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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09화 (109/175)

제109화

나는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색에 빠졌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게 시스템에서 정의한 흑막의 소행이라면 분명 놈 역시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원래 범인은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소행을 꾸민 흑막이라면 자신이 벌인 일을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날 터.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나와 눈을 마주친 천사는 겁에 질린 듯 떨다가 황급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천사의 움직임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속도.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시스템에서 정의한 흑막은 바로 저놈이라는 것을.

고민은 짧았다. 서둘러 둘리를 목덜미를 낚아채며 외쳤다.

“저놈이다. 둘리야 빨리 잡아.”

“알겠다!”

대답과 동시에 성체화를 한 둘리.

나는 둘리의 등에 매달린 채, 저 멀리 도주하는 천사를 바라봤다.

놈이 얼마나 빠르고 잽싸다고 해도 성체화 한 둘리를 떨쳐낼 순 없다.

역시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둘리의 발톱이 놈의 날개를 짓이기기 직전, 천사는 공중에서 재주 넘기를 하며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이윽고 6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자 은빛 깃털이 이쪽을 향해 비수처럼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린 강력한 일격.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상당한 공격이었으나 나는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어.”

처음 겪어 보는 거라면 모를까. 어둠의 정기와의 전투를 통해 놈의 실력은 뻔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당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둘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 안 통한다!”

간만에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생각에 기쁜 모양인지 둘리는 가볍게 날개를 휘둘러 폭풍을 일으켰다.

은빛 깃털은 폭풍 속에서 무력화되어 지면을 향해 나가떨어진다.

둘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켠다.

화르륵!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상당한 열기와 함께 둘리가 숨을 뱉자, 모든 것을 불 싸지르는 흑염이 부채꼴 모양으로 방사된다.

물밀듯 쏟아지는 흑염에 천사의 눈은 아연해졌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결심이라도 한 듯 정면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날개로부터 깃털이 우수수 빠지며 상당한 규모의 허리케인을 일으켰다.

은빛 깃털이 난무하는 허리케인과 흑염이 맞부딪치며 후끈한 열풍이 몰아닥친다.

“으아아아악! 이, 이렇게 질 순 없어!”

그녀는 악을 내지르듯 비명을 토해냈다. 강렬한 염원이 영향을 미쳤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케인의 위력은 점차 강해졌다.

하나 그뿐이었다.

“흥!”

둘리가 콧방귀를 뀌자, 흑염은 허리케인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방금 전의 줄다리기가 무색하게도 섬광이 일어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과정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과는 달랐다.

전과 비교해 상처 없이 멀쩡한 상태의 둘리와는 달리, 단 한 방을 막았을 뿐인데 천사는 산발이 된 채로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완전히 상반된 결과.

“오, 그래도 이걸 막았네?”

그 모습에 나는 순수한 감탄사를 냈다.

한 방이라곤 해도 성체인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내다니, 종족의 차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내 감탄사를 조롱으로 들었는지 천사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아, 이걸 이렇게 오해하면 곤란한데.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그녀는 열의를 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질 것 같아!”

얼핏 보면 악에 받은 모습.

그녀의 주변으로 강력한 마나 폭풍이 몰아친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놈의 행동에 둘리는 다시금 브레스를 뿜기 위해 준비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내려는 작정.

하지만 저 상태의 천사라면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은 못 막는다.

나는 그렇게 그렇게 판단하고는 둘리의 앞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적당히 하고 붙잡아. 일단은 알아낼 것도 있으니까. 딱 반항하지 못할 수준까지만.”

알지?

내 물음에 둘리는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녀석은 손톱으로 천사의 날개를 꿰뚫었다.

아리따운 6쌍의 날개가 한데 모여 손톱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모습을 뭐랄까.

‘꼬치? 아니면 통다리?’

왜 떠올려도 이런 것밖에 안 떠오르지.

다소 미안한 일이었지만, 천사의 행색을 보고 머릿속에서 연관되는 것은 그런 것뿐이었다.

나도 많이 피곤했었나 보네.

그렇게 나는 애써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곤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래서 네가 흑막이지?”

“흑막?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내 물음에 천사는 인상을 구기며 되묻는다.

적당히 모른 체하며 넘어가려는 속셈인가?

아니, 그러기엔 정말로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곰곰이 생각하기도 잠시, 문득 떠오른 사실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흑막이라는 말을 정의한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을 통한 것이다. 그래서 흑막이라고 질문을 던져선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질문을 바꿨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이번에 일어난 일, 네가 꾸민 일이지?”

