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니까 반갑긴 하네.
어쩐지 묘하게 안면이 익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당시에 하도 구타를 당한 덕분에 얼굴이 부어서 몰라봤나 보다.
내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자, 놈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자기 이름이 아닌, 예전에 ‘나한테 맞았던 놈’이라고 각인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원래도 새빨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검을 어깨에 가져다 대며 건들거렸다.
“반가운 건 알겠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 나한테 또 맞을 짓은 안 했어야지.”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원래 맞은 사람은 기억해도 때린 사람은 모르기 마련이거든.
그나마 나는 때렸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중에서도 양심이 있는 편이 아닐까.
피식 웃음을 짓자,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펠 공작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네놈…… 신한별 네놈만큼은 직접 내 손으로 죽이리다. 뭣들 하느냐 어서 움직이지 못할까!”
“네, 넵!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기로 가득한 펠 공작의 일갈에 휘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적 전력.
반면 이쪽의 전력은 나와 드워프의 국왕뿐.
“한별! 둘리도 같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섭섭하다!”
아, 참 둘리도 있었네. 눈치도 빠르다니까.
어쨌건 숫자로 따지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검을 들었다.
이 정도 상황이야 나한테 걸리면 별것도 아니다.
지면을 밟는 것과 동시에 검의 권능을 발동.
파아앗!
널리 퍼져나간 연보랏빛 섬광이 병사들의 몸에 스며든다.
원래라면 괴수들의 어그로를 끄는 권능.
당연한 이야기지만 검의 능력은 괴수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검의 권능에 현혹된 놈들에게선 일사불란한 정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분별한 살기뿐.
지휘권을 잃어버린 적들은 나를 향해 무식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히익!”
바로 뒤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새파랗게 질린 드워프왕이 있었다.
아, 하긴. 아무런 경험도 없는 사람한테는 충격이었으려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와 열을 맞춰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살기를 내뿜으며 우르르 몰려오니, 공포감을 느낄 만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거기서 보고만 있어.”
보면 안다.
나는 지면을 향해 검을 길게 그었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상당한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성된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공포감에 의해 주춤하기엔 충분한 상황.
하나 적들은 검의 권능에 의해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기에 누가 막을 새도 없이 크레이터 밑으로 나가떨어졌다.
여기에서 끝내면 섭섭하지.
“둘리야!”
“헤헤, 기다리고 있었다!”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름을 부르자마자 녀석은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짤막한 기합과 동시에 둘리에게서 시꺼먼 연기가 몽글몽글 뿜어져 나온다.
시꺼먼 연기가 공동 속을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이내 그 속에서 새빨간 안광이 번뜩였다.
날갯짓과 함께 공동을 가득 채운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거대한 크기의 블랙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저 허공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저릿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언제나 두툼한 살집을 자랑하던 둘리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저게 진짜지.”
항상 나한테 먹는 거로 구박당하고 맞아서 그렇지, 둘리의 본질은 드래곤이다.
먹이사슬의 정점이자 마나의 지배자라 불리는 최강의 종족.
평소에 하는 짓만 보고 가끔 애완용 돼지와 혼동해서 그렇지, 저게 둘리의 진면목이다.
“어! 한별이 개미만 해졌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고, 암튼 전부 작다!”
“제발 그 모습으로 혀 짧은 소리 좀 내지 마.”
“혀 짧은 소리가 아니다! 한별이 몰라서 그러는데 정말이다!”
그게 혀 짧은 소리가 아니면 뭔데, 그리고 제발 좀 닥쳐 줘.
여태껏 가지고 있던 드래곤에 대한 위엄이 뇌리에서 와장창 깨지는 기분에 나는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몸이 커졌다고 해서 자연스레 머리도 커지는 건 아닌가 보다.
둘리가 성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전부 S+급 아티팩트인 별꿀 환단의 효과 덕분이다.
물론 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시답잖은 잡담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둘리에게 손짓했다.
“다른 건 전부 됐으니까. 우선 저것들부터 처리해 봐.”
“알았다!”
내 명령에 녀석은 명랑하게 대답하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칠흑 같은 화염이 지면을 화르르 불태우자 병사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상황이 정리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조차 어쩌지도 못하는 드래곤을 병사들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나 있을까.
그렇게 얼추 정리됐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퍼엉!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둘리에게서 연기가 일어났다.
손으로 연기를 걷어내자 그곳에는 해츨링 상태로 쪼그라진 녀석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에헤헤,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는데 힘이 전부 풀렸다.”
“괜찮아. 그래도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니까.”
녀석이 성체화를 유지한 건 대략 5분 남짓.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대충 그 정도라고 여기면 되려나.
‘뭐, 앞으로도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처음으로 성체로 변신했을 때와 비하면 확실히 시간도 길어졌으니까. 이전에 비하면 긍정적인 상황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효과 하나는 확실하네.
그렇게 많은 병력을 브레스 한 방으로 처리할 줄이야.
