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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02화 (102/175)

제102화

뭐, 그건 그렇다 쳐도.

나는 시선을 돌려 시스템창을 바라봤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은 천사들의 신임을 얻는 것.

꽤나 고리타분한 내용이었지만, 내 관심을 사로잡은 내용은 그 밑에 있었다.

〈※ 주의! 여건에 따라 조건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변경될 수도 있다.

어쩌면 단순히 넘어갈 문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작질을 부렸네.”

“수작질? 고작 조건이 바뀌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한별?”

조용히 내뱉은 말에 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고작이라.

하긴 탑과 직접 대립해본 경험이 없다면야 단순히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탑의 민낯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층의 클리어 조건이 변경된 적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제삼자가 층에 관여했을 경우.”

지금까지 클리어 조건이 변경된 경우는 모종의 사건으로 정해진 인과율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층의 관리자가 직접 시나리오에 간섭했을 때밖에 없었다.

따라서 시스템의 경고대로 조건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뜻은 곧.

‘탑의 시스템에 간섭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뜻이겠지.’

물론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지레 겁을 먹거나 할 일은 없다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주의해서 나쁜 것도 없다.

나는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밌겠네.”

“재밌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한별의 말대로면 제삼자가 끼어드는 거라면 오히려 안 좋은 거 같은데?”

도저히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짓누르는 둘리.

필사적으로 내 의도를 알아차리려 노력하는 모습에 옅은 웃음기를 입가에 띄우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래서 아직 어리다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면 쓰나.

“그래서 좋은 거야.”

“어… 그런 건가?”

“탑이 의도한 대로 정해진 규칙 그대로 따라 움직이면 그게 꼭두각시가 아니면 뭐야. 그런 걸 두고 세상에서는 호구라고 불러.”

안타깝게 된 일이지만, 언제까지고 그 장단에 맞춰 놀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 원흉이 탑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이 정도면 잘 풀어 설명해줬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둘리는 콧방귀를 흐응! 내뿜으며 순수한 웃음기를 지어 보였다.

“……아! 역시 둘리는 잘 모르겠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에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답답할 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앞장서면 둘리가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건 항상 있었던 일이니까.

적당히 사물에 비유해서 설명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썩 떠오르는 것도 없었기에 이내 관두기로 했다.

“일단 저기로 가야겠지.”

목적지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시선이 향한 장소는 바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공중 도시.

지금으로서는 32층의 구조에 대해서 알 방법이 없다.

적어도 움직이기 위해선 정확하고 믿을만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의 질과 양을 위해 고도의 문명이 발전했으며,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는 저곳밖에 없었다.

‘신협단을 자처하는 플레이어들이 얼마 전에 저희 도시에서 난동과 테러를 일으켰거든요. 그 일 때문에 도시에는 안 들어오시는 걸 추천해요. 등반자에 대한 민심이 떨어질 때로 떨어졌거든요.’

문득 일전에 천사가 건넨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단순히 꺼낸 말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커뮤니티를 확인하니 놀랍게도 천사의 말은 진짜인듯했다.

- 아니 씹;; 신협단 도대체 32층에서 무슨 짓 일으켰음??

⤷ 나도 천사들한테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뺏기고 쫒겨남

⤷ ㅋㅋㅋㅋㅋㅋ 이건 뭐냐 노숙자 메타냐

-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 ^^ㅣ발, 그래서 책임을 왜 우리가 지냐고요

- ㅋㅋ 현실 갱 마렵네

- 물건만 뺏기면 다행이지? 난 천사들한테 뚜까 맞음

⤷ 오오, 오히려 좋아. 업계 포상

⤷ ??: 일류는 즐긴다

- 32층? 딱 기다려 지금 올라간다.

“정말인가 보네.”

물론 평소처럼 이상한 댓글도 달려있긴 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도 겪은 모양인지 커뮤니티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정말 이럴 때 보면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된다니까.

아무튼 목적지와 목적도 정해졌고 위험성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적지에 ‘어떻게’ 잠입하냐는 것뿐.

천사에게 들키면 공공의 적이 될 게 뻔했다.

솔직히 말해 둘리와 함께라면 천사들에게 들키든 말든 별 상관없을 거 같긴 한데.

‘요컨대 중요한 건 천사들한테 안 들키면 되는 거잖아.’

나는 천사가 떨어뜨린 깃털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남들을 속이는 거라면 내 전문 분야지.”

간단한 일이다.

* * *

파팟!

새하얀 인영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빠른 속도로 횡보한다.

비호와 같이 내달리던 인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의 옥상에 착지했다.

