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95화 (95/175)

제95화

쿠궁, 쿠궁, 콰아앙!!

벽과 천장, 지면이 한꺼번에 박살 나며 괴수들이 일거에 쏟아졌다.

상하좌우 어디 하나 피할 곳은 없다.

자신이 꾀한 함정에 스스로 걸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복면인들은 살아있는 채, 괴수들의 입에서 짓이겨졌다.

팔과 다리가 부서지며 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보기만 해도 딱한 광경이었지만, 괴수들에게는 그조차도 먹잇감일 뿐이다.

순식간에 괴수들에게 먹힌 놈들을 보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딱한 것도 없다.

“스스로 자처한 일인데 뭐.”

남을 죽일 생각은 하고 자기는 똑같은 꼴로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정해진 결말이다.

먹잇감을 잃은 괴수의 시선은 머지않아 나를 향했다.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을 아득히 넘을지도 모르는 괴수의 숫자.

아득함을 넘어 경이로운 기분까지 느끼게 만드는 물량이었으나, 그래 봤자다.

‘이 정도는 약과지.’

튜토리얼에서는 1년 내내 쉬지 않고 괴수와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는데, 그때의 경험에 비하면 비교할 대상도 못 된다.

이렇게 보니까. 좀 억울하네.

“내가 그렇게 구를 동안, 탑은 이렇게 평화로웠단 거잖아.”

피식거리며 괴수를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자 검 끝에서 쏘아진 풍압이 괴수들의 대가리를 박살 내며 괴수의 무리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한쪽 진영이 붕괴하자, 괴수들은 자연스레 균형을 잃으며 우수수 쓰러진다.

그래도 머리가 장식으로 달린 건 아닌 모양인지, 압도적인 격차를 실감한 괴수는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광경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들던 것들이 이제는 도망치는 꼴이라니.

나는 검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이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네.”

그동안은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묵혀두고 있었지만, 슬슬 써 볼까.

아눌드 공방에서 검을 제련했을 당시에 부여한 권능은 총 두 가지.

하나는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형태나 크기의 제약을 받지 않고 검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것이며, 남아 있는 마지막 권능은….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끌어당기는 힘.’

그냥 들어선 괴수들의 어그로만 끌기밖에 더하는 쓰잘데기없는 힘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뭐,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고.

하나 얕보면 곤란하다.

이 능력이야말로 나한테는 진또배기거든.

검의 권능을 사용하자, 검신에서부터 폭발적인 광량이 뿜어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그 빛이 강한지 검에서 뻗어나간 섬광은 미궁의 구석구석까지 미친다.

일반적인 빛이면 모른다.

무지갯빛의 색이 형형색색 발광하며 디스코 볼처럼 회전하는 모습은 할 말을 잃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공방주가 이걸 건네주면서 뭐라고 했더라.

“보자마자 만족할 만한 옵션을 추가로 넣었다고 했었는데, 씹…… 그 말이 이거였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보나 마나 관종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러다가 탑을 오르기 전에 수치사가 먼저겠다.

치솟아 오르는 내 부끄러움과 비례해 권능은 막강한 효력을 자랑했다.

더할 나위 없는 상황에 실소를 흘리고 있자, 어디에선가 나타난 둘리가 날개를 휘적거리며 내 어깨를 쳤다.

“무지개다! 한별한테서 번쩍거린다!”

“됐어, 불 난 집에 기름 붓지 말고 도와줄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이게 전부 네가 축내는 밥 버는 일이니까.”

둘리의 머리를 짓누르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무지갯빛에 노출된 괴수들은 이성을 잃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보기만으로도 지릴 듯한 상당한 숫자.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한 광경일지도 몰랐으나,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걸 이터의 권능으로 전부 흡수하면 도대체 얼마야.’

안 그래도 요즘 스탯을 흡수하는 양이 적어서 신경 쓰였는데 절호의 기회다.

검으로 어그로를 끌고.

이터의 권능으로 이득을 취한다.

나는 찐득한 웃음기를 입가에 머금으며 검을 되잡았다.

“노다지는 못 참지.”

* * *

미궁 1층에 있는 괴수의 씨가 전부 마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 앞에 나타나는 족족 괴수들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려 2층의 입구에 다다른 나는 가볍게 손을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영감님이 봉인해 둔 장소가 여기란 말이지.”

드워프왕의 설명에 따르면 2층은 200년 전의 봉인으로 막혀 있다고 했었다.

안에서 나오는 것도 못 하지만, 반대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의아스러웠으나 지금 보니까. 그 의미를 좀 알겠네.

“그럴 만하네.”

파지지직!

정면을 향해 손을 뻗자, 강력한 전류와 함께 손이 튕겨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앞에서부터 약한 마력이 느껴졌다.

얼마나 강력한 결계인지 손바닥이 저릿할 정도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억지로 손을 가져다 댔다면 감전사하기에는 충분한 위력.

경각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했으나, 나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의 결계를 쳐 둘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걸 넣어둔 거야.’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귀하면 귀할수록 그에 걸맞은 보안을 마련해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정도 결계를 해둘 정도라면….