“……” 더욱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천사는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니까, 그냥 아무런 대답도 안 하겠다는 건가. 미안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추잡한 수는 안 통한다.

당장에라도 이터의 권능이나 재액의 가면을 사용해 놈의 기억을 복사하는 건 금방이니까.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그녀는 입술을 떨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흐흐, 그분의 말씀은 전부 옳았어!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이지 않고 힘을 취할 수 있다. 네가…… 네놈만 없었다면 나는…… 아니 우리 일족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는데.”

천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분이라는 말에 의아스러웠지만, 이내 알아챌 수 있었다.

‘어둠의 정기를 말하는 건가.’

어쩐지 이전에 상대할 때와 비교해 더 강해졌다 싶었는데, 놈이 행했던 방식대로 모비딕의 힘을 취해서 쌓아 올린 힘이었나.

하지만 그건 거짓된 힘이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타인의 힘을 강탈하는 형식은 더 볼 것도 없지.

따지고 보면 이터의 권능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도, 이터는 사냥한 상대의 힘을 취하는 방식.

같은 것처럼 보여도 본질이 다르다.

“그래서 천사들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다른 희생은 상관없다고?”

“그깟, 하계종 따위 우리들의 힘이 될 수 있다면 오히려 복에 겨운 거지.”

그녀의 사고방식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전과 같이 어둠의 정기에게 세뇌당한 상태였다면 또 몰라. 그것도 아니라 그저 심취한 결과가 결국 저 꼴이라니.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었다.

미안하게 됐지만…… 아니, 딱히 미안해할 것도 없나? 32층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죄 없는 자를 학살한 놈의 굴레를 끊는 일이니까.

내가 검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사색이 된 채로 내게 다가왔다.

“자, 잠깐만!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이제 와서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녀의 목을 날랐다.

투툭! 투투둑!

그녀의 머리는 지면을 굴러 내 발밑에 떨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조차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자의 말로.

차라리 그 신념의 방향성이 제대로 됐다면 몰라도, 이렇게 된 이상 정해진 결말이었다.

원한은 원한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여기서 내가 처단하지 않았다면 원한을 지닌 다른 이가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게 피해자인 모비딕이 됐든, 그녀와 같은 동족이 됐든, 혹은 제삼자가 됐든 말다.

그녀의 숨이 끊어지자, 시스템이 눈앞에 떠올랐다.

〈흑막을 제거하셨습니다. 따라서 33층이 클리어됩니다.〉

〈곧이어 34층으로 이동합니다.〉

〈보상이 집계 중입니다.〉

“바로 다음 층으로.”

곧바로 34층으로 이동하겠다는 내 대답과 동시에 하늘에서 새하얀 섬광이 떨어졌다.

* * *

〈34층에 도착하셨습니다.〉

34층에 도착하자마자, 알림창과 함께 밝은 섬광이 가셨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번 층은 사막인가?”

내가 도착한 장소는 푸른 수풀이나 물은 전혀 찾아보기 힘든 사막의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따가운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

게다가 더운 모양인지 멀리 떨어진 곳은 복사열로 인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보기만 해도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더위였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주변 풍경이나 상황을 봐도 엄청나게 더운 게 확실할 텐데…

‘왜 아무 느낌도 없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도 살이 따갑지 않으며 후끈한 더위는커녕 모래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무의식에 고립된 것만 같은 기분.

아무리 내가 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고 한들 이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둘리도 나와 같은 상황인가 싶어,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으으으, 한별… 너무 덥다…….”

둘리는 혀를 내민 채로 모래 위에 쓰러져 있었다.

녀석이 더위에 쥐약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 하지만 둘리가 저러고 있다는 뜻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상당한 더위라는 것인데… 설마.

“나만 더위를 못 느끼는 건가.”

그렇다면 왜?‘

그 이유를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클리어 조건: 15일간 생존하거나 사막을 탈출하시오.〉

〈모든 장비가 해제되며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차단됩니다.〉

※ 주의하세요! 감각이 차단된다고 해서 육체가 고통이나 아픔에서 차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했었는데 간단하네.

이곳에서 15일간 버틸 바에는 사막에서 탈출하는 게 더 빠르리라.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몰라도 내 기동력을 이용하면 사막을 탈출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나는 둘리를 등에 업고는 중얼거렸다.

“일단 북쪽으로 빨리 빠져 나가볼까.”

북쪽이 아니라면 다시 되돌아와서 다른 방향을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결론을 지은 뒤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등에 업힌 둘리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 한별, 거긴 동쪽이다.”

“어?”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라고?

둘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스템에서 언급한 감각이 생각보다 넓은 범위로서의 감각을 뜻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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