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휘영청 달이 뜬 어느 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어둠으로 그을진 복도와 방 안을 밝힌다.
그중에서도 유난히도 밝은 방이 있었으니.
왕성의 특성상 언제나 청결과 깔끔함을 유지하는 다른 장소와는 달리, 방의 내부는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들로 난장판이었다.
난장판의 한가운데에 있던 남자는 시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뿌연 연기가 천장을 가득 채운다.
남자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역시 한별 공이 거절하더라도 몰래 병력을 보내서 지원해드릴 걸 그랬군.”
그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궁은 수백 년간 왕궁의 지하에 존재했지만, 그 속의 봉인을 깬 사람은 없었을뿐더러 되레 괴수로 인해 많은 피를 흘렸다.
따라서 자처하여 미궁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거늘.
일말의 고민도 없이 미궁으로 향하겠다고 말하던 신한별의 등은 묘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단순히 기록과 초상화만으로 남아 있는 토벌대장의 등과 말이다.
‘단순히 토벌대장님의 손님이라 그런 줄 알았거늘.’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돌아오겠다는 자신감.
아니, 신한별에게는 그보다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도 잠시, 그의 어깨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역시 그때 말리길 그랬군.”
금방 다녀오겠다는 신한별의 언질과는 달리 벌써 이틀이 흘렸다.
봉인 너머에 있는 미궁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 그의 걱정은 커질 대로 커진 상태.
그래서 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토벌대장과 맞먹는, 혹은 그보다도 더 압도적인 인재를 잃었다고 생각하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민해 봤자 어쩔 수 없다.
결정을 무르기에는 이미 지난 일.
지금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한별이 무사히 되돌아오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가를 전부 태운 다음 드워프 특제 독주를 입에 머금으려는데,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들어오라는 말에 사뭇 심각한 표정의 병사가 들어왔다.
다급한 안건인지 병사의 복장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 점에 대해 지적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병사가 먼저 선수를 쳤다.
“폐하! 반란입니다! 현재 반란군이 왕성을 포위했습니다!”
“뭐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거기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서둘러 창밖을 바라보자,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벌써 여기까지 도달한 건가.
왕성은 높은 수준의 경비들이 항시 순찰을 돈다.
그런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곳까지 쳐들어왔다는 뜻은…….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된 반란인가.’
왕실의 경비와 관련된 주요 인물 전부를 매수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터.
상황이 이렇게 변한 이상, 역적들이 이 방에 들이닥치는 것도 금방이리라.
이번 사태의 원흉이야 이미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그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원흉은 누구지.”
“그게…… 아직 확신은 못 하겠지만, 역적들의 행색을 봤을 때는 원로원이 아닐까 하고…….”
빠득!
조심스러운 병사의 대답.
예상했던 대답에 딛고 있던 테이블에 금이 갔다.
“기어코 그놈들이 움직였나.”
어쩐지 요즘 들어 원로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그랬었나.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항전할 수밖에 없다.
설사 이쪽이 궁지에 몰린 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고민하기도 잠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반란이 일어났으니 지금은 이 사태를 깨닫고 뛰어올 지원군을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보물고로 가, 남아 있는 병력을 모아서 항전이라도 해 볼 수밖에 없겠군.”
왕실의 보물고라면 도난에 대비해 두꺼운 차폐벽과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각종 무기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그의 판단에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라곤 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만약 이 자리에 한별 공이 계셨더라면…….’
현재 상황이 달라졌을까.
찰나의 순간, 한 인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에 신한별이 있든 없든 처음부터 철저히 계획된 쿠데타다.
지금 와서 사소한 것을 생각해 봤자 별 의미는 없다.
단지.
어쩌면이라는 기대감을 입속에서 곱씹을 뿐이었다.
“우선 금고로 가도록 하지.”
* * *
파아아앗!
나는 강렬한 섬광과 함께 미궁에서 벗어났다.
간만에 맡아 보는 바깥 공기는 달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와씨, 진짜 갑갑해서 뒈질 뻔했네.”
미궁의 규모야 물리적으로 크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이틀이나 가까운 시간 동안 축축한 습기와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호우가 쏟아지는 날, 판초를 입고 근무를 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애매하게 기분 나쁠 거였다면 차라리 늪 지대에서 수영을 하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가.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시기상 이른 새벽이었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는지 왕궁 내는 시끌벅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화약 냄새에 나는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설마 내가 미궁을 클리어할 줄 알고 미리 축하연이라도 준비했나 봐.”
