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장사치라니 그게 무슨…….”
무의식중에 나온 대답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겠지.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모든 병사가 존경해마지 않는 전설 속 위인이 알고 보니 장사치란다.
원래라면 불경죄로 처벌받아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몇 대를 거쳐서 그토록 기다리던 예언 속 인물이다.
게다가 방금의 일로 실력도 직접 봤으니 함부로 대꾸할 순 없겠지.
이래서 권력이 좋다니까.
“그래서 질문할 건 그걸로 끝?”
찻잔을 기울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드워프왕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는 자신이 보인 추태를 깨달아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공이 토벌대의 자리를 맡아줄 수는 없겠습니까?”
“토벌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기회라고 여겼는지 그는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예, 공의 무력과 배경이라면 설사 원로원이라 하더라도 트집을 잡지 못할 겁니다. 한별 공께서 토벌대의 자리를 맡아 같이 국정을 다스려 줄 수 없겠습니까? 내 보상은 충분히 쳐줄 테니 부디 협력 부탁드립니다.”
그의 물음에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하자면.
나라의 내정이 불안정하니까. 내가 책임자가 돼서 귀찮은 잡무를 전부 처리해 달라고 하는 거잖아.
이거 그렇게는 안 봤는데 생각보다 능구렁이였네.
남을 철저하게 부려 먹으려고 하는 걸 보니까. 그 선조에 그 후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빠르게 명성을 쌓을 순 있겠지만.’
미안하지만 그의 제안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내 성격에 누구 밑에 들어가는 거라면 질색이다.
머리를 조아려가면서 이번 층을 클리어할 바에야, 내가 직접 대가리를 깨고 왕위에 올라서 해결하겠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관심 없어.”
“하하하! 시원시원한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역시 토벌대장님의 손님이십니다! 보상은 천천히 논의하도록 하고 앞으로… 어? 지금 뭐라고?”
“뭐긴. 그런 귀찮은 자리는 질색이라고.”
이렇게까지 딱 잘라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말을 더듬거렸다.
“결례인 건 알지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뭘 그렇게 결례를 저지르는 거야.
그래도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나는 이번 층의 클리어 내용인 명성을 쌓아야 하며, 국왕인 그는 눈엣가시인 원로원을 처리해야 한다.
“간단하네. 요는 그 원로원이라는 놈들의 대가리를 죄다 깨버리면 해결되겠네.”
“한별 공, 지금 뭐라고…?”
“문제가 있으면 원인이 되는 걸 뿌리째 뽑아버리면 되잖아.”
안 그래도 바깥에서의 일을 통해서 이 나라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꼴 보기 싫었던 참이다.
팔목을 걷어 올리며 의욕을 보이자, 그는 새파래진 얼굴로 도리어 말리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시지요, 이건 힘으로 해결할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또 왜?”
“그런 식으로 해결한다면 오히려 왕실에 대한 오명이 붙지 않겠습니까. 그건 오히려 저들에게 명분을 주는 꼴이니 안 됩니다!”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라는 거야.
쓰벌, 그냥 때려치울까.
내가 지그시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말라비틀어진 얼굴로 수습했다.
“결국 왕실 권위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이유는 미궁 때문입니다. 왕궁의 지하에는 200년 전에 토벌대장께서 직접 봉인해 둔 고대의 괴수가 있는데 그 미궁으로 인해서 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랑 그 봉인이랑 뭔 관계인데. 원래부터 있던 건데 따질 거면 그걸 처리하지 못한 선대한테 따져야지.”
“하하, 그게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말입니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시가를 태웠다.
참 복잡하게도 산다.
그냥 나처럼 깔끔하게 해결하면 뒷말도 안 나오고 편할 텐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하아, 토벌대장님께서 왕실의 상징과 보물만 봉인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여건이 나았을 텐데. 이게 참 상황이 어렵게 됐으니….”
무의식적으로 나온 그의 발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라고?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방금 전에 한 말이라면…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고?”
“아니 그 전에 한 말.”
“토벌 대장께서 보물을 같이 봉인하지 않았다면… 이거 말씀이십니까?”
“어, 그거. 그건 뭔 얘기야.”
눈을 번뜩이며 묻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아아, 뭐 별난 건 아닙니다. 당시에 토벌대장께선 각종 아티팩트를 수집하는 게 취미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시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았던 보물도 같이 봉인했다던데 그냥 저잣거리에 도는 낭설이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양, 손을 저으며 설명했다.
하나, 나는 그 내용을 듣고는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보물을 같이 봉인했다고?’
6층에서 영감님을 만났을 때를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다 죽어가는 노친네가 별의별 아티팩트를 다 갖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 어디에서 나왔을까?
왠지 모르겠지만, 문득 예사롭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그것도 잘만 하면 큰 몫을 단단하게 챙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묘한 감이 말이다.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 미궁이라는 곳 자세히 설명해 봐.”
* * *
“여기입니다.”
“아, 여기야? 들은 거치고는 멀쩡하게 생겼네.”
드워프왕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직후, 곧바로 미궁으로 안내받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생각한 것보다 미궁의 입구는 평범하게 생겼다.
특이점이라고 해 봤자 평범한 평지 위에 문이 딸려 있다는 것이랄까.
그 외에는 별다른 경비가 없다는 게 다였다.
듣자 하니 봉인이 있어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는 건 인력 낭비라고 했던가.
