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네 이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내 답변에 기사는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역경을 토했다.
그의 몸에서는 당장에라도 책임을 묻겠다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지가 정반대로 꺾여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병사 앞에서 자기가 한 짓이라고 말한들 믿어 줄 리는 없지.
“지금이라도 네놈의 죄를 인정하고 진실을 밝히면 봐주도록 하지.”
기사는 혀를 날름거리며 뱀과 같은 눈초리를 짓는다.
누구 봐도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처리하겠다는 눈치다.
‘하긴 주인 앞이니까. 사소한 업적이라도 만들어서 눈에 띄겠다는 거겠지.’
내 시선이 닿는 곳에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이쪽을 지켜보는 귀족이 있었다.
이해는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싸움 구경인 법이지.
다만 그 구경거리가 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여기에선 영감님의 체면을 살려 줘서 가능하면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영감님의 손자가 있을 법한 당대였다면 모를까.
사후로부터 200년이 지난 세상이다.
여기에선 뭘 해도 그 썩을 영감한텐 미안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내 성격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지만.
“야.”
“……설마 지금 나를 부른 것이더냐?”
“그래, 새꺄. 그럼 부를 놈이 너 말고 더 있어? 안 그래도 귀찮으니까. 나불대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나는 기사를 지나쳐 귀족을 향해 발걸음을 뻗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기사는 진검을 들이밀며 이쪽을 향해 검격을 뻗었다.
그 와중에도 판단력은 있었는지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목적이 아닌, 제압하기 위한 일격.
칭찬하기 충분한 위력이었으나 나는 콧바람을 뀌었다.
확실히 잘 갈고 닦은 검이었지만, 힘이 부족하다.
‘막을 필요도 없겠네.’
대흉근에 힘을 주자, 검은 더 이상 박히지 못하고 근육에 가로막혔다.
기껏 해 봤자 피부에 흠집만 생긴 수준이다.
기사는 자신이 자랑하는 검이 갑옷도 아닌, 단순한 피부에 가로막혔다는 사실에 경악을 내질렀다.
“도,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하긴. 너도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괴수들하고 싸워 보면 알아.”
매일 같이 늘어나는 괴수의 숫자와 강함에 이겨내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수다를 떨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리를 걸어 기사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손쓸 새도 없이 지면에 나가떨어진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
“넌 거기에서 자고 있어.”
나는 손날로 기사의 목을 쳐서 기절시킨 다음, 귀족을 향해 나아갔다.
압도적인 무위에 귀족은 사색이 된 채 소리를 질렀다.
“뭐…… 뭣들 하느냐! 침략자다! 어서 저자를 포위해서 체포하거라!”
귀족은 고함을 내질렀지만, 병사들은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병사들도 바보는 아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봤으면 나와 놈들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되는진 가늠할 수 있을 터.
간단하네.
내가 나아가자 마치 바닷길이 열리듯 병사들이 뒤로 물러선다.
이윽고 귀족의 앞에 다다른 나는 그의 턱을 붙잡고는 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하나만 물어보자. 물어보는 것에만 대답하면 나도 피 볼 생각은 없으니까.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씨익 웃으며 그의 얼굴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강한 악력으로 턱을 잡힌 귀족은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웁웁! 어, 어떤 거슬…….”
“혹시 이게 뭔지 알아보겠어?”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목걸이를 놈의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죽지 않기 위해 목걸이를 필사적으로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
‘쯧, 결국에 얘도 모르나 본데.’
그럼 그렇지, 이깟 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뭘 기대하겠어.
나는 턱을 잡은 채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귀족은 흙바닥을 구르다 말고, 성문에 얼굴을 박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은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그들의 도움에 제자리에서 일어난 귀족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크윽! 이, 이빨이!”
충격으로 귀족의 이빨이 강냉이처럼 우수수 빠졌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성벽 위에서부터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수십 명의 궁수가 집결해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뒤늦게 도착한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며 주위를 포위한다.
적이 아니었다면 나조차도 감탄할 만한 속도.
옆을 보니, 또 언제 상황을 꾸몄는지 귀족은 얼굴에 피를 칠칠 흘리며 웃고 있었다.
“끌끌끌, 이제야 네놈의 추태를 알겠더냐. 한순간의 실수가 결국 평생을 그르치는 것이지. 이걸로 네놈도 한 줌의 빛도 안 들어오는 감옥에서 영원히…….”
“한 번 맞고 나니 이게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대담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가차 없이 양 뺨을 번갈아 때렸다.
짜악! 짜악 짜악!
“크윽! 큭! 큭! 자… 자… 잠깐만!”
“맞는데 잠깐이 어딨어.”
안 되겠다. 넌 기본도 안 되어 있네.
일단 정신 차릴 때까지 맞자.
귀족은 내 손에 붙들린 채 정신없이 처맞기 시작하더니, 이내 뺨이 시퍼렇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가도 잠시.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털기 위해 한숨을 돌리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악동 같은 웃음을 지었다.
