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한별! 어서 와라! 이쪽으로 가면 지름길이니 곧이다!”
“알았어.”
활기 발랄한 둘리의 외침에 대답하며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그러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병사가 쓸려나간다.
왕실의 구조를 훤히 꿰고 있는 둘리 덕분에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물론 중심부로 파고들면 들수록 적들이 많아졌지만, 나와 둘리한테 걸리면 한주먹거리도 아니었다.
검에 묻은 피를 떨쳐 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막아라! 뭣들 하느냐! 한 몸을 바쳐서라도 막아라!”
내 모습을 본 역도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이렇게 보니 누가 습격자인지 잘 모르겠지만, 뭐 어때.
따지고 보면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다.
마음에 양심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보물고에 도착할 때쯤, 사방에서 폭음이 들리며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콰과광! 쿠웅!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막힌 길.
우리를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둘리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 한별 어쩌면 좋나! 여기가 제일 빠른 길인데, 이곳으로 못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급격히 어두워진 둘리의 표정.
이럴 때 보면 얘도 참 어린애 같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면서 둘리의 몸을 붙잡아 옆구리에 끼웠다.
“뭘 걱정해.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야. 휩쓸릴지도 모르니까 내 옷 꽉 붙잡고 있어. 떨어지면 안 구해준다.”
“응, 알았다!”
기세등등한 발언에 둘리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눈을 질끈 감고 외투를 꽉 붙잡는다.
굳이 눈을 감을 것까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한숨에 권을 뻗는다!
슈웅!
대포알이 쏘아진 것과 같은 파공음과 더불어 길목을 막고 있던 잔해더미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강렬한 한 방 덕분에 복도 크기 또한 이전보다도 더 넓어졌다.
나는 시원한 광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네. 이대로 금고까지 쭉 가면…….”
쩌적, 쩌저적!
음?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그런 의문을 지니기도 잠시, 궁궐의 천장부터 시작해 사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둥과 같은 소리와 함께 건물이 무너진다.
궁궐을 지지하는 가벽까지 휩쓸린 모양인지 건물의 한쪽이 처참하게 붕괴했다.
형태조차 남기지 않고 한 줌의 잔해로 변해버린 궁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부터 시작해 상당한 값어치를 지닌 장식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눈 앞을 가리는 시뿌연 연기 앞에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 힘 조절 실수했다.”
이건 나도 생각 못 했는데, 괜찮겠지?
“둘리의 눈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진 않는다.”
내 생각을 간파했는지 둘리는 새파래진 얼굴로 잔해 속을 멍하니 바라본다.
정곡을 찌르는 녀석의 발언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니, 이로 인해 생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두자.
나는 둘리의 눈초리를 애써 회피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듣자 하니 보물고는 붕괴의 범위에서 간발의 차로 벗어났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적어도 내 물건은 멀쩡하다는 거니까.
* * *
바로 그 시각.
왕실의 보물고에서는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격렬한 항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이다! 전부 쳐라!”
“저 간사한 간신배로부터 폐하를 지켜라!”
두 무리가 격돌하자, 다량의 혈흔이 튄다.
배후에서 전투 양상을 지켜보던 드워프왕은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며 피가 손가락을 타고 떨어졌다.
오직 그만을 지키기 위해서 동고동락한 정예들이 피를 흘렸다.
여기에서 나서겠다고 검을 빼 드는 행위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더럽히는 짓이다.
과거의 영웅이었던 토벌대장이면 모를까.
무력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뿐이라곤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뿐.
적어도 최후에 최후까지 가서 자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죽을 순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올 것이니라!”
어쩌면 자기 희망일지도 모를 말을 내뱉으며 드워프의 왕은 병사들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희생을 회피할 수 없었기에.
그의 희망과는 달리 적들의 물량에 의해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폐하! 어서 몸을 피하십…… 으억!”
마지막 남은 병사마저 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젠 끝이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독약을 삼키려는데, 제게로 검을 들고 뛰어올 적들이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무슨 속셈이지.’
