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92화 (92/175)

제92화

제국의 황제는 오늘도 어김없이 왕좌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원로원들과 매주마다 있는 정기 회의를 끝마친 직후.

황제의 앞에는 그들로부터 받은 탄원서나 각종 복잡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정치, 경제, 군사 등등, 중요한 내용이 담긴 서류들로 다음 회의가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해치워야 하는 안건들이었다.

“후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들에 그는 시가를 깊게 빨았다가 뱉었다.

새하얀 연기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운다.

그는 시가를 내려놓고는 도수가 높은 술을 들이켰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 이 나라는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외세의 침략과 흉작이 없으며, 상업 또한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잘 굴러간다.

하지만 그는 술을 전부 들이켜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밖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안에서 말썽이니… 원.”

그렇다.

이 나라는 바깥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서서히 문드러지고 있었다.

각종 기득 세력들은 어떻게든 파이를 더 가져가려고 안달이었으며, 유력 귀족들로 이뤄진 원로원은 호시탐탐 왕실의 권력을 노렸다.

‘윗대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이 나라가 건국될 때까지만 해도 왕실의 권력은 그 어디와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튼실했었다.

개국 공신이자 왕실을 수호하는 검인 토벌대장이 존재했었기에.

비록 과거라고 하지만, 토벌대장의 명성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져 올 정도.

“한 손으로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른다고 했었던가.”

그런 인재가 황실의 편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쥔 글라스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암만 토벌대장이 대단하다고 한들 과거의 영광에 젖어 있을 새는 없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지금의 사람들이다.

‘예로부터 허황한 과거를 그리는 것은 망조의 징조라 하였다.’

암만 토벌대장이 대단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과거.

시대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의 구전 속에서 와전됐을 이야기도 많이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는 놓칠 수 없는 미련 하나가 존재했다.

[잘 들어라. 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본인의 후계자가 성안으로 들어오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분명 징표를 지니고 있을 테니 그걸 잘 확인하거라.]

그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토벌대장의 유언은 현재까지도 황실의 비밀로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구전되는 내용이었다.

“무려 200년이 지났는데 그런 허황된 소문이 진짜일 리는 없겠지.”

그렇지.

그럴 테지.

진짜로 토벌대장의 후계자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죽어서 육신이 토지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왜일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자꾸만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은.

그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국정에 심신이 지쳐 있었기에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리라.

그는 웃음을 삼키며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삼켰다.

술에 취해 탁상에 있던 오래된 술을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쿠웅!

문이 과격하게 열리며, 급박한 낯빛의 귀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귀족의 등장에 그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무리 권세 귀족들과 원로원으로 인해서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은 묵인할 수 없었다.

그가 격앙된 표정으로 책상을 내려치려고 할 때였다. “폐, 폐하! 당장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궁궐 내에 자기가 토벌대장의 손님이라고 주장하며 날뛰는 자가 있습니다!”

귀족의 말에 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손에서 놓쳤다.

“지, 지금 뭐라고 했나?”

지금까지 마시고 있던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 * *

왕궁 내가 소란스러워지기 불과 몇 시간 전.

나는 위병소 앞에서 병사들을 향해 짧게 뇌까렸다.

“그거 도로 주워.”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턱짓하자, 드워프 병사들은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히죽거리며 폭소했다.

“내 살면서 이런저런 소리는 다 들어 봤다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저걸 주우라고? 나 참 어이가 없구먼.”

“꼬맹이가 겁을 상실했나. 토벌대장님을 허물없이 부르다 못해 누구더러 이래라저래라야. 조금만 더 가다간 토벌대장님의 손님이라고 이름을 대겠어? 크흐흐.”

“어, 맞는데? 안 그래도 그 노인네의 부탁으로 온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하씨… 오늘 왜 이렇게 운수가 좋나 싶었는데. 진짜 또라이한테 걸렸네. 야, 난 귀찮으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이 새끼가 진짜로 돌았나. 네가 진짜로 토벌대장님의 손님이라면 이백 살이 훌쩍 넘겠구만 어디에서 구라야!”

“그건 아니긴 한데.”

“그러면…….”

“따지고 보면 네가 말한 이백 살보다도 훨씬 많지.”

