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06화 (106/175)

제106화

〈33층으로 이동합니다.〉

〈클리어 조건: 흑막을 제거하시오.〉

내내 시야를 암전하던 어둠이 가신다.

마치 깜깜한 통로 속을 걸어가다가 그 끝에서 새하얀 빛무리를 발견한 듯한 느낌.

처음에는 반딧불이 정도로 작았던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찌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시발! 아, 뭔가 싶었는데 꿈이었나.”

묘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축축한 감촉에 방금 전에 내찌른 주먹을 내려다보자 상당한 피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다급히 몸을 확인해봤지만, 다행히도 내 몸에 부상은 없었다.

‘그럼 이건 누구 피……’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문득 떠오른 허전함에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항상 다음 층으로 이동하면 옆에 따라오던 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자켓 안을 들춰봤는데도 둘리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주먹을 내찔렀을 때, 감촉이 있었던 거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에이… 설마?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불행인지 행운인지는 몰라도 내 예감은 정확히 적중하고 말았다.

이쪽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로부터 둘리가 피멍이 든 채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서둘러 포션을 따서 뚜껑 채 둘리의 몸에 들이부었다.

막강한 회복력으로 둘리의 상처는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으윽… 하, 한별?”

“어, 맞아. 무리는 하지 말고 천천히…….”

“한별 큰일 났다! 머리를 맞아서 기억이 흐릿하긴 한데… 분명 엄청 강한 괴수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괴수라니?”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괴수한테 머리를 맞았다! 엄청난 속도였다! 분명 어딘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별도 조심해라!”

둘리야 미안, 사실 그거 괴수가 아니고 나야.

다소 양심에 찔렸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여기에서 진실을 밝혔다간 나중에 둘리한테서 뭐라고 비난받을지 몰라서.

때론 선의의 거짓말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대신에 다음 휴게층에 가면 훈련도 없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수 있게 해줄게.’

나는 둘리의 어깨를 붙잡으며 굳게 다짐하곤 입을 열었다.

“진정해. 괴수는 내가 쓰러뜨렸으니까. 안 나타날 거야.”

“우와아아, 벌써 둘리의 복수를 한 것인가? 역시 한별 믿고 있었다!”

“그, 그런 셈이지.”

아, 진짜 미안.

그래도 진실을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순수한 눈빛을 보니까 쉽사리 입이 안 떼진다.

그렇게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때쯤이었다.

파아아아앗!

강렬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에서부터 수십 발의 빛기둥이 떨어졌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력을 잃을 것만 같은 광량.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광경일지 몰라도 저 현상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나는 안색을 굳혔다.

“플레이어?”

저 빛기둥은 플레이어가 층에 도착하면 생기는 현상이다.

한두 개면 대충 넘길지 몰라도 그런데 저만한 숫자라니?

게다가 빛기둥이 일어난 위치는 제각각으로 아무래도 랜덤한 위치에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아스러워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오른 것은.

〈신한별 플레이어의 영향으로 32층의 인과율이 변경됨으로서 32층의 모든 플레이어가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보상이 집계 중입니다.〉

“아, 그런 거였나.”

어쩐지 단체 미션이 아닌 개인 층인데도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전원 이동되나 싶었다.

시스템에서 말하는 인과율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까지 포함해 보상을 쳐준다면 나쁠 건 없겠지.

플레이어들이 소환된 위치는 제각각이었으나, 우연의 일치인지 내 주변에도 빛기둥이 떨어졌다.

‘셋… 아니, 네 명인가.’

눈으로 숫자를 세고 있을 무렵.

멍하니 빛기둥을 바라보던 둘리는 안색이 안 좋아지는가 싶더니, 지레 겁 먹은 얼굴로 내 등 뒤에 숨었다.

갑작스러운 녀석에 모습에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으으,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든다!”

“어떤 게?”

“잘 모르겠다! 근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제대로 된 말도 안 해준 채, 흠칫 떠는 둘리.

녀석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빛기둥의 섬광이 가시는가 싶더니 이내 그 안에서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

하긴 나도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들은 32층의 클리어 조건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다음 층으로 전이 당한 셈일 테니까.

“어, 서준 씨?”

“어라? 너도 33층이었어?”

“그러고 보니 나도 시스템에서 다음 층으로 이동한다고 연락이 왔던데…….”

그들은 서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 흔히 있는 어색한 기류는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머릿속에서 의문이 생겼지만, 그런 의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하긴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탑의 초반이면 몰라도 여긴 33층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탑의 상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플레이어의 숫자는 피라미드 구조처럼 현저히 줄어든다.

지금까지 가장 높게 올라간 층은 36층이니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 등반한 플레이어 중에 서로 안면이 없으면 그편이 더 이상하리라.

여기까지 와서 아싸인 플레이어의 부류를 둘로 나누자면.