“솔직히 아무 기대 안 했는데 거의 로또네.”

비유하자면 뜯지 않은 복권이랄까.

결계 너머에 있을 보물들을 떠올리며 눈독을 들이자, 이를 지켜보던 둘리가 질문을 던졌다.

“한별,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엄연히 따지면 그 드워프인가 하는 사람들의 땅이니, 주인은 한별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둘리의 의문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의문.

물론 그 의문에 대한 대답 역시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수십 년 전에 주인이 버린 폐가에 갔는데 거기에서 돈을 주었어. 그럼 그건 누구 거야”

“음…….”

내 질문에 둘리는 침음을 흘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럴 땐 버리고 간 사람이 잘못인 거지. 묵혀서 똥밖에 안 될 거면 임자가 잘 써줘야지.”

뭐? 이런 게 궤변이라고?

궤변이면 뭐 어떤가. 중요한 물건을 버려둔 사람이 잘못한 거지.

나는 낄낄낄 함박웃음을 지으며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200년이 지났음에도 효과가 변치 않고 작동할 정도면 상당한 성능을 지닌 결계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것쯤은 나한테 걸리면 한 방이거든.’

어려울 건 없다.

이런 결계의 파훼법이라면 탑에 거주하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라고 확신한다.

나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는 결계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파지지직! 콰득!

결계에서 강력한 전류가 흘러나오며 내 몸을 연신 타격한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방금 전처럼 튕겨 나갈 만한 반발력.

결계가 한 번 튕겨내면, 다시 두 발짝을 나아가 뻗는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몸뚱어리만 믿고 나아가면 된다.

몸의 절반이 통과하자, 힘을 못 버티고 결계의 모서리부터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계는 완전히 박살 났다.

“간단하네.”

자, 그러면 거추장스러운 것도 사라졌겠다.

나는 곧바로 2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노인네가 괴수와 함께 봉인한 물건을 손에 얻을 수 있는데, 입구에서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곳곳에서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애초에 미궁의 2층에 봉인을 만든 이유는 괴수를 막아내기 위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상을 구겼다.

“으음… 또 보면 그다지 강한 것도 아닌 거 같단 말이야.”

물론 1층에서 상대했던 괴수보다는 강하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 실력의 괴수를 봉인하기 위해서 굳이 결계를 만들었다 한다면, 글쎄?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은 남아 있었으나 간단히 무시하기로 했다.

‘뭐, 어때. 분석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나야 여기서 얻을 물건만 얻고 내빼면 그만이다.

그깟 봉인 따윈 알 바 아니다.

머릿속이 돈과 장사로만 가득한 노인네의 의중을 알아서 뭐 하겠나 싶다만은.

그렇게 괴수를 상대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2층에 있는 괴수를 죄다 쓰러뜨리고 미궁의 3층에 도달하자, 거대한 규모의 공동이 나타났다.

1층과 2층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뭐랄까. 이전 층에서는 끊임없이 나타나는 괴수들로 인해서 비릿한 피 냄새와 끈적한 공기가 맴돈다고 한다면.

이곳은 묘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무언가 나타날 것 같이 말이다.

전체적으로 어스름한 분위기였으나 나는 괘념치 않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뭐가 있을 텐데.”

수많은 괴수를 상대하면서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나 다를까.

공동의 중앙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큼지막한 상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찾았다.’

상자를 확인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이것마저 철저히 계획된 함정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거침없이 상자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상자에 손을 올리자.

미궁의 봉인을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계가 발동하며 손이 튕겨 나왔다.

체감상 이전에 겪은 결계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

“그 영감네가 뭘 숨겨 놓은진 몰라도 준비 하나는 철저하게 했네.”

그래 봤자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상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결계와 검이 맞부딪치며 새파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튄다.

당장에라도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강렬한 반발력.

힘 조절에 망설임은 없었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하자, 상자를 감싸고 있던 복잡한 결계가 부서지며 황금빛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앗!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광량.

그러나 탑을 등반할 때마다 항상 동반되었던 눈뽕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빛을 향해 손을 뻗자, 살점이 날아가며 뜨거운 피가 손목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뒤로 내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 정도 통증은 지금껏 겪었던 고통의 축에도 못 낀다.

그렇게 상자 속 물건을 손에 쥐자, 청명한 방울 소리와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백룡의 부츠(SS+)〉

- 수백 년 전에 죽은 드래곤 로드의 외피로 만든 부츠로 어떠한 부츠과 비교해도 비견할 수 없는 스피드를 자랑합니다!

※ 주의! 봉인되어 있습니다.

〈백룡 시리즈를 연속으로 발견하셨습니다. (2/5)〉

- 아티팩트 세트의 추가 효과가 발동합니다. (속성 저항력+100, 내구도+50, 체력+30……)

나는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창과 6층에서 영감님에게서 받은 백룡의 갑옷을 번갈아 둘러보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이거.

“세트템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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