움직임이나 사고 능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아티팩트의 효과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추위 속의 따뜻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으으으….”
바로 옆에서 들린 신음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몸을 떨며 이를 맞붙이지는 둘리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추운 모양인지, 콧물이 고드름이 되어 삐죽 튀어나와 있을 정도.
둘리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부, 불공평하다! 한별은 옷이라도 입고 있지만 난 벗고 있다.”
녀석의 눈물겨운 항변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인데.
항상 느끼는 의문이지만, 명색이 드래곤인데 저렇게까지 추위를 느끼기도 하나?
“안 되겠다! 역시 따뜻한 게 낫다!”
둘리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이 내 품속에 바짝 붙었다.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둘리는 그제서야 살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떼려고 했지만, 둘리는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하긴 바깥에서 그렇게 먹어댔으니 식곤증이 올만도 하겠지.
‘그대로 둘까.’
당장 둘리가 필요하면 모를까. 지금은 시킬 일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려는 그때였다.
파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공중에서부터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는 서늘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공간의 균열에서부터 중후한 중절모와 파이프가 인상적인 사람이 등장했다.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고 있는데,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한별 플레이어 오래간만입니다. 이거야 오래간만에 보는 듯싶군요,]
“누구지?”
스스럼없이 구는 태도에 눈을 찌푸리고 있자, 그는 과장스럽게 양팔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를 기억 못 하시는 건 섭섭하네요. 뭐, 그간 격조했었으니 다시금 소개해드리도록 하죠. 저는 이번 층의 진행을 맡은 진행자입니다.]
“진행자라면….”
그의 말에 나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6층을 등반할 당시에 잠시나마 마주친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그놈이었나.”
“오, 드디어 떠올리셨나 보네요.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탑을 등반하는 일개 등반자가 기억하는 걸 가지고 영광이라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어깨를 끄덕거리며 너스레를 떨자, 진행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이쪽의 마음을 뻔히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한 눈.
그것도 잠시, 진행자는 경극을 연상케 하듯 과장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한별 플레이어는 저희가 주시 중인 요주의 인물! 그런 전무후무한 대상자를 두고 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주의 인물이라… 딱히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없지 않나?”
내 물음에 진행자의 입가에는 불쾌한 호선이 그려졌다.
“저번에 있었던 진행자 박탈 사건, 초유의 사태를 기억하는 진행자들이 많거든요. 물론 좋든, 나쁘든 어떤 의미로든 간에 말이죠.”
그러고 보니 진행자들과 대립했던 적도 있었다.
그땐 도대체 어떤 깡으로 일을 저질렀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만했던 거 같다.
왠지 몰라도 진행자라는 족속들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거든.
나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후자에 더 가까운 거 같은데.”
“후우⎯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진행자는 파이프를 빨고는 새하얀 연무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아, 오해하실까 봐.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자에 가깝습니다. 저는 신한별이라는 인간한테 상당히 관심 있는 편이거든요.”
“내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
뜬금없는 물음에 진행자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세상에는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거야. ”
“후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뭐, 저도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러 온 것은 아니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진행자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는 이쪽을 직시했다.
어디까지나 그의 역할은 플레이어에게 층을 가이드하는 역할.
그는 손가락을 튕겨 연초에 불을 붙이곤 파이프의 입구를 길게 빨았다.
그리고는 숨을 다시 내뱉자, 항상 나오던 새하얀 연무가 아닌 밤하늘의 별을 연상케 하는 시꺼먼 연기가 뿜어졌다.
이윽고 시꺼먼 연기는 우리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이건?”
“걱정 마시죠. 해로운 건 아닙니다. 말로 하기보단 직접 보여드리죠.”
눈을 흘기며 경계하는 기색을 띄자, 이를 지켜보던 진행자는 손을 들어 연기 속을 가로저었다.
그러자 연기가 용솟음치더니, 탑의 모형을 만들어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탑, 그중에서도 36층입니다.”
진행자의 말에 내 의식은 연기가 구현해낸 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36층의 배경처럼 몰아치는 한기 속 나와 진행자는 공중을 날아 한 바퀴를 돌았다.
이윽고, 우리들의 앞으로 숫자가 떠올랐다.
〈LV.160〉
36층을 입장하면서 동시에 떠올랐던 의문의 숫자.
“이곳에 입장하시면서도 보셨을 테지만. 여기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는 지금까지 36층에 도전한 횟수입니다.”
“도전 횟수라면…….”
“보자 지금은 160이니, 신한별 플레이어가 160번째시군요.”
진행자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주판을 꺼내 계산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이내 그는 무관심한 눈으로 주판을 던졌다.