그의 물음에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대답했다.

비록 신체 나이는 2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신 연령은 천 살이 훌쩍 넘는다.

“……그래서 네가 토벌대장님을 만난 건 언제라고?”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쯤인가?”

“…….”

진지하게 손가락을 세어 가며 계산하자, 그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그쪽의 나이가 천 살이 넘는데, 이백 년 전에 죽은 토벌대장님하고 불과 몇 달 전에 만났다는 뜻이지.”

“그런 셈이지.”

아주 정확하다. 이제야 말귀를 잘 알아듣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일하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보겠네. 네가 토벌대장하고 아는 사이면 난 토벌대장의 직속 친척이여!”

“그게 뭔 개소리야.”

“…….”

쓰벌 안 그래도 슬슬 빡치려고 하는데, 이 새끼는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내가 정색하며 딱딱하게 반응하자, 그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슥 돌린다.

“암튼 바쁘니까. 일 없으면 괜한 사람 방해하지 말고 꺼져.”

병사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발로 걷어찬다.

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검집을 휘둘러 놈의 앞을 가로막았다.

있는 힘껏 걷어찬 모양이지만, 병사가걷어찬 검집은 마치 거목처럼 우뚝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어? 어떻게 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병사는 당황했는지 주춤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놈을 향해 말했다.

“난 두 번 이상 말 안 해. 그거 다시 주워.”

병사는 내 눈빛을 보고 움츠러들었으나,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이게 돌았나! 감히 누구 앞에서 무기를 꺼내. 지금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해라!”

“그게 네 대답이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목을 가볍게 풀며 앞으로 다가갔다.

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중압감에 그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한 손으로 주먹을 붙잡고는 역방향으로 꺾어버리자 뼈가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병사가 입고 있던 갑옷이 찌그러졌다.

“끄아아아악!”

팔뼈가 부러진 병사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내, 내 어깨! 어, 어깨가!!”

“쓰읍, 어깨도 같이 탈골된 건가? 적당히 힘 조절한다고 했는데, 역시 플레이어들보단 훨씬 약하네.”

내 딴에는 그것조차도 약하다고 느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는 힘 조절해서 뼈만 확실히 부러뜨려야겠네.”

“히, 히익!”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이를 듣고 있던 다른 병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마나 겁을 먹은 모양인지 바지가 축축하게 젖으며 바닥에 흥건한 웅덩이가 생겼다.

명색이 다 큰 놈이 지리다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털었다.

“야.”

“네, 네… 넵!”

“얼씨구? 언제는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대답은 또 빠르네. 그래서 안 주울 거야?”

“줍다니 도대체 뭘…… 아!”

말하다 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진 원인을 깨달은 병사는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어다 내 쪽으로 건넨다.

나는 목걸이를 받아 들며 짙은 웃음기를 흘렸다.

“그러게, 한 번에 끝내면 될 걸 뭘 그리 번거롭게 하고 있어.”

고맙다면서 어깨를 두들기자, 손바닥 자국과 함께 갑옷이 움푹 들어가면서 병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몇 번의 충격만으로도 금세 탈골이 된 모양인지 병사의 팔이 흐느적거렸다.

“아아악! 내, 내… 팔이!”

“어?”

겨우 이걸로 부러진다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손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뼈가 아니라 수수깡 아냐?

“근데 얘네들은 왜 이렇게 허약해?”

명색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이렇게 약할 수가 있나?

예상 밖의 상황에 나조차도 놀라고 있을 무렵,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보기에도 화려한 중갑을 착용한 기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무리의 한가운데에는 꽤나 지위가 높아 보이는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있었다.

귀족을 호위하던 무리는 이쪽을 주시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쪽을 향해 다가와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그중에서도 가장 권력이 높아 보이는 기사가 인상을 찌푸린 채 현장을 둘러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건…… 네놈이 저지른 짓인가?”

마치 책임을 추궁하려는 말투.

그의 눈빛을 본 나는 한 번에 알아차렸다.

저것은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물어보는 게 아닌, 책임을 묻기 위한 상대를 찾으려는 뱀의 눈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했지만,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어, 그렇긴 한데.”

의도한 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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