은빛이 인상적인 세 쌍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이 바람으로 인해 휘날리며 푸른 장천 위를 수놓는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깃털은 눈의 결정을 연상케 하며 한 폭의 장관을 이루었다.

그런 가운데, 건물의 옥상에 서 있던 인영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무심히 뜯어냈다.

쫘악⎯!

쓰고 있던 가면이 벗어지자, 천사의 외형을 하고 있던 형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와씨, 다신 날갯짓을 하나 보자 더럽게 어렵네.”

나는 재액의 가면을 벗어던진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중 도시에 잠입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공중 도시에서도 가장 높은 장소.

참고로 덧붙이자면 정체를 들킬 위험을 대비해 둘리는 성밖에 두고 왔다.

물론 혼자 있으면 심심하다고 찡얼거리는 걸 달랜다고 고생이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듣자 하니 천사들은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예민하다고 하니 이를 통해 수상스럽게 여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뭐, 그래도 눈요기로는 괜찮네.”

나는 주변을 슥 훑어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천사족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하나부터 열까지 새하얀 건물들은 영롱함을 넘어 경건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경관을 보며 감탄하기도 잠시, 나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원래 계획은 천사의 얼굴을 이용해 잠입하여 32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다.

하나 계획은 시작조차 못 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어째서 기억이 완전하지 않지.’

재액의 가면은 접촉한 타인의 외견을 복사함 동시에 상대방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아티팩트의 능력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을 터, 하나 무슨 이유에선지 천사의 기억은 엿볼 수 없었다.

더욱 확실히 말하자면 기억 자체가 영화의 필름처럼 단편적으로 조각나 있었다.

혹시 몰라서 다른 천사들 역시 접촉해봤지만.

“도시에 있는 천사 모두가 마찬가지였지.”

특이점이 있다면 모든 천사의 첫 기억은 동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건물을 내려다보며 입을 뗐다.

‘전부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기억이 시작되었단 말이지.’

마치 누군가가 의도한 것 같은 결과.

지금으로서 꼽을 수 있는 경우는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모종의 이유로 재액의 가면이 망가졌거나.

두 번째로는 천사라는 종족 자체의 체질이거나 혹은 아티팩트에 대한 면역을 지니고 있을 경우.

“혹은 제삼자가 개입했을 경우.”

나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간단하네. 모든 천사가 이 건물을 들렀다는 뜻은 곧, 제삼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바로 이곳이라는 뜻이다.

잘됐네, 귀찮게 여러 군데 뒤져볼 필요 없이 여기 하나만 족치면 된다는 거잖아.

고민은 짧았다.

허릿심에 힘을 준 상태로, 지면을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두른다.

콰아앙!

고막을 강타하는 폭음과 함께 가공할 만한 풍압으로 인해 잔해가 사방으로 휘날린다.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흙먼지를 걷어내자, 나타난 건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운 뼈대만 남긴 채 처참히 붕괴한 건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수상할 점 하나 없는 평범한 건물처럼 보일도 몰라도, 내 감을 속일 순 없다.

“눈을 속이는 건 누구나 하지.”

안타깝게 됐지만 속이려고 했으면 상대가 틀렸다.

거대한 크레이터, 그러니까 그 위를 가득 채운 잔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연보랏빛의 촉수가 잔해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직업:이터]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 모든 사물과 기운을 잡아 삼킵니다.

용의 머리와 같이 변한 촉수는 크레이터에 쌓인 잔해를 엄청난 속도로 흡입했다.

지면에 있는 모든 잔해를 집어삼키자, 그 밑으로 거대한 면적의 결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결계를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강력한 반발력으로 인해 팔뚝 채로 튕겨 나갔다.

31층에서 겪었던 미궁보다도 더 상위 레벨에 속하는 결계였다.

“저번처럼 무력으로 부수는 건 무리인가 보네.”

굳이 따지자면 못 할 것도 없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이터의 권능을 발동한 채, 다시 손바닥을 뻗자 보랏빛 섬광이 결계 전역을 잡아 삼켰다.

서로 다른 강기의 충돌.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충돌 끝에 결계는 깔끔하게 소멸했다.

그 순간!

파지지지직!

오른손에 새겨진 문신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이내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포켓 안을 확인해보자 일전에 손에 얻었던 [번개의 정기]가 손에 쥐어졌다.

결계의 너머로 가면 향할수록 번개의 정기는 더욱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일종의 공명 현상.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찾아왔나 보네.’

지하를 향해 점차 내려가자 넓은 공동이 나타났고, 그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나는 상대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많이 기다렸지? 또 만난 거 보면 이것도 인연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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