‘다른 플레이어한테서 단단히 찍힌 놈이거나 그게 아니면 상당한 별종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문득 웃음꽃이 피어나는 목소리가 끊겨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아는 사이인데 부외자가 있어서 그런 건가?

여기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면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다.

‘적당히 말이라도 하는 게 낫겠지?’

간략하게 자기소개부터 하려는데,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호, 혹시 신한별이 맞으신가요?”

괜스레 긴장한 듯한 얼굴에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람하고 동일 인물인진 몰라도 내 이름이라면 신한별이 맞는데 그건 왜?”

“내 말이 맞았지? 신협이 맞으시다니까!”

“……히이이이익!”

“와! 사진보다도 실물이 더 잘 생겼어요!”

“싸인! 싸인 한 번만 해주세요!”

중간에 이상한 의성어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인과 사진을 찍었다.

커뮤니티에서 유명하단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반응할 정도인가?

그런 의문을 지니고 있는데, 아까 전부터 묘한 소리를 내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거친 숨소리와 홍조를 띤 채 다급히 외쳤다.

“하,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저희들이 32층에서 이동한 건 혹시 신한별께서….”

“어, 맞아. 내가 했어.”

“히이익! 믿고… 믿고 있었어요!”

“잠깐만… 얘! 괜찮아? 왜 쓰러지고 있어. 워, 원래는 이런 얘가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하하.”

아까 전부터 계속 이상한 의성어를 내던 여성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

설마 저번 층에서 괴수한테 당해서 외상이라도 입은 건가 걱정을 했는데.

그녀의 가슴팍에서 슬쩍 보인 타투에 순간 뇌정지가 왔다.

분명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라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타투를 많이 새겨넣는다고 들은 거 같긴 한데, 저 타투 왠지 모르게 눈에 익은 건 내 착각이겠지?

왜 타투에서 내 얼굴이 보여?

시발, 이거 뭔가 느낌이 쎄한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신협단…… 그 미친놈들이 그렇게 흔하겠어.’

그것도 랜덤하게 떨어진 장소에서 나와 신협단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무슨 말이 커뮤니티에서 나돌아다닐지 몰라서.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의식을 해서 그런지 방금 전까지 나한테 사진과 싸인을 요구했던 플레이어들도 의심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렇게 서둘러 몸을 옮기려던 도중이었다.

콰아아앙!

갑작스레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뭐지?”

“이건…… 엄청난 마력이에요.”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자 플레이어 중 마법사로 보이는 여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비록 마법사가 아니라 마력에 대한 감응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감에서도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치 폭풍과 같은 마력이다.

저층의 플레이어 같았으면 혼란스러워했을 텐데 신협ㄷ… 아니 플레이어들은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력은 점점 가까워져 갔고.

이윽고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실루엣의 정체를 알아본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래?”

“……고래? 저건 고래가 아니라 모비딕이에요. 도대체 저만한 존재가 어째서 여기에….”

“고ㄹ… 아니, 모비딕은 원래 말 못 하는 동물 같은 게 아니었어?”

“네? 에이, 그럴 리가요. 모비딕이 얼마나 고등 생물인데요. 특히 마법 쪽으로는 상당한 힘을 지닌 존재에요.”

마법사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32층에서 만났던 모비딕과는 전혀 다른 사실.

혹시 몰라 다른 플레이어의 반응을 살펴봤지만, 아무래도 나만 모르던 사실인 것 같았다.

하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만한 존재가 왜 살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냐는 것.

그러던 중이었다.

씌이잉!

멀리서부터 강력한 기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모비딕의 앞으로 5중으로 되는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것도 막강한 에너지.

그 앞에선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플레이어들조차 당혹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미친, 마법진이 5개라고? 미친, 저걸 어떻게 막으라고!”

“내가 어떻게 33층까지 올라왔는데… 어떻게든 피해! 피하면 될 거야. 그러고 보니 너도 마법사잖아. 어, 어떻게 궤도를 바꾸거나 할 순 없어?”

“이…… 이제와서 피하기에는 늦었어. 저 정도의 위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막는단 말이야.”

“아니, 막을 수 있어.” “골리엇을 데리고 와도 못 막는 거물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데.” 플레이어들은 야단법석을 떨며 당황한 기색을 내보인다.

그들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마법을 향해 걸어갔다.

확실히 엄청난 위력이다.

적어도 이번 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격.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이해타산에는 맞지 않지만, 저들이 이곳에 떨어진 원인도 어떻게 보면 나한테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서비스 정도야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검을 빼 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휘말리는 것까진 책임 안 지니까. 알아서 몸 챙겨.”

“시, 신협? 그게 무슨 뜻이에요? 골리엇조차 못 막는 건데 어떻게 막으시려고….”

“난 한 번만 말해.”

못 들었으면 별수 없네.

나는 검에 이터의 권능을 담아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마법을 베었다.

검의 구결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진 마법은 구름을 갈랐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하며 검을 털어내자, 뒤에서부터 숨이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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