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36층입니다.〉
〈도전 구역과 비무장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비무장 구역에서 무력 행위 시 패널티를 받으니 주의해주십시오.〉
〈클리어 조건: 도전 구역에 참여해 클리어하십시오.〉
36층에 도착하자, 설명이 적힌 시스템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나는 손을 휘저어 눈앞에 뜬 창을 일단락시켰다.
“36층이라고 해서 살벌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주변을 둘러보며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36층에 도착하자마자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평화로움과 약간의 활기.
한적한 도시를 연상케 하는 풍경에 나는 한시름을 놓았다.
하긴 이상한 것도 아니다.
“플레이어들이 36층에 정착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고 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몇 년 동안 머무를 정도면 당연히 생활 여건은 정착되어 있을 터.
아무리 플레이어들의 우선순위가 탑을 등반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본질은 인간이니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도 튜토리얼에 갇혔다는 걸 인지하고 가장 먼저 만든 게 집이었으니까.’
열심히 만든답시고 완성한 결과물이 고작 괴수의 뼈로 만든 움막이었지만.
나는 썩은 웃음을 지으며 그 당시를 떠올렸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애초에 언제 어디서 괴수들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는데, 본격적인 집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땐 정말 거지마냥 살았었는데…
“한별! 가만히 서서 무슨 생각 하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둘리가 불쑥 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 손에 쥐어진 둘리는 아프다는 듯이 양팔을 휘두르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놔라! 아프다아!”
“투정 부리지 마.”
그제서야 손의 힘을 풀자, 둘리는 제 머리를 매만지면서 눈가를 그렁거렸다.
그런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나아갔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다지 몰랐는데, 막상 들어와서 살펴보니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다.
무기점부터 시작해 음식점, 은행, 포션 상점까지 다양한 종류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게다가 상점에 나열된 상품들도 대다수가 최상품.
확실히 탑의 최상층인 만큼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듯했다.
‘판매자도 그렇지만, 구매하는 사람들도 죄다 실력자니 당연한 건가.’
이런 점에 있어서는 나름 나쁘진 않네.
다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묘한 기분인데.’
길거리를 둘러보다 말고 불현듯 느낀 의미심장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기도 잠시, 내내 느꼈던 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평화로워.”
“음? 한별 이상한 말을 한다. 평화로우면 좋은 게 아닌가?”
내 중얼거림에 둘리가 되물었다.
그래, 평범하게 생각하면 평화로운 것만큼 좋은 건 없겠지. 분쟁이나 폭력은 누구나 원하지 않은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바깥에서 통용되는 이야기.
하나 플레이어들에게 평화는 수렴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필사적으로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한테는 일상 자체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일 테니까.
하지만 36층의 플레이어한테는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20층대에서 등반하는 플레이어보다도 더 못하겠는데.”
탑의 최상층이라고 해서 플레이어들의 실력 역시 심상치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산산이 깨졌다.
그들의 실력은 명백히 수준 이하였다.
사뭇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옆에 있던 둘리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집중력이 깨졌다.
“으윽… 아, 아무 소리도 아니다!”
우레 같은 소리에 둘리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손을 가로저었다.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하는데, 부정해도 이미 들켰어.
나는 피식 웃으며 둘리의 뱃살을 토닥거렸다.
“안 그래도 출출한데 뭐 좀 먹을까.”
“헉! 좋아, 좋다! 아까 전에 초꼬바나나 가게 있었는데 거기로 가자!”
“초코바나나?”
“응! 응! 한별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찾아 놨다. 둘리가 직접 안내하겠다!”
이번 층에 도착한 지 얼마 됐다고 어느 틈에 찾아놓은 거야.
똘망똘망한 둘리의 눈망울에 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지 뭐.”
안 그래도 나도 출출하던 차였다.
겸사겸사 정보도 알아볼 겸이라면 괜찮겠지.
둘리를 따라가자, 노상 한가운데에 갖은 간식들로 즐비한 상점이 있었다.
“한별! 한별! 저것도… 이것도… 아! 저기에 있는 사과 사탕도 먹어보고 싶은데 한 번 먹어도 되나?”
상점에 도착한 둘리는 눈을 반짝이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모습에 나는 퉁퉁하게 튀어나온 둘리의 뱃살을 바라봤다.
어쩐지 최근 들어 살이 부쩍 찐 거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먹어대니 살이 찌지.
원래였다면 한 소리 했겠지만, 최근 들어 고생하기도 했으니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먹는 건 상관없는데, 딱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시켜.”
“응응! 알았다! 적당히 시키겠다!”
둘리는 활짝 웃으며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상품을 포장하던 주인장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귀여운 사역마군. 보아하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형씨 이번 층에 막 올라왔나 봐?”
“그 말대로, 아까 전에 올라온 참이야.”
“하하핫, 그럴 줄 알았어. 36층까지 올라온 걸 정말 축하하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더 서비스 해주마!”
호쾌한 인상의 주인장의 말에 둘리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머리가 빛나는 아저씨 정말 고맙다! 맛있게 먹겠다! 근데 아저씨는 저주라도 받았나? 왜 머리에 털이 없는 거지? 회복 포션이라도 부으면 저주가 풀릴지도 모른다!”
“……”
차라리 악담이면 낫지. 녀석의 순진무구한 눈빛에 주인장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둘리야, 남의 호의에 대못을 박으면 안 되지.
