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36층, 빙하 지구 LV.159〉
휘이이잉⎯
매서운 한파가 불며 거센 눈보라가 일었다.
얼마나 짙은 눈보라인지 한 치 앞도 쉽사리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폭풍이 불었다.
사방이 빙하와 눈 폭풍으로 가득한 험난한 풍경 속에서 수십 명의 플레이어는 꺼지지 않도록 투명한 상자 속에 넣어둔 불꽃을 의지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내디뎠다.
막강한 추위임을 증명하듯 정예들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며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장 자세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만한 칼바람이었음에도 플레이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사명감?
혹은 모든 플레이어의 정점에 선 정의감과 의지?
아니, 그 모든 것이 틀렸다.
우습게도 한계까지 내몰린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무력감이었다.
아무런 사고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운동만 반복한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후우, 이쯤이면 됐나.”
진열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는 품에서 병을 꺼내 속에 든 검은 액체를 불태웠다.
촤륵, 화르르!
불타기 시작한 액체는 검은 연기를 일으키며 엄청난 악취를 피워냈다.
“윽… 메두사의 독은 언제나 맡아도 별로군.”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병을 옆으로 던졌다.
바로 앞도 안 보이는 폭풍 속에서는 언어를 통한 신호도, 신호탄도, 발자국을 이용한 신호도 눈 속에 묻혀버린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떠올린 방책은 냄새.
아무리 엄청난 폭설이라 해도 끔찍한 냄새는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선두에서 후미까지 모든 사람이 메두사의 독을 태우고 나서야 진열은 선두로 보였다.
“총인원은 21명… 전부 모였네.”
“다행이군. 그래도 이번에는 낙오자가 없는 걸 보니.”
“저번 회차에서 발생한 낙오자가 2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구려.”
그들은 인원수를 확인하며 무덤덤한 농담을 던졌다.
“그럼 시작할까.”
그것도 잠시, 누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일사불란하게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몸에 밴 움직임.
그로부터 5분가량이 흘렀을까.
설원 가운데에 그럴싸한 가건물이 세워졌다.
단순히 눈바람을 피하기 위한 건축물.
하나 그들의 피로를 풀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수한 시련과 경험을 딛고서 36층의 토벌대로 뽑힌 21인의 정예.
한 명, 한 명이 범접할 수 없을 만한 명성을 지닌 괴물들이었으나, 플레이어들은 한쪽에 설치된 테이블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곁으로는 보잘것없는 테이블.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면면은 천외천이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했다.
“후우, 죽을 것 같구만!”
장장 2미터를 훌쩍 넘는 우람한 거구에 덥수룩한 턱수염,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자기 몸만 한 엑스를 등에 걸친 사내는 거칠게 의자에 걸쳐 앉았다.
야만적이라는 묘사가 어울릴 법한 그의 태도에 옆에 있던 여성이 부채를 펼치며 혀를 내둘렀다.
“쯔쯔쯧, 그래도 명색이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자가 그게 무슨 행색인가. 도저히 나와 같은 선상에 썬 자라고 떠벌리고 다니기에는 낯이 뜨겁네.”
마치 흑표범을 연상케 하는 검은 치파오에, 푹 파여 농염하게 노출된 등에는 용의 문신이 큼지막하게 새긴 여성.
그녀는 찻잔을 기울여 홍차를 후루룩 마셨다.
가식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발언에 남자는 사나운 기운을 흩뿌렸다.
“사창가에서 볼 법한 옷차림이나 하곤, 쪽팔린 건 흑룡 네년이지.”
“그러는 이단 심판관이야말로 신을 모시는 성기사 주제에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저질러도 되는가? 교리에서는 따로 무식함이라도 가르치나 봐?”
서로의 발언에 테이블 위에서 살벌한 기운이 맞붙이 쳤다.
공중에서 스파크가 튀며 건물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중간에 난입한 제3의 기운이 둘의 힘을 억눌렀다.
“잠시 눈을 뗐다 싶었는데 벌써 싸움인가요. 둘 다 적당히 하시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힘을 빼면 어떻게 하잔 겁니까.”
깔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의 등장에 두 사람은 서로 무안한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분위기가 정리되자, 남자는 자리에 착석했다.
“그럼 3대 길드 회의를 시작하겠다. 먼저 신화의 회장이다.”
스스로 회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시작으로 그들은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와는 180도 달라진 자세로 자리에 임했다.
“백신전 소속, 신의 첫 번째 파수꾼 이단심판관이다.”
뒤이어 우악스러운 육체와는 달리, 남자는 우아한 손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살룡문의 흑룡.”
흑룡은 부채를 최악! 펼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탑의 3대 길드의 우두머리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모두가 모였다는 것을 확인한 신화 길드의 회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인지라 황금련과 암각에서는 회의에 불참하기로 했습니다… 관련한 내용은 서면으로 전달하기로 했으니 양해해주길.”
“어쩔 수 없죠. 애초에 그쪽은 우리 길드와는 다른 입장이기도 하니까.”
흑룡은 옅은 비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이단심판관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딴지를 걸었다.
“그들 또한 필요한 존재들이다. 필요의 여부는 우리같이 하천한 인간이 따지는 게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직접 점쳐주시는 법이지.”
“그놈의 신은 무슨… 마마보이도 아니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깟 신이 뭐가 좋아서 따라다니는가. 그런 의미에선 마마보이가 훨씬 낫겠네. 적어도 그쪽은 존재하기라도 하니까.”
“말조심하지?”