예상 밖의 상황에 눈을 찌푸릴 무렵, 배후로부터 누군가 뒷짐을 쥐고 걸어 나온다.
익숙한 얼굴에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펠 공작.”
현 원로원의 구심점이자 왕위계승권을 지닌 자.
왕위계승권이라 해봤자 계승 순위는 상당히 멀었다.
이번 사태의 주동자일 거라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황실에 혼란을 일으켜 놓고 직접 나설 줄이야,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낯짝이 뻔뻔하기 짝이 없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자, 펠 공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중요한 일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는 주의라, 그리고 뭘 믿고 그러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빨 빠진 짐승이 말이 많군요.”
“도대체 반역을 일으킨 이유가 뭐지?”
“그야 간단하지 않습니까. 원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이 한 몸을 바쳐 썩은 물을 처리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펠 공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끝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명령을 내리려던 때였다.
쿠웅! 쿠웅, 쿵!
지면이 울릴 때마다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범상치 않은 일이라 판단한 공작은 인상을 바짝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소란스럽지?”
“그,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난입하여 소란을…….”
곧바로 달려온 척후병이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아쉽게도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난입한 불청객이 척후병의 몸을 날려 버렸기 때문에.
“내가 금고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는데 왜 앞을 막고 지랄이야.”
전장에 난입한 남자, 신한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드워프왕의 안색이 단번에 밝아졌다.
“한별 공?”
분명 미궁에 들어갔을 터인 신한별이 지금 왜 이곳에 있을까 하는 막연한 의문이 머릿속 한구석에 떠올랐으나, 그것을 골똘히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토벌대장의 후예인 신한별이라면 이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드워프의 왕은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 * *
한편.
보물고에 도착하고서 드워프의 국왕과 마주한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어? 저놈이 왜 여기에 있어.’
설마 내가 왕궁의 일부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가? 아니면 소란을 틈타 왕실의 보물고를 털려는 사실을 눈치챘나.
찔리는 게 하도 많아서 국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이 찔린다.
일단 쨀까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되돌아가는 것도 상당히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지닐 때쯤, 문득 주변 상황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
먼저 선수를 챈 것은 드워프의 국왕이었다.
“한별 공 도와주십시오! 반란입니다! 한별 공께서 도와주신다면… 뭐든, 공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반란?”
아, 그런 거였어? 쿠데타로 인해서 쫓기다가 우연히 보물고에 다다른 것이었나. 난 또 내 계획을 알고서 책임을 물리려고 대기하고 있는 줄 알았네.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도, 황당함도, 짜증도 아닌 안심이었다.
‘괜히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럼 저쪽은 내가 벌인 짓은 모르고 있단 말이잖아.
안심해서 그런지 두뇌 회전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게 웬 횡재야?
왕국의 건물이 무너진 책임도 반란군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뿐더러, 보물고도 합법적으로 털 명분이 생긴다.
결정은 빨랐다.
“원하는 건 모두 주겠다는 약속, 기억하니까 무르긴 없어.”
그의 제안을 승낙하자, 이 과정을 지켜보던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분명 펠 공작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묘하리만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시, 신한별… 어째서 네놈이 여기에 있지? 분명 미궁에서 처리했다고 보고 받았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온 그의 발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궁에서 습격을 의뢰한 흑막이 누군가 싶었는데 바로 저놈이었나.
나는 문득 든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뭐…… 라고?”
“그러니까. 따로 안면도 없는 내가 원한을 살 일이 있었냐, 이 말이야.”
원한을 사는 건 좋은데 적어도 그 이유는 알면 좋잖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적당히 꺼낸 의문에 펠 공작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표정의 변화가 절정에 다다르나 싶더니, 이윽고 놈은 핏발을 세우며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신한별, 설령 네놈은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네놈이 성문 앞에서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마땅한 일이다! 설마 이 일을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분노가 물씬 느껴지는 발언을 앞두고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누군가 싶었는데 그때 나한테 처맞은 놈이었어?”
그러게, 맞을 짓을 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