“원래는 착한 애인데……”
“아닐세. 그럴 수도 있지.”
주인장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눈치를 슬쩍 살피며 의문을 던졌다.
“하나 궁금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될까?”
“허허, 물어보는 거야. 환영이지 그래서 궁금한 게 뭔가?”
주인장은 금세 기운을 차렸는지 털털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빛냈다.
“다른 건 아니고, 다른 층들에 비해서 분위기가 다른 거 같은데 혹시 그 이유를 아는가 싶어서.”
“껄껄껄, 잘 물어봤네. 형씨분만 아니라 36층에 막 올라온 신인들은 항상 가지는 의문이거든.”
“다른 사람들도?”
“그래,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그야 36층에 머무르는 플레이어 중 8할이 싸움을 포기한 등반포기자니까.”
등반포기자.
그의 답변에 나는 눈을 빛냈다.
내 눈빛을 캐치한 주인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36층에 이제 막 등반했으면 몰라도 몇 년 동안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알거든. 36층은 난공불락의 층이라는 것을.”
“난공불락이라니?”
“말 그대로라네. 엄청난 명성을 가진 정예들이 도전해도 몇 년째 클리어하지 못했는데 다들 포기할 만하지. 오죽하면 예의 그 골리엇마저도 등반포기자가 됐으니 말 다 했지.”
“…….”
“걱정 말게나. 자네의 걱정과는 달리 이곳은 살기 편한 곳이거든. 비무장지역에만 있으면 괴수들과 싸울 일도 없지. 불편한 점도 없어. 마치 탑이 생기기 전의 지구를 떠올리게 하지.”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간식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자네도 될 수 있다면 참된 여자랑 결혼식이라도 올려보게나. 서로 눈이 맞은 플레이어들도 많다네.”
“참고하지.”
나는 음식의 값을 치르며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장은 웃음을 지으며 초콜릿을 둘리에게 던졌다.
“이것도 서비스라네. 아, 괜한 노파심에서 말하는 거지만 함부로 36층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말게나.”
“그건 어째서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다시 되묻자, 주인장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36층의 치안을 맡은 3대 길드와 황금련, 암각이라는 단체에서 자신들의 인증을 받은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입장 자체를 못 하도록 막고 있다네.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건 신상에 좋지 않으니 되도록이면 피하게.”
그의 경고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하지.”
“그래, 고맙네. 다음에도 또 들려주게나.”
그것을 끝으로 나와 둘리는 도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상점의 주인장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36층의 입구는 도시에서 30분가량 떨어진 장소에 있다고 했었다.
그가 건네준 지도를 따라가자, 이윽고 새하얀 섬광이 인상적인 결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지닌 채 지키고 있었다.
‘저기가 도전 구역인가.’
주인장이 이야기했던 것과 그대로다.
분명 그는 저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주의를 줬지만.
“서비스는 고마워도 어쩔 수 없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 * *
어쨌든 간에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도전 구역에 입장해야 했다.
입구를 향해 다가가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길목을 가로막았다.
“죄송하게 됐지만, 이 앞은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통행금지 구역입니다.”
“통행금지 구역?”
그들의 말에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네, 3대 길드에서 직접 허락한 플레이어만 입장 가능합니다. 입장하시려면 허가증을 가지고 오셔야 하는데… 없으시죠?”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가 탑을 오르겠다는데 허락이 왜 필요해?”
“그건 기밀 사안이라 알려드리긴 곤란하네요.”
내 물음에 눈가가 찢어진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희 입장에서도 일을 크게 만들긴 곤란한데, 서로를 위해서 이만 뒤로 물러나시죠.”
“서로를 위해서?”
“그야 당신도 보셨을 거 아닙니까. 36층에서 무력 행사를 할 시에는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문구를.”
그의 말대로 36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문구가 시스템창에 떴긴 했었다.
내 모습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발밑에 선을 그었다.
“하아, 저도 가능하면 좋게 넘어가고 싶으니 이 선을 넘을 시에는 즉결 처벌로 길드의 지하에 구금을 할 테니 그런 줄 아십시오.”
노골적인 그의 태도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길드의 말에 따르는 말단인 그에게는 잘못은 없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전에 말했지? 서로를 위해서 넘어가자고.”
“네, 그런데 그건 왜……”
“별건 아니고, 나한테는 상관없어.”
“에?”
못 알아들었다는 듯 되묻는 그를 향해 나는 검을 뽑으며 다시 말했다.
“그깟 패널티 따위 내 알 바야?”
나는 가볍게 검의 손잡이를 휘둘러 플레이어들을 기절시켰다.
〈비무장 구역에서의 무력 행위를 발견했습니다.〉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시끄러운 경종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으나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휘둘러 무시했다.
새삼스럽게 탑의 경고를 보고 지레 겁에 먹을 거였으면 애초에 플레이어가 된다는 선택 자체도 하지 않았으리라.
또, 그깟 패널티가 몇 개가 는다 해도 탑을 등반하는 데에는 문제는 없다.
나는 새하얀 균열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뻗었다.
〈36층, 빙하지대 LV.160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N〉
묘한 문구와 함께 입장의 여부를 물어보는 시스템창.
당연하지만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래, 입장한다.”
그렇게 하늘에서 강렬한 섬광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