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흡사 사생팬 아니, 그 이상의 존재를 보는 듯한 눈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저들의 입을 거치면 어떠한 파급효과가 벌어지는진 이미 커뮤니티를 통해서 뼈저릴 정도로 학습했다.
단지 휴게 공간의 사진을 찍어올린 것으로 며칠 내내 커뮤니티 최상위에 박제가 되었으며.
탑을 등반하면서 내가 남긴 흔적을 영구 처리하는 짓거리를 일삼는 게 저들이다.
특히나 내가 먹다 남은 바나나가 엄청난 가격에 팔린 것은 지금 떠올려도 손이 떨릴 정도다.
서두로 내뱉을 말을 신중하게 고르려는데, 누군가가 먼저 선수를 챘다.
“어? 29층이 스킵된다고?”
“미친, 진짜네! 신협께서 클리어 하셨다고!”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럼…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있었던 거네.”
그 말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층 하나 클리어했는데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부를 건 없을 거 같은데.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신협!! 여기에다가 사인해 주세요!”
“저도요!”
“신멘!! 저도 부탁드릴게요!”
곁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팬 사인회처럼 느껴질진 몰라도.
근육으로 가득한 성인 남성 수십 명이 상하의 모두 내 얼굴로 도배된 옷을 입고서 종이를 들이미는 장면은 충격을 일으켰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과감히 입고 있던 상의를 탈의까지 했다.
거리낌이라곤 눈꼽 만큼이나 안 보이는 태도.
단순히 옷부터 시작해 무기, 심지어는 팬티나 은밀한… 아,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 같으니 그만 생각하자.
졸지에 층 한가운데에서 팬사인회가 개최되자, 자연스레 다른 플레이어의 이목까지 집중되었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래?”
“너 몰라? 신한별이잖아.”
“아아, 요즘에 커뮤니티에서 말 많은 그 사람?”
“신협단이라는 곳에 미친놈들이 많다고 해서 신한별도 망나니일 줄 알았는데 듣기보단 멀쩡하게 생겼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어쩌다 보니 어그로를 끌어버린 모양이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다.
신협단 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과 귀도 있으니 오해가 생길 일도 없겠지.
오해를 끊어버릴 한 번 뿐인 기회.
나는 마지막 한 명까지 둘러보며 결심을 다졌다.
‘여기서 내가 끊어야 해.’
비록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신협단의 이미지는 갈 때까지 가버렸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나서서 전부 해명한다면 아직까진 여지는 남아 있을 만했다.
빠른 결심 끝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의 집중을 모았다.
“잠깐만 있어 봐. 꼭 할 말이 있는데.”
“다들 조오오용! 신협께서 할 말씀이 있으시단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등짝에 사인을 마치고 말하자, 남자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고함에 소란이 멎어들었다.
마지막인데 뭐 어때.
조금은 난리치도록 만들어도 된다.
오히려 그편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기엔 적당할 테니.
말은 간결하고 의미는 오해할 여지가 없이 전달될 수 있도록, 그리고 신협단은 여기에서 끝이라고 선언한다.
이보다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말씀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미리 준비한 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용도로 단상을 공수해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생각하길 멈췄다.
알았다간 수치사 해 버릴 거 같거든.
나는 준비된 단상 위에 올라서 눈을 질끈 감으며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뗐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너희들도 충분히 알겠지만, 탑을 등반하는데 사소한 집단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앞으로 탑은 내가 책임지고 클리어할 테니까. 걱정 말고 신협단은 여기에서 끝….”
그렇게 예정한 대로 대사를 끝맺기 바로 직전이었다.
〈띠링!〉
〈29층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귀청을 울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당연히도 내 목소리는 알람 소리에 묻혀 버렸고.
하늘에서 떨어진 섬광으로 인해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전이를 시작한다.
당연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나는 휘몰아치는 섬광 속에서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잠깐만! 아직 말을 전부 안 끝냈….”
〈30층, 휴게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 * *
〈30층은 휴게 공간입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님의 업적을 기반으로 구성이 됩니다.〉
〈4시간 1분 뒤에 31층으로 전이됩니다.〉
눈을 뜨자, 어느새 주변 풍경은 바뀐 상태였다.
휴게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나는 몸에 긴장을 풀었다.
체감상으론 정말 수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다.
탑에선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데 막상 얼굴을 보자니 폭삭 늙은 것 같다.
마지막 29층에서 정신적인 노동을 해서 그렇겠지.
“분명 마지막에 말하다가 끊긴 거 같긴 한데 뭐, 괜찮겠지.”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시시콜콜 이야기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다.
휴게 공간으로 주어진 시간은 4시간.
지금까지와 비교해도 2배가량 시간이 늘어났다.
“늘어나는 게 당연하지. 그동안 한 일이 도대체 몇 개인데.”
“한별의 말이 옳다!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내가 구시렁거리자, 후렴구를 붙이듯 둘리가 품속에서 나타났다.
녀석의 모습에 나는 둘리를 내팽개치듯 침대 위로 던졌다.
“넌 숟가락만 얹었잖아.”
“아니다! 한별! 나도 이번에는 한 명분을 충분히 해냈다.”
“그래서 플레이어 한 명분으로 만족하려고?”
“끄응… 그건 아니지만….”
짓궂은 얼굴로 되묻자 둘리는 뜨끔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아무렴 당연하지. 고작 1인분으로 만족할 거였으면 그대로 드래곤 통구이 1인분으로 만들었을 테니.
그렇게 둘리와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쯤, 시스템창이 생성되었다.
〈29층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지.”
잠시 까먹고 있었네.
보상 목록을 확인한 나는 옅은 웃음기를 띄었다.