만일 내가 움직였다면 귀찮았을 텐데,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둘리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과연 이만한 가성비가 있을까. 긍정적인 일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끝내야겠지.”
병사들을 쓰러뜨렸다고 해도 상황이 전부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아직 중요한 놈이 하나 남아 있잖아.
나는 지면을 지르밟고는 펠 공작의 흔적을 찾아 뒤쫓았다.
둘리의 실력을 보고서 서둘러 피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도주한 모양이었으나 그래 봤자 궁지에 몰린 쥐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씌잉⎯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의 인대를 잘랐다.
“끄아아아아악!”
중심을 잃고 흙탕물에 얼굴부터 처박힌 펠 공작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프겠지. 살로도 모자라 근육 자체를 도려냈는데 안 아플 리가 없겠지.
근데 말인데.
“그렇게 아픈 놈이 누굴 죽이라고는 잘도 시켰나 봐?”
“그게 아니다! 분명 중간에 착각이 있었을 터이니 그러니…… 크억!”
콰드득!
놈의 입을 향해 주먹을 뻗자, 마치 옥수수처럼 이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손등에 박힌 이빨 조각을 뽑아내며 손을 털었다.
“그 시궁창 같은 입에서 또 같은 소리 나오면 다음은 이가 아니라 목이야.”
“푸흐흐, 보아하니 반역자들을 열심히 찾는 모양인데 이거 어쩌나.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을 찾으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 만일 자네가 실수로 나를 놓치느냐 따라선 내 입이 가벼워질지는 모르겠군.”
섬뜩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펠 공작은 새치 같은 눈을 한 채 실실 쪼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잠시, 차갑게 정색한 채 놈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게 뒈지려고 어디서 수작질이야.”
“……?”
연이어 나온 말에 펠 공작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한 얼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그깟 쿠데타가 내 알 바야?”
“그게 무슨…….”
순간 말문이 막힌 모양인지 펠 공작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까놓고 말해 어차피 나야 적당히 할 일만 마무리 지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데, 그깟 왕 자리에 누가 앉든지 간에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소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이런 복잡한 정치에 관여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보물고에 있는 내 물건에 손을 대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가 우리가 보물고에 들이닥친 일 때문이라고?”
그의 물음에 긍정하자, 펠 공작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푸흐흐, 하하하하핫! 그깟 궤변을 믿으라고 하는 말이더냐!”
“그럼 믿지 말든지.”
“…….”
아주 짤막한 대답에 펠 공작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뭐, 그쪽이 진위를 믿든, 안 믿든 간에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방금 전부터 말이 짧다?”
가능하면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네.
걱정할 것 없다.
기본기가 없는 놈에게 잘 먹히는 것은 옛날부터 정해져 있으니까.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넌 일단 예의범절부터 배워야겠다.”
이야기는 그다음부터 나눠도 늦지 않다.
* * *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긴 했으나 상황은 예상외로 금방 정리되었다.
듣자 하니 쿠데타가 벌어진 이유는 왕이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부정부패가 아닌, 단순히 원로원이 권력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벌인 일.
그렇다 보니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수도에 방문한 귀족들은 부랴부랴 뒷수습을 도왔다.
‘가뜩이나 흉흉한 상황인데, 여기에서 국왕의 눈에서 벗어났다간 다 같이 손잡고 모가지 날아가기 딱 좋은 상황이긴 하지.’
곁으로 보자면 현 국왕은 하룻밤 만에 일어난 원로원의 반역을 훌륭하게 무찌른 입장이다.
수백 년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실의 권위를 한 번에 증명한 셈이었다.
까놓고 보면 전부 내가 활약한 거지만.
언제 한번 보니까. 지난 쿠데타로 인해 왕실의 전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숨기는 데 급급이던데.
수도를 재건하려면 지방 귀족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데 반해 혹시 모를 반역에 대비해 귀족들에게 이번 사태의 진실이 들키면 안 된다.
실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렇게 보니까. 정치라는 것도 영 할 게 못 되네.”
나는 앞으로는 관여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며 왕실에서 별도로 제공한 별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탁에는 24시간 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신선한 산해진미가 깔려 있었으며, 수십 명의 시종이 오로지 내 편의만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거의 국왕과 맞먹을 수준의 접대.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에는 국왕조차 이 정도로 과하진 않았다.
이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한별 공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공은 왕실의 영원한 귀인이십니다! 적어도 궁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섭섭하지 않게 모시겠습니다!’
이번 쿠데타는 물론, 미궁까지 클리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의 드워프왕의 표정은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관이었다.
혹시 몰라 보물고에 대해 슬쩍 물어보니,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줄 것 같았지.
물론 그쪽은 겉치레가 반쯤 섞인 듯했지만.
‘난 진심이거든.’
그렇게, 어떻게 하면 드워프들의 씨알을 빼먹을 수 있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때울 때쯤이었다.
〈띠링!〉
〈제한 시간 내에 믿기지 않은 활약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활약상을 수치로 환산하여 보상이 지급됩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상의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