던져진 주판은 한줄기의 별이 되어 밤하늘 일부에 스며들었다.
“참고로 옛이야기를 하자면. 첫 번째로 도전한 36층은 지금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마치 역재생을 한 듯, 주변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허리춤까지 차올랐던 눈은 점점 녹아 그 속에 잠들어 있던 땅을 드러냈고,
얼어붙어 황폐한 땅에서는 부러진 나무들이 다시 붙으며 거대한 산림을 이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얼어붙은 살풍경이라곤 연상하긴 어려운 풍경.
그리고 온화한 숲속에서는 수 명의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오! 드디어 나타났군요. 36층에 도착한 최초의 플레이어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 지옥의 시발점이죠.”
36층에 처음 도착한 플레이어들은 보기에도 허약한 괴수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또 시간은 빠르게 흘러, 36층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은 다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무료하리만치 반복되는 살풍경.
하나 그곳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간을 거듭할수록 점점 강해지는 괴수와 내가 기억하는 36층의 풍경과 점점 닮아져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고.
또 죽고.
다시금 죽고.
죽음이 반복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잔인할 정도로 흐르던 피는 흐르지 않게 되었다.
난폭한 추위 속에서 핏방울이 흐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까닭이었다.
“참 우스운 일이죠.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그리고 실패하는 것에 비례해 36층은 강해진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전하는 우둔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잔혹하기까지 한 그의 발언에 나는 말을 아꼈다.
나를 도발하는 것에는 관심을 잃었는지 진행자는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어두운 밤하늘은 점점 흩어져 소멸했다.
그리고 차가운 설원 속에서 나는 검을 쥐며 되물었다.
“그래서 이걸 보여주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아니 그전에 다른 걸 물어보지 이걸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도 보여줬나?”
“그럴 리가요. 이건 오로지 신한별 플레이어한테만 보여주는 특별 서비스입니다.”
진행자의 발언에 나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한테만 보여준 이유는 뭐지?”
“글쎄요? 굳이 해명하자면 방금 전에 말했듯 신한별이라는 인간이 궁금해서 또, 당신이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그저 그뿐입니다. 더 이유가 필요할까요?”
“그래, 네 말대로지.”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원래 탑이 그런 족속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 36층의 클리어 조건은 설원 위에 무작위로 있는 160개의 포인트 중 히든 스팟 5곳에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서 있어야 하는 겁니다.”
진행자의 설명에 나는 확신했다.
이번 층은 혼자 클리어하는 것이 아닌 플레이어들이 함께 손을 잡아야 하는 단체 층임을.
그러던 와중이었다.
〈신한별 플레이어의 능력치 20%가 하락합니다.〉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 문구와 함께 온몸에 무력감이 생겨났다.
“아, 그건 당신이 이번 층에 들어오기 전에 받은 패널티입니다.”
“뭐, 이 정도야 상관없어.”
힘이 조금 약해졌다고 탑을 등반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다. 이것보다도 더한 것도 겪어봤는데. 뭘.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려던 때쯤이었다.
진행자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 나온 것은.
“아!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네요. 도전이 거듭될 때마다 36층의 난이도가 강해지는 기준은 도전자들의 평균 능력치를 기준으로 합니다. 게다가 초기화되는 것이 아닌 중첩.”
“뭐라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159회차 등반자들의 무력과 신한별 플레이어가 지닌 능력치의 중첩이라… 이것 참 생각지도 못한 괴물들이 나오겠네요.”
진행자는 재밌겠다는 듯이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지막으로 팁을 드리자면 이번 층은 솔로 클리어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서 159회차 분들을 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늦기 전에요.”
그 말을 끝으로 진행자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가듯 사라졌다.
그리고서 자리에 홀로 남은 설원 위에서 검을 질질 끌듯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이를 파악하고 수십, 수백의 괴수들이 안광을 빛내며 나타났다.
가공할만한 살기가 따가운 비수가 되어 온몸을 찔러왔다.
어쩌면 내가 지닌 힘을 훌쩍 넘을지도 모르는 괴수들.
저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상당히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리야.”
부름과 함께 품에 있던 둘리가 성체화를 하며 줄어들었던 능력치가 급격히 올랐다.
〈인연의 증표(S)〉
- 펫과 연결(귀속)됩니다.
- 펫이 성장률에 따라 주인의 스탯이 일부분 성장합니다!
나는 놈들에 맞서 검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날 얕보면 곤란하지.’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진행자에게는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귀중한 능력치원을 제공해 줄이야.”
나는 이터의 권능을 발동시키며 말했다.
20% 감소한 능력치는 여기에서 전부 메꾸면 되겠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