29층 클리어 보상은 총 두 개, 29층의 스킵권과 S급 확정 뽑기권이다.
나는 뽑기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말고 속물적인 웃음을 지었다.
‘기왕 얻은 거 지금 써버릴까.’
하긴 아끼면 똥만 되는데 쓸 땐 확실히 써야지.
기왕 아티팩트를 받았는데 방치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원래 갸챠는 즉석에서 해야지 재밌는 법이니까.
아티팩트를 사용하자, 깃털이 떨어지는 임팩트와 더불어 오색빛깔의 물건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장면.
이윽고 뽑기권에서 나온 물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아리송하게 구겼다.
이걸 뭐랄까. 툭 까놓고 말해 S급 아티팩트 치고 좋은 편도 아닌데.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은데.’
〈인연의 증표(S)〉
- 펫과 연결(귀속)됩니다.
- 펫이 성장률에 따라 주인의 스탯이 일부분 성장합니다.
- 블루투스 같다고 느낀 당신에게~ 감이 좋네요! 대충 비슷해요!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나와 둘리의 뒷덜미에 깃들었다.
잠시 따끔하면서도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각.
말로는 이루 설명하긴 어렵지만, 정신적으로 둘리와 이어진 기분이 들었다.
당장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나는 포켓 안에 묵혀뒀던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별꿀 환단(S+)〉
- 별꿀 파라다이스의 명물, 난향초접밀의 꽃잎으로 제조한 영약!
- 맛은 괴랄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두근두근, 섭취 시 어떤 효과가 일어날까요? 어쩌면 탈모를 치료할 수 있는 경이를 보여줄지도?!
※ 주의! 펫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쩐지 허전하다 싶었네.
이것까지 있으면 시너지 효과로는 충분하지.
환단을 둘리한테 건네자, 녀석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으음, 한별 이게 뭔가?”
“몸에 좋은 거니까. 그대로 삼키면 돼.”
아무런 의심 없이 환단을 꿀꺽 삼키는 둘리.
얼마 뒤, 둘리는 자신의 혀를 부여잡고는 괴롭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했다.
“우웩! 한별, 이거 엄청 고약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맛 하나는 시스템이 직접 보증했으니 심각하기야 하겠지.
얼마나 맛이 괴랄한 모양인지 둘리는 침대 위에서 방방 날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약효가 돌기 시작했는지, 둘리에게서도 눈에 띌 정도로 변화가 일어났다.
비늘이 우수수 솟아나는가 싶더니.
방안 전체를 채울만한 증기를 내뿜으며 둘리의 몸은 휴게 공간을 전부 채울 정도로 성장해나간다.
갈기부터 시작해 날개, 손톱까지 헌앙한 성채의 것.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드래곤을 완벽히 재현한 모습에 나는 넋을 잃은 채, 둘리를 바라봤다.
“한별? 한별이 갑자기 개미처럼 줄어들었다! 아니, 둘리가 커진 건가!”
둘리의 말을 듣다 말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몸은 성장했으면서 저 모자란 어휘 능력은 그대로야?
비단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S급 아티팩트인 인연의 증표 덕분인지 내 신체 능력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마치 도핑이라도 한 기분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조금 어휘 능력이 별로면 어때.”
언어능력이 싸움에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둘리의 등을 두들겼다.
그러자.
퍼엉!
방금 전과 똑같이 증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둘리의 신체는 해츨링일 때로 다시 쪼그라들었다.
“어, 뭐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자, 둘리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아하하… 힘을 푸니까. 되돌아오네.”
“…….”
“그, 그래도 다시 힘을 주면 방금 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둘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제자리에서 커졌다 줄어들었다고 반복했다.
자욱하게 일어난 연기를 바라보던 나는 실소를 흘렸다.
“시발, 괄약근도 아니고 힘 풀면 줄어드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이거 누가 봐도 남자의 생식기… 이 이상은 추한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할까.
그 난장판을 몇 번이고 실험하고 나서야 돌아가는 매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었다.
‘최대로 변신할 수 있는 시간은 1분 남짓, 연속으로 변할수록 시간이 줄어드는 방식이네.’
다소 제약이 있어도 썩 나쁘진 않은 수확이었다.
둘리가 1분이라도 성체로 변할 수 있다면 막강한 전력이니까.
그렇게 자그마한 소란이 마무리 지어갈 때쯤, 시스템음이 들려왔다.
〈쪽지가 왔습니다.〉
갑작스레 온 쪽지.
쪽지를 열어보기도 전이지만, 누구에게서 온 건지는 대략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나한테 쪽지 보낼 사람이 유채아 말고는 어딨어.’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쪽지의 상대는 유채아였다.
[유채아: 한별씨 오래간만이에요. 이따금 한별 씨의 소식을 전해 듣는데, 듣자 하니 30층이라면서요? 이제 제가 있는 곳까지는 곧이겠네요.]
쪽지만으로도 느껴지는 명량함에 피식하며 유채아에게 답변을 보내던 때였다.
그녀는 곧바로 다른 쪽지를 보내왔다.
[유채아: 그나저나 저희한테 해주신 말, 그건 책임져 주실 거죠? 정말로 기대하고 있을게요.]
네?
갑자기 무슨 책임이요?
뜬금없는 그녀의 폭탄 발언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문득 든 불안감에 곧바로 커뮤니티를 열었고.
그리고 내가 느낀 불안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속보!〉
〈신협단 마침내 대형 길드에게 선전포고 선언, 신한별 “탑 등반에 구시대적인 길드 필요 없어. 탑은 나 혼자서도 거뜬하다.”〉
“돌겠네.”
미친놈들의 난봉에 이어서 이번에는 탑에 대한 선전포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