“의외로구나. 신을 따르는 종자들은 인내심이 어지간히도 강하다고 아는데, 정작 신의 첫번째 사냥개는 다혈질인 걸 보니.”
“네 이년!”
거침없이 쏟아내는 흑룡의 비판에 이단심판관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영향으로 테이블 일부분이 박살이 났지만, 흑룡은 괘념치 않다는 듯 회장의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연보라색의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성이 있었다.
같은 여자라도 혹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마치 조각상을 깎아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백옥을 연상케 했다. 외모만 해도 시샘이 날 정도인데, 그녀의 진정한 원석은 달리 있었다.
“플레이어 랭킹 2위, 유채아.”
흑룡의 발언에 옆에서 떠들던 이단심판관마저 제자리에서 움찔하며 멈췄다.
흑룡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 알아봤는데 신화 길드 소속이긴 해도 실질적으로는 협력 관계일 뿐이더라지. 길드 내에서도 일개 길드원인 신분으로 있어도 독자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고 아, 물론 뒷조사를 해서 기분이 상했다면야 미리 사과하도록 하겠네.”
“…….”
“그래서 우리 길드로 오는 건 어떤가? 내 대우는 확실히 쳐주도록 하지.”
탁!
흑룡은 부채를 접은 채 유채아를 향해 내밀었다.
그녀의 행동에 지금까지의 소란에도 무덤덤하던 회장의 눈빛도 미력하게나마 흔들렸다.
집중하지 않으면 못 알아차릴 정도의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그걸 놓칠 정도로 미련하진 않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는 도발적으로 나섰다.
“자세하게는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화가 제시한 조건의 5배? 10배? 혹은 부길드장의 명예? 그것도 싫다면 우리 길드에서 보유한 에리어도 내어줄 수 있다네.”
흑룡의 파격적인 제안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해졌다.
정작 그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인 흑룡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대답은?”
그녀의 제안에 유채아는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필요 없어요. 그런 재화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대답은 거절.
유채아의 답변에 흑룡은 입맛을 다시며 속물적인 웃음을 지었다.
“어머, 이 제안이라면 반드시 수락할 줄 알았는데 아쉽네. 그래도 우리 길드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말만 해라고.”
“천하의 흑룡이 거절당하다니 재밌군. 아무래도 예전에 신협단이라고 하는 단체한테 테러당한 게 뼈아팠나 보지?”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단심판관의 도발에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되먹지도 못한 머저리를 감히 내 앞에서 거론해?”
“그러면 그 되먹지도 못한 놈들한테 당한 살룡문은 갱생도 못 하겠군.”
불과 얼마 전, 살룡문의 건물이 신협단에 습격당한 사실은 유명한 일이었다.
모든 커뮤니티에서 화젯거리가 될 정도로.
신협단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져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떨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 사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 이는 살룡문에게 있어서는 불명예스러운 아킬레스건이었다.
당연히 이를 알고 있는 이단심판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분명 탑에서 신한별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것도 33층에서라지. 어쩌면 그 신한별이라는 녀석과도 곧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걱정마라. 그놈은 내가 직접 나서서 신협단의 뿌리를 뽑아버릴 테니까.”
흑룡은 이를 빠드득 갈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신협단이라는 단체에 대한 크나큰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난리통에서 단 한 명, 오직 유채아 만이 미세한 표정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러던 와중이었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잡담은 끝난 거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우리가 36층에 도착한 지도 벌써 몇 년째입니다. 무조건 이번에는 클리어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골리엇한테서 연락은…….”
“뭐, 그 사람이야. 36층의 첫 도전 이후로 몇 년째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뿐더러 우리들의 말을 들을 작자도 아니잖아.”
그의 발언에 이단심판관은 고개를 저으며 단칼에 그었다.
탑의 최강이자 플레이어 랭킹 1위,
골리엇이 36층의 등반을 포기하고 은둔한 사실은 이제 모든 플레이어가 아는 사실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건 없었기에 관련된 주제는 빠르게 넘어갔다.
그렇게 굵직한 주제들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36층에 입장한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창이 떠오른 것은.
〈추가 등반자가 발생했습니다.〉
〈빙하 지구 LV.160〉
갑작스레 나타난 문구.
이를 바라보던 길드장들은 일순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상황을 알아차리곤 분노를 터뜨렸다.
“젠장! 밖에서는 도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하고 있길래. 이런 문구가 떠! 제대로 관리하라고 단단히 일러뒀을 텐데.”
“자, 잠깐만 이 시스템이 떴다는 이야기는 지금쯤 괴수들은…….”
“어서 건물을 허물고 흔적을 지우는 겁니다! 괴수가 눈치채기 전에 어서!”
그들은 서둘러 상황에 대처하려 했으나,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작하기도 전에 상황은 끝나 있었다.
“늦었어요. 벌써 도착했어요.”
한발 앞서 무기를 꺼낸 채, 밖을 주시하던 유채아가 말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상황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콰아아아앙!
가공할 만한 폭발과 함께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가건물.
그 너머에는 엄청난 숫자의 괴수들이 안광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오금을 지릴 것 같은 공포감 속에서 21인의 정예는 각자 무기를 뽑았다.
“젠장! 맞서 싸워라!”
그렇게 그들은 괴수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기 전으로 시간은 수 시간 전으로 되돌아가.
36층에 새로이 도착한 플레이어는 주변을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36층입니다.〉
〈비무장 구역입니다. 전투 시에는 패널티를 받으니 주의해주십시오.〉
“여기는 뭐하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