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나는 검을 갈무리하며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터의 권능이 검에 은은한 막을 두르듯이 코팅되어서 그런지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도 팔의 부담이 덜했다.
만족하며 검을 집어넣으려는데,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잔뜩 상기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흐으흑, 히끅. 신협께서 안 계셨다면 정말 죽을 뻔했어요.”
“정말로 신한별께서 이 자리에 안 계셨다면 저희는 어떻게 됐을지…….”
플레이어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당장에라도 신협단에 투신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
그러기에는 이미 늦어 보이는 면면도 보였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설 거라면 최대한 막아두는 편이 낫겠지.
나는 플레이어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조언을 건넸다.
“그… 혹시나 싶어서 이야기해두는 건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말고.”
“옙! 물론입니다! 신협이 살려주신 목숨인데 당연하죠! 평생 믿고 따르겠습니다!”
“…아, 그래.”
밝다 못해 광기마저 언뜻 보이는 눈빛에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배려한다고 최대한 둘러 말했는데, 내가 보기엔 저건 이미 글러 먹은 거 같아.
나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마법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아마 저쪽에서도 내가 공격을 막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도 못하고 당황하는 중이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새끼들은 뭐 하는 놈들이야.”
모비딕이라고 거창한 이름이래서 뭔가 대단한가 싶었는데, 이거 다시 보니까 순또라이들이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이만한 마법을 퍼붓는다고?
만약에 날 자극하는 게 목표였다면 목적 하나는 제대로 이룬 셈이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한 번 당했으면 갚아주는 게 예의지.”
은혜는 두 배로, 그리고 원수는 열 배로.
조용히 나직이고 있자, 옆에 있던 둘리가 물음을 건네왔다.
“그런데 한별 궁금한 게 있는데 은혜는 두 배이면서 왜 원수는 열 배나 되나? 똑같아야 하는 게 아닌가?”
“원수는 외다리 나무에서 만날 정도로 흔하지만, 은인은 흔하지 않잖아.”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딴지를 걸어왔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내 답변에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둘리.
그야 알아먹지 못한 게 당연한 거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내뱉은 거니까.
나는 지면을 박차고 모비딕을 향해 다가갔다.
덩치가 거대해서 그런지 놈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져 갔다.
서로가 선명하게 보일 거리까지 다가가자, 깜짝 놀란 듯한 모비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뭣이?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분명히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천사 놈들이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제기랄! 이번에도 벌써 다섯 번째라고, 어떻게든 천사 그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 한다!”
내 얼굴을 확인한 모비딕은 눈에 띄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기도 잠시, 그들은 잔뜩 분노한 듯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천사라고? 천사가 여기에서 왜 나와?’
저들은 나를 천사로 오인해서 벌어졌던 일인 건가?
그렇다면 왜?
물론 천사들에 의해서 모비딕이 착취당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나 그건 어둠의 정기가 원인이 되었기에 벌어졌던 상황.
하지만 저들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아직까지도 그런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도 흑막을 제거하는 거였지.’
처음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는데, 썩 좋지 않은 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번 층은 32층과의 연계층, 어쩌면 32층과 관련해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흉인 어둠의 정기는 내가 지니고 있는데?
혹시 어둠의 정기로 인해 아직까지도 세뇌된 잔재가 남아 있는 건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으나 어찌 됐든 간에 알 도리는 없었다.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모비딕 중 한 명이 앞으로 다가와 사과 인사를 건넸다.
“저, 정말 미안하다네! 내 동료가 착각을 해서 벌어진 일일세. 절대 악의적인 의도는 없는데… 이렇게 사과하겠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를 건네는 모비딕.
나는 놈을 향해 차갑게 식은 얼굴로 되물었다.
“아까 전에 하던 얘기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
* * *
방금 전의 사태가 일단락된 직후.
모비딕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앞섰지만, 내가 꺼낸 의미심장한 말이 걸린 모양인지 그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둥지에 안내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나는 모비딕의 왕 앞에 섰다.
“그러니까. 자네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가?”
“그래.”
“무슨 근거로 말이지?”
장로라고 불린 모비딕은 꽤나 쌀쌀맞은 태도로 되물었다.
