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나는 손을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살폈다.
처음에는 착각이 아닌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감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34층에 오고서부터 무감각하던 감각이 돌아왔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4층의 컨셉은 감각이 없는 상태로 조건을 클리어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전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무감각해진 시간이 길어진 나머지 신체가 착각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간혹 팔이 절단된 사람들이 뇌의 착각으로 팔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사례도 종종 있지 않은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둘리한테 물었다.
“둘리야, 최대한 세게 등을 때려봐 봐.”
“으음? 등을 말인가?”
“어,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신경 안 쓸 테니까. 최대한 세게 때려봐.”
“하, 한별을 어떻게 때리나!”
내 발언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둘리.
녀석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관없으니까. 어서 해 봐.”
“그럼 한별… 나중에 나한테 보복한다고 밥과 물도 안 주고 이 더위 속에서 알아서 오라고 하늘 위로 던지지 않는 거다? 꼭 약속해라!”
“…….”
둘리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녀석의 이미지 속에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 말종인 거야?
“약속할 테니까. 어서 해.”
“흐흐, 지금 약속한 거다! 한별 꼭 약속 지키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둘리는 팔에 마나로 된 막을 여러 겹으로 중첩해서 두르기 시작했다. 이내 둘리의 손 위에 이뤄진 마나는 드래곤의 손톱과 같은 형상을 띄었다.
묘한 느낌에 서둘러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둘리가 움직였다.
“한별! 이 꽉 물어라!!”
잠깐만… 이 꽉 물 정도로 적극적일 필요는 없는데.
그러나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촤악!
둘라의 손톱이 등을 지나가며 따가운 격통이 뒤를 따랐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등을 매만졌다.
당연히 이런 애매한 위력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겠지만, 이걸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역시 감각이 돌아왔어.’
원래였으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고통은 물씬 느껴졌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34층의 조건이 완전히 풀렸다.
나는 샘물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샘물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단순히 감각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에 그치긴 했으나 탑이 설정한 층의 리미트를 해제할 수 있다니.
원래였으면 상상치도 못했을 일이었다.
그만큼 탑의 영향은 플레이어에게 크나큰 의미니까.
‘나만 해도 무슨 수를 써도 튜토리얼에서 못 빠져나왔으니.’
기존에 있던 상식을 완전히 개벽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일으킨 주범은……
“성신 카르텔.”
나는 시스템에 뜬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단순히 탑의 꼭대기에서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을 족속들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상황이지만, 또 그렇다고 섣불리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여기까지 전부 탑이 꾸민 계략일지도 모르니까.
〈성물에 성신의 권능이 깃듭니다.〉
- 전체 수집률: 12%
시스템에 뜬 문구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일단 두고 보면 알겠지.”
샘물을 마주할 때마다 전체 수집률이 올랐다는 의미는 앞으로 탑을 등반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는 뜻이다.
급하게 마음을 먹을 이유는 없다. 지금처럼만 탑을 등반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
어쨌건 몸에 걸린 저주도 해제되었다.
그 뜻은 간단했다.
“이번 층은 쉽게 갈 수 있다는 뜻이지.”
34층의 클리어 조건은 15일간 생존하거나 사막을 탈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감각의 상실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지, 감각을 되찾은 지금으로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둘리의 몸을 움켜쥐고는 씨익 웃었다.
“속전속결로 끝낼 테니까. 거기에서 참고 있어.”
“한별 자, 잠깐만… 급한 일은 아니니까. 조금만 천천히…… 으악, 으아아아!!”
내 옆구리에 끼워진 둘리는 압도적인 속도를 체험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34층이 클리어되기 전까지 쭉 이어졌다.
* * *
〈35층으로 이동합니다.〉
〈35층은 휴게 공간입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님의 업적을 기반으로 구성이 됩니다.〉
〈5시간 31분 뒤에 36층으로 전이됩니다.〉
감각을 되찾은 직후로부터 34층을 클리어하기까지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단지 감각을 잃었다는 점 때문에 시간이 오래 소모됐을 뿐이지, 34층의 클리어 미션 자체만 보자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휴게 공간도 도착한 직후, 나는 몸을 침대에 던졌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도 불구하고 온몸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대로 눈을 붙이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어린이용 튜브를 몸에 낀 둘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튜브는 어디서 났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치.
녀석의 모습에 나는 너스레를 지으며 말했다.
“혼자 들어가서 씻어도 돼. 입욕제도 써도 되니까. 대신에 깨끗이 씻어.”
34층에서 약속한 대로 허락해주자, 둘리는 빙그레 웃으며 물안경을 눈에다가 끼웠다.
“한별, 고맙다! 나 정말 깨끗이 씻고 나올 거다! 그럼 간다!!”