“너흰 뭐 해? 얘 죽을 때까지 구경만 할 거야?”
“큭…… 불경한 놈 같으니라곤. 기어코 인질을 붙잡고 협박까지 하다니….”
내 물음에 기사는 몸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그의 말을 통해 기사들이 구경만 하는 이유를 깨달은 나는 이죽거렸다.
‘아아, 아까부터 구경만 한다 싶더니만 이놈 때문이었어?’
어쩐지 아까부터 안 덤빈다 싶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못 이뤄 줄 것도 없다.
나는 손에 쥔 귀족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이거면 내 손에도 인질이 없지?”
그러면 너희가 그렇게 바라는 대로 덤벼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들은 결국 내가 인질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의 상황으로 불리한 건 내가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병사들과 격돌하기 바로 직전.
“멈춰라!”
또다시 성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소리친다.
줄줄이 이어지는 제삼자의 행렬에 나는 못마땅한 얼굴을 지었다.
“아씨, 이것들이 싸울 거면 한 번에 붙으면 될 것이지. 왜 따로 나오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주먹을 쥐려는데, 왠지 모르게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기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들의 목소리는 쥐 죽은 듯이 잦아들었다.
그것은 비단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게 발버둥 치던 귀족마저도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뭐 하는 놈이길래. 다들 호들갑이야.”
흥미로운 시선으로 소란이 일어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 웅장한 행렬 속에서 허리춤까지 올 법한 크기의 드워프가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기사들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드워프의 왕을 배알하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저 땅딸보 같은 놈이 이놈들의 대가리라는 거지?
살다 살다 드워프의 왕까지 만나는 경험까지 겪을 줄은 몰랐지만,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본격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검을 뽑으려는데, 드워프의 왕은 가벼운 목례를 하며 물음을 건네 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겠지만 이런 상황을 겪게 하여 죄송합니다. 하여 실례가 아니라면 예의 그 물건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찾았다.
그 영감탱이의 징표를 아는 사람을 말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허공에 길게 늘어뜨렸다.
가까이 다가와 목걸이를 자세히 살펴보던 드워프는 자기가 말한 주제에 뭐가 그리도 놀라운지 헛숨을 들이켠다.
곁으로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 태연한 척을 하는 듯했으나, 내 눈은 못 속인다.
한참 동안 목걸이를 살피던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군사를 뒤로 물렸다.
“귀인을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순순히 물러날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런 태도로 나올 것이지.
“아, 근데 잠깐만 있어 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거든.
국왕의 부름을 무시하곤, 나는 한쪽 구석에서 창백한 얼굴을 한 귀족 앞에 섰다.
분위기상 모르는 체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인 듯했지만, 내 레이더망을 벗어나기엔 부족했다.
나는 입가를 쫘악 늘어뜨리며 귀족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가기 전에 볼일은 마저 끝내고 가야지.”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지켜보는 한 가운데에서 멱따는 울음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 * *
직후, 나는 드워프왕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을 향했다.
드워프산 특제 다과를 즐기며 있을 무렵.
마주 앉아 있던 드워프의 왕은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의문을 입에 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그 목걸이는 어디에서….”
그는 내 눈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엔 20대 남짓인 인간이 200년 전에 죽은 고인의 물건을 갖고 왔으니 출처가 궁금해질 만도 하지.
나는 꿀로 만든 과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어디에서 얻었긴, 내가 그 영감님한테 직접 받은 거야.”
“지, 직접 받은 것이라니!”
다른 사람들처럼 의심하며 좀 더 파고들 줄 알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드워프의 왕은 수긍하며 넘어갔다.
보통 이런 대답을 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서 부정부터 하지 않던가?
뭐… 그런 사소한 건 그다지 상관없으려나.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고 넘어가면 나만 편한 셈이니 상관없었다.
‘영감님이 왕실 쪽에만 따로 일러둔 이야기라도 있었겠지.’
그런 추측을 하기도 잠시.
드워프의 왕은 자신의 위치도 잊은 모양인지 사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큼큼, 다른 건 아니라. 조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만, 혹시 당대의 토벌대장님은 어떤 이미지셨습니까?”
그 노인네의 이미지라….
하긴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쩨쩨하게 남을 시험하기나 했으며, 기껏 물건을 산다고 해도 제값이 아니면 토라지기까지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사소한 정보조차도 알려주지 않아서 헛걸음질을 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죽은 지 200년이나 지난 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구라까지 쳤었지?
이거 다시 떠올리니까. 좀 화나네?
다음에 시간이 생기면 다시 6층에 내려가서 따지든가 해야지, 원…….
지금까지 만났던 영감의 이미지를 전부 종합하자면 결론은 하나였다.
“뭐긴 뭐야. 장사치였어.”
“……예?”
간결한 내 대답에 드워프의 왕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자신이 동경하는 이미지가 박살 난 듯한 얼굴.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바람을 후 불렀다.
“그것도 양심 따윈 엿이랑 팔아먹은 장사치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