그러기도 잠시, 그는 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우리 동포가 자네에게 한 행동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거리는 없다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지. 이건 우리들의 일이라네. 그렇기에 더더욱 외부인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것… 그건 이해해주게나.”
다른 이들의 위에서는 자의 자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중함.
어떻게 보면 더할 나위 없는 태도였지만, 그 속에는 더 이상 파고들지 말라는 가시가 숨어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언제 목을 찌를지 모르는 흉기가.
확실히 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족의 일에 부외자가 끼어들면 되려 혼란을 일으키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
게다가 부외자는 정체도 모른다. 어느 정도 경계시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관련이 있다면?”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이번 일에 내가 관련이 있다면 어쩔 건데.”
콧방귀를 뀌며 되려 차가운 말투로 되묻자, 분위기는 얼음장과 같이 쩌저적 굳었다.
삽시간에 기울기 시작한 분위기는 다시 갱생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부터 강력한 마력 폭풍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모비딕이 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망발을……!”
“감히? 그러는 넌 감히 뭔데,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고 있어.”
“……!”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내가 나서서 쏘아붙이자, 놈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언짢은 기색을 내보였다.
“진정하게나. 크흠… 우선 사과하도록 하지. 아무래도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일족 전체가 좀 민감해져 있어서 말일세. 그런데 자네가 관련되어 있다는 그 얘기. 그건 책임질 수 있는 말이겠지?”
장로의 안광이 붉게 번뜩이는가 싶더니, 숲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오죽하면 방금 전에 나섰던 모비딕조차 새파랗게 질린 채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
태생부터 강력한 마나를 지닌 모비딕도 멀쩡히 버틸 수 없는 압박감이다.
그보다도 신체가 허약한 인간이라면 두 발로 버티긴커녕 기절하기엔 충분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으로 장로의 기운을 걷어냈다.
단 찰나.
한순간에 이 자리를 가득 메꾸고 있던 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광경에 장로는 물론 모비딕 역시 눈을 번쩍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저런 힘이…….”
“적어도 장로님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라니 이 무슨…….”
“장, 장로님!”
내가 지닌 힘의 편린을 본 모비딕은 눈을 번쩍 뜨며 넋을 잃었다.
그들의 태도에 장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그쳤다.
“호들갑 떨 것 없다. 저쪽도 대화하러 온 입장이니 중심을 지켜라.”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던 분위기도 장로의 한마디에 일단락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장로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책임? 그런 사소한 것에 사로잡힐 거였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어.”
“그렇군. 인간이 무위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심계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군.”
“그런 시답잖은 헛소리나 할 거면 됐고.”
나는 장로의 말을 무시하며 포켓에서 어둠의 정기를 꺼내 들었다.
단번에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장로는 눈을 번쩍 뜨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 그걸 어떻게! 설마 자네가…….”
“뭐, 이거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장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내 눈과 마주쳤다.
“그렇군. 자네라면 자격으로는 충분하겠지.”
그는 침통한 얼굴로 어금니를 짓씹으며 말했다.
“공중 도시가 몰락한 지도 어엿 30년, 아직도 천사들에 의한 모비딕의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네.”
30년.
그의 말대로라면 이번 층은 저번 층으로부터 30년이 경과한 세계라는 뜻이었다.
“…어째서?”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네. 천사들의 본성은…….”
내 물음에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잇기 직전이었다.
쿠우우웅!
갑작스레 숲 전체가 진동하는가 싶더니, 숲의 한쪽에서부터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났다.
도저히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불길.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 나가 상황을 파악한 모비딕은 다급히 날아오며 외쳤다.
“장로님! 습격입니다! 천사들이 숲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어, 어떻게 여길 찾아낸 거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선 놈들을 막는 게 먼저다! 장로님 어서 명령을!”
“내가 직접 나서서 출전할 테니, 어서 준비하도록 해라! 더 이상 당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놈들의 간악한 행위를 저지해라!”
“넵! 알겠습니다.”
장로의 명령에 모비딕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숲의 외각에서는 격렬한 전투에 벌어지는 모양인지, 치열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는 바깥을 의식하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분명 신한별이라고 했던가.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빛냈다.
“됐어, 이제 설명은 필요 없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게다가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흑막을 찾아 처리해야 한다.
오히려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