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을 보자마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6층에서 영감님한테 백룡의 갑옷을 받았을 때에도 그런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세트템이라고?
“그 노인네 진짜 노망이라도 들었나.”
이런 귀한 물건을 꿍쳐두고는 말도 안 해 줘?
처음부터 세트템이었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게다가 시스템의 설명에 따르면 세트템을 맞추기 위한 개수는 총 다섯 개.
총 다섯 파츠 중에서 두 개를 수집했을 뿐인데도 이만한 효과라니, 세트템을 전부 모으면 얼마나 강한 위력을 발휘할까.
그것뿐이랴.
나는 시스템에 적혀져 있는 또 다른 문구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주의! 봉인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봉인까지 해제한다면…….”
그 시너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비록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드래곤하트를 필요로 한다지만.
‘그까짓 것 못 할 것도 없지.’
탑을 만든 관리자인가 뭔가 하는 놈의 대가리도 깰 건데, 거기에 비하면 드래곤은 도마뱀밖에 안 된다.
아티팩트를 내려다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자, 이를 지켜보던 둘리가 머리 위에서 빙빙 날아다니며 한 마디를 내뱉는다.
“한별, 지금 그 모습 변태 같다!”
“변태는 무슨… 넌 몰라도 돼.”
둘리의 머리를 쥐어 짜내듯이 손으로 압박하자, 녀석은 아프다는 듯이 팔을 툭툭 친다.
나는 그제서야 힘을 풀고는 허공을 향해 냅다 던졌다.
벽에 처박히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을 테지만, 그간 내 패턴에 적응했는지 둘리는 날개를 활짝 펼치며 다시금 하늘을 활짝 날아올랐다.
그 광경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흘겼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네.’
그래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기지만.
둘리 때문에 정신이 딴 곳에 쏠리긴 했지만 관건은 그게 아니다.
시선을 돌려 아티팩트가 발견된 상자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허탕인가 보네.”
주변을 한참 동안 살피다 말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 영감님의 성격이라면 다른 곳에 아티팩트를 숨겨 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팔찌 외에는 없는 듯했다.
하긴 이만한 물건을 얻어놓고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양심이 없긴 하지.
‘그런데 그런 것치곤…….’
너무 넓긴 하지?
나는 공동을 훑어보며 의아스러운 눈빛을 자아냈다.
지금까지 겪은 미궁의 1층과 2층에 비하면 월등히 작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자 하나를 보관하겠다고 이만한 규모를 썼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층에는 널리고 널린 괴수의 흔적조차 없다.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이었다.
쿠구궁!
지면에서부터 붉은빛이 도는 기포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기포는 거대한 규모의 원 형태를 이뤘다.
마치 마법진을 연상케 하는 형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법진에서는 상당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공할 만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 그렇지. 그 노인네가 물건만 놔둘 성격은 또 아니지.”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전개였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없었다.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으로 압박감을 떨쳐 내고는 주먹으로 지면을 내려쳤다.
그러자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에 달하는 싱크홀이 생겨났으나 나는 그 밑을 바라보고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역시 물리적으로 마법진을 깨는 건 안 되나 보네.”
아쉽게도 쭉 이어진 기포의 일부가 끊겼을 뿐이지, 전과 비교해 달라진 건 없었다.
하긴 그렇게 쉽게 깨질 거였다면 200년 전에 미궁을 봉인했을 리도 없겠지.
그렇게 마법진에서 솟아 나온 섬광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연기가 폭발하며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연무 속에서 번뜩이는 새빨간 안광.
고민은 짧았다.
“흡!”
짤막한 기합과 동시에 정면을 향해 검격을 뻗자,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육중한 물체가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리야!”
“알겠다!”
서둘러 둘리를 부르자, 척이면 척이라는 듯 녀석은 브레스를 뿜어 공동 전체를 가득 채운 연기를 걷어냈다.
새까만 연무가 흩어지며 그동안 가려져 있던 시야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머리가 9개나 되는 뱀이 있었다.
단순한 몸집의 뱀이면 모를까.
괴수의 몸집은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덩치에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머리 하나는 잘랐네.”
방금 전에 내뻗은 검격에 당한 모양인지 9개였던 뱀의 머리 중 하나는 아주 깔끔하게 절단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도 얕볼 순 없는 상대였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미궁의 어느 괴수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어쩐지 미궁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별거 없다 싶었는데, 전부 저놈 때문이었나.’
하긴 저런 괴물이 땅속에서 도사리고 있으면 봉인시킬 만도 했다.
드워프에게는 걸어 다니는 재앙으로 통용되는 존재겠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다.
나는 백룡의 부츠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얻은 아티팩트를 시험해 보려고 했었는데.”
마땅한 상대가 없을까 하고 찾고 있던 참인데 잘됐네.
확실히 다른 괴수들에 비교하면 아티팩트의 힘을 시험하기에는 딱 적당한 상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놈을 향해 다가가자, 괴수는 몸을 부풀리며 혀를 길게 뻗는다.
“취이익!”