내가 미궁의 입구를 둘러보고 있자, 눈치를 살피던 경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안내는 여기까지 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미궁 안은 위험하다 보니 저희의 실력으로는 한참 모자라서….”
“아 괜찮아. 마저 볼일 보러 가. 나도 약한 놈들 뒤치다꺼리할 생각은 없어.”
기사로서 명예에 누가 되기에는 충분한 발언이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바깥에서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들었던 탓일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우선 미궁이 우선이니까.
계획이라면 드워프왕으로부터 미궁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정했다.
‘여기에 있는 보물을 싹쓸이해야지.’
어차피 주인도 없는 보물이다.
내가 가져간다고 해 봤자, 나무랄 사람은 없겠지.
뭐, 보물의 주인이 6층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겠지만.
“꼬우면 자기가 챙겼어야지.”
안 챙겨 놓고 방치한 사람의 잘못이잖아.
나는 피식 웃으며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미궁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바뀌는가 싶더니 거대한 규모의 공간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동굴처럼 습했지만, 벽과 바닥 전체에 잔뜩 낀 이끼로부터 빛무리가 일어나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
처음 봤다면 꽤나 놀랄 만한 광경이었겠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들었던 대로네.”
미리 들은 설명에 따르면 미궁은 총 3층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1층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용 공간.
200년 전에 영감님이 봉인해 둔 장소는 2층부터라고 했으니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떼려던 그때였다.
“한별! 뭔가 있다!”
내내 조용히 있던 둘리가 옷을 잡아당기며 손짓한다.
“어, 나도 느꼈어.”
둘리의 말대로 내가 지나온 길에서부터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궁에 있는 괴수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노골적으로 인기척을 숨기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제 딴에는 기척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
정체야 뻔하지.
“가령 사주를 받은 암살자라든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뭐냐고?
근거야 충분할 정도로 많다.
31층에 도착하자마자 원한이라면 충분할 정도로 샀으니, 이곳에 있는 한 명한테 원한을 샀어도 이상할 건 없다.
“미궁이래서 내내 괴수랑 치고받고 싸울 줄 알았는데 재밌네.”
또 심심할까 봐, 이런 깜찍한 이벤트까지 준비해준 걸 보면 인심도 좋다.
“한별! 어떻게 할까! 둘리가 직접 쓰러뜨릴 수도 있다!”
간만의 기회라고 여긴 모양인지 둘리는 살이 뛰룩뛰룩 쪄 볼록한 배를 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래도 휴게 공간에서 얻었던 능력을 실전에서 써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은데.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면 쓰나. 있어 봐. 가만히 둬도 슬슬 나타날 거거든.”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암행복을 입은 남자들이 히죽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많이 놀랐나 보지? 혼자 가는 길 심심하지 말라고 귀하신 분들이 보내서 왔으니까. 안심해.”
“기왕이면 가는 길에 우리한테 두둑하게 챙겨주면 더 좋고 말이지.”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인지, 그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어, 왔어? 그래서 여기에 온 건 너희뿐이야?”
“형님 저 새끼 웃는데요?”
“됐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갈 꿈이라도 꾸나 보지.”
“듣던 대로 자만심 하나는 대단한가 본데, 이전에 상대한 어중이떠중이하고 비교하면 쓰나. 인생 조언을 하나 해 주자면 자기 힘 하나만 믿다간 큰코다쳐, 바로 이렇게.”
그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이끼에 불꽃이 옮겨붙으면서 사방팔방으로 먼저 나가기 시작한다.
흩날리는 잿가루와 연기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뭘 준비했나 싶었는데, 왜, 밀폐된 공간에서 중독이라도 시키려고?”
“이래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들은 재미가 없다니까.”
내 물음에 놈은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미궁에 거주하는 괴수는 습한 환경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상태라 뜨거운 것에 민감하지. 그런 와중에 여기에 불을 일으키면…… 그 뒤는 안 들어도 알겠지?”
놈은 화르르 불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놈의 말대로 불꽃이 이끼를 태우며 주변으로 번지자, 숨어 있던 괴수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온도에 자극된 모양인지 이쪽을 바라보며 침을 뚝뚝 흘린다.
보기만으로도 살벌해 보이는 풍경.
“재밌네.”
확실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겪었으면 오금이라도 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기왕 할 거면 크게 저지를 것이지 이걸로 되겠어.
“그렇게 조금씩 해서 날 처리할 수 있겠어. 둘리야 한 방 갈겨.”
“알겠다!”
내 명령에 둘리는 천장을 향해 있는 힘껏 브레스를 뿜었다.
그러자 방금 전에 일어난 것보다도 수십, 수백 배는 더한 화력이 천장 전체를 불사르며 화끈한 열기를 일으켜냈다.
드높은 천장에 맞닿은 검은 화염은 벽면을 타고 끊임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미끼가 발화제가 되어 미궁 전체에 열기가 전달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도, 도대체 뭔 짓을…….”
쿠구구구궁!
둘리가 내뿜은 브레스가 미궁에 있는 모든 괴수의 어그로를 끄는 신호탄이 되었는지, 지면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모든 괴수가 집결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드드드득, 콰앙!
벽에서부터 점점 금이 일어난다 싶더니, 이내 한꺼번에 벽이 무너져 내리며 그 너머로부터 수백, 수천 마리의 괴수들이 쏟아졌다.
징글징글하기까지 한 광경.
나는 새파래진 얼굴을 한 그들을 바라보며 능청맞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기가 판 함정에 걸리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