내 허락에 둘리는 싱글벙글거리며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사소한 행복을 만끽 뒷모습에 나는 외쳤다.
“얌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알았따!”
“대답은 우렁차게 하네.”
근데 진짜 저 물안경은 또 어디서 난 거지?
나는 잡념을 뒤로하고는 냉장고에 손을 뻗어 탄산음료를 꺼냈다.
치이익! 딸깍!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뚜껑을 따자, 새하얀 김이 올라오며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탄산이 흘러 넘치기 직전에 나는 서둘러 입을 대 음료수를 마신 후,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울대를 타고 흘러가는 짜릿한 탄산과 달콤한 맛의 조화.
꿀꺽꿀꺽,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전부 마시곤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캬, 이거지.”
나는 입가를 훔치며 빈 깡통을 손으로 찌그러뜨렸다.
탑을 등반하면서 유일한 쾌감이라면 휴식 공간에 와서 침대에 걸터앉은 채,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항상 문명의 이치가 얼마나 소중히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베개에 등을 받힌 채, 버릇처럼 커뮤니티를 둘러봤다.
“딱히 이슈는 없나 보네.”
나는 커뮤니티를 확인하다 말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가장 많이 등반한 탑의 최전선은 36층이다.
현재 내가 있는 층은 35층, 탑의 최전선으로 가기까지 단 한 걸음만 남긴 상황이다. 당연히 최전선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플레이어의 숫자도 피라미드 구조처럼 점점 줄어든다.
따라서 내 이목을 끌만한 주제는 없는 게 보통이었다.
‘다른 주제라고 해봤자, 이미 등반한 층이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의 뻘글을 보다 말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까. 36층의 컨셉은 뭐지?”
음… 다른 층들의 컨셉이면 들어봤어도, 36층의 컨셉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36층은 벌써 몇 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클리어를 못 하고 있다고 듣긴 했었다.
게다가 30층을 넘어서 발생한 사상자도 가장 많이 발생했다지.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초반 층이면 몰라도 30층을 넘어선 플레이어라면 경험, 실력, 연줄을 통틀어 뛰어난 실력자이기 마련이다.
대형 길드의 간부 또한 있을 텐데.
그런 정예들이 모여도 몇 년째 클리어하지 못하고 있다니.
여러모로 묘한 상황.
이에 대해서도 커뮤니티에서 궁금증을 가지는 모양이지만.
‘아마도 모종의 이유로 윗선에서 함구하는 모양이겠지.’
36층은 대형 길드가 자리 잡은 곳이다.
그들이 주도로 플레이어의 입막음을 했다면 그 이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채아도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적어도 그런 일에 가담할 성격으로 아닌 거 같았는데.”
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기에 나는 머리 한켠으로 치웠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으려는데, 욕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어린이용 튜브와 물안경, 호흡기까지 풀장착한 둘리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 모습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욕실에 들어갔을 텐데, 왜 행색은 해수욕장에서 볼 법한 복장이야?
할 말을 잃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둘리는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 씻었다! 한별도 들어가서 씻어라!”
그 말을 끝으로 둘리는 몸에 걸친 것을 허물 벗듯이 벗은 다음에 침대에 뛰어들려 했다.
나는 공중에서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채곤 한숨을 푹 쉬었다.
“침대에 올라갈 땐 몸부터 전부 닦고 올라가.”
“아! 헤헤, 까먹고 있었다. 빨리 닦을 거다!”
땅바닥에 내려놓자, 둘리는 세면대 앞에 가서 수건으로 몸을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둘리를 뒤로 하고 씻기 위해 움직이던 그때였다.
〈31층~35층의 보상이 전부 집계되었습니다!〉
〈곧바로 보상이 집계됩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창을 본 것은.
‘보상?’
나는 벗어놨던 옷을 주섬주섬 꺼내입었다.
아, 그러고 보니 보상을 집계한다고 지급이 늦어졌는데 지금 지급되는 건가.
〈보상으로 휴게 공간에 하늘 공원이 설치됩니다!〉
〈최초 획득자 보상으로 특전이 지급됩니다.〉
다시금 떠오른 시스템창과 더불어 휴게 공간 전체를 비출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 일어났다.
이윽고 눈을 뜨자.
모락모락한 연기가 발밑에 생겨남과 동시에.
방 한켠에 현관문이 생겨났다.
새로 보는 문.
‘보상이 이건가?’
그래도 명색이 31층에서 35층까지 클리어 한 보상으로 휴게공간의 넓이가 넓어진 것으로 끝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탑이 막장이라고 해도 보상 하나에서만큼은 실망을 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이 문 너머에 있다는 것이겠지.”
사뭇 긴장한 웃음을 지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존재였다.
나는 하늘 공원으로 향하는 문고리를 붙잡고는 있는 힘껏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강렬한 빛이 시야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