“한별, 둘리가 보기에는 축하하는 분위기로는 안 보인다!”
“알아. 농담으로 한 말이야.”
나도 안다.
굳이 기감을 넓혀셔 살피지 않더라도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말이다.
설마설마했는데, 이거 쿠데타가 일어난 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태.
어쩐지 드워프왕이 자국 내의 귀족들의 이야기를 할 때부터 싸하다 했다.
하필이면 내가 있을 때 일이 터지다니.
조용히 상황을 살피고 있을 즈음, 복도에서부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국왕을 비롯해 왕가의 인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여라! 한 명이라도 놓쳤다간 임무는 실패다!”
“옙!”
기나긴 복도를 거쳐 공동의 입구로부터 책임자로 보이는 인물을 비롯해 수많은 기사가 나타났다.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는지 지독하게 풍기는 피 냄새.
놈들은 나와 마주치자마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뢰배 같은 행색이었지만, 움직임은 날카로웠다.
단순하면서도 급소를 정확하게 노린 일격.
수십 년이나 되는 세월을 검에 바쳐야지만 비로소 나오는 움직임이다.
감탄하기에는 충분한 판단력과 실력이었으나, 그들보다는 내가 더 빨랐다.
쿵, 콰득!
가볍게 정권을 내뻗자, 철제 갑옷이 종이짝처럼 우지끈 구겨지며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불과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에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얼굴.
‘적당히 제압만 해둘까.’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도 그렇겠지.
속전속결로 제압하기 위해 가볍게 움직이려는데,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 얼굴을 슥 훑어보더니 이내 사색이 되었다.
“시, 신한별?”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
“분명히 미궁에서 처리했다고 보고 받았는데 어째서….”
“아아,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간만에 터진 잭 팟을 만끽한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궁에 입성했던 첫날에 불의의 습격을 당했었지. 그날의 원흉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내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짓자, 이를 지켜보던 둘리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되물었다.
“한별! 오늘 한바탕하는 건가. 걱정 붙들어 매라! 둘리가 나서면 금방이다!”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 둘리는 짤막한 손으로 팔을 걷는 시늉을 하며 앞으로 나선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넌 자리나 지키고 있어,”
한순간에 내 손에 잡힌 둘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딜 나서.
사실 이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이라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둘리의 나이라 해 봤자 이제 막 알에서 태어난 해츨링이다.
그런 녀석이 벌써부터 싸움박질이라니, 성격도 참 다이내믹하다.
누굴 보면서 컸는지. 이래서 영재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나 보다.
드래곤들도 영재 교육하는지는 둘째치고.
“넌 보고만 있어. 금방 끝나니까.”
가볍게 손을 쓰자, 병사들은 별다른 대항도 못 한 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거봐, 맞지?
손을 털며 한숨을 돌리자 둘리가 내 어깨에 올라타며 손가락을 뻗었다.
“한별! 어서 가서 구해주자!”
“구하긴 누굴 구해줘?”
“으음… 한별이 짜리몽땅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었나?”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둘리.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물론 왕궁의 미궁을 통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값진 물건을 손에 얻긴 했다.
하나.
‘그래서 어쩌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내가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저들이 앓고 있던 골칫거리를 하나 치워준 셈이다.
따지고 보면 감사를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지.
그런데 여기에 귀찮은 골칫거리를 떠맡으라고?
그것도 쿠데타라는 국가적인 사태를?
‘사양이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배후를 찌르려고 한, 귀족의 낯짝은 한 번 봐두고 싶었으나.
“그거야 다른 날을 잡아서 족치면 되는 일이고.”
일부로 직접 나서서 호구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됐으니 복잡한 틈을 타서 금고에서 물건이라도 털어 볼까.”
듣자 하니 드워프들은 무기나 보석을 만드는 실력이 뛰어나다지?
나는 사리사욕에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둘리는 학을 떼며 소리를 질렀다.
“와, 한별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악마다!”
“쿠데타 때문에 보상을 못 받게 되면 이렇게라도 채워야지.”
“그걸 말이라고….”
“어쩌면 드래곤도 먹을 수 있는 츄르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서 가자! 길은 둘리가 기억하고 있으니 맡기고 따라만 오면 된다!”
적당히 말을 덧붙이자 둘리는 흥분한 얼굴로 날갯짓을 한다.
이로써 장소도 정했으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됐으니 영감님의 후예들은 얼마나 좋은 걸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선조가 나을까. 아니면 후예가 더 나을까.
그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