제 딴에는 위협이라도 해 보려고 한 거 같은데, 나는 눈을 흩기며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까. 머리가 여러 개면 그중에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놈이 고통을 느끼나?”
그거야 직접 시험해 보면 알게 될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점프 한 번으로 천장에 도달한 다음, 사선으로 검을 휘둘러 놈의 목울대를 그었다.
촤아악!
시꺼먼 피 분수와 함께 괴수의 머리가 또다시 지면에 떨어진다.
이제 남은 머리는 일곱 개.
내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틈을 타, 남아 있는 괴수의 머리가 쇄도해 든다.
한 방향뿐이라면 모를까. 이대로 기회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듯 상하좌우 모든 방향에서 독기를 머금은 이빨이 날아든다.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썩어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극독.
당연하게도 장애물 하나 없는 공중에 떠 있었기에 회피할 만한 장소는 없었다.
“아씨, 당연히 머리 하나가 떨어지면 나머지도 같이 고통스러워할 줄 알았지.”
나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쨌든 간에 이미 벌어졌으니 도로 무를 순 없다.
물론 놈들에게 물려 봤자 그리 크다고 할 부상은 입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물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도중, 때마침 둘리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한별! 둘리가 왔다! 손을 잡아라!”
“손은 됐고, 등이나 대 봐.”
“음? 한별 그게 무슨… 으악!”
빠른 속도로 날아온 둘리의 등을 지르밟고 다시 도약한다.
덕분에 둘리는 다시 지면으로 떨어진 꼴이 됐지만, 뭐 어때.
나중에 사과의 의미로 드래곤용 츄르라도 찾아봐야겠다.
그대로 괴수의 머리 위에 착지한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강렬한 파육음이 들리며 괴수의 머리가 박살 나며 척수액이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돌리자 먹잇감을 포착하듯 또 다른 뱀의 머리가 극독을 뱉었다.
상당한 위력의 독이었으나 회피하기는커녕 콧방귀를 뀌며 놈을 향해 발돋움했다.
독은 마치 산탄총처럼 내 몸을 뒤덮었지만, 당연하게도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백룡의 갑옷(SS+)이 독을 저항해냅니다.〉
〈세트템의 효과로 독을 흡수해 신체의 회복력이 증가합니다.〉
“오, 좋은데.”
독을 저항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추가 효과로 전투의 피로까지 회복된다.
상상 이상의 결과에 나는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거기에 모자라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나니, 확실히 이전보다도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단 상태에서 물속을 거닐었다면 지금은 그런 제약 따위는 사라진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이런 좋은 걸 혼자만 알고 꿍쳐 둘 줄이야.’
이렇게 된 김에 이번 층만 해결하고 나면 그 노인네를 찾아가서 남은 아티팩트의 위치도 캐물어야겠다.
뭐 그거야 나중에 천천히 하면 될 일이고.
“슬슬 끝내 볼까.”
제 독에 당해 비명을 내지르는 괴수를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새롭게 얻은 아티팩트도 충분히 체크했겠다, 놈을 상대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도 없었다.
이제 끝낼 때도 됐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는 놈의 몸통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검 끝에서 폭발적인 기세를 일으키며 쇄도한 풍압이 괴수의 몸통을 절반으로 쪼갰다.
머리가 9개라고 해도 이를 지탱하는 몸통이 없으면 생명력을 잃기 마련이다.
괴수는 남은 생명력을 불태우듯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을 토해내며 숨을 잃었다.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하찮은 결말.
불쌍할 건 없었다.
“자처한 결말이니까.”
오히려 죽어서도 내 성장의 거름이 된 셈이니 잘 죽은 셈이지.
나는 빼먹지 않고 이터의 권능을 사용해 놈의 스탯을 흡수했다.
확실히 거물이긴 한 모양인지, 1층과 2층에서 상대한 괴수들에 비하면 훌륭한 경험치원이었다.
이걸로 미궁에 도사리는 괴수도 처치했겠다.
나중에 드워프왕에게 가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걸 요구할까 행복한 상상에 빙그레 웃고 있을 때쯤이었다.
“저건 뭐야.”
괴수의 시체에서부터 무언가가 반짝거린다.
예상 밖의 상황에 눈을 가늘게 뜨며 반짝거리는 물체를 향해 다가가자, 그곳에는 손가락만 한 작은 구슬이 있었다.
〈불완전한 내단(B)〉
- 미성숙한 뱀의 내단이다. 총 아홉 개를 모으면 완전한 내단으로 변합니다.
- 뱃속에서 금방 나와서 비린 냄새가 납니다! 먹으면 역한 냄새가 몸에서 날지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게 아니었다.
내단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은 코팅된 한 장의 종이.
그 종이에 적혀 있는 글귀는 놀랍게도 내가 아는 필체와 매우 닮아 있었다.
과거 토벌대장으로 있었던 영감님의 영장.
죄질에 따라서 신분을 막론하고 즉결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미궁에 들어왔을 때, 암살자를 사주해서 암살하려고 한 귀족들이 있지 않았던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걸로 한 번 뒤집어엎는 것도 괜찮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