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9화 (89/175)

제89화

짤막한 내 발언에 살얼음 위를 걷듯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당장 무슨 일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런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것은 신격이었다.

“갑자기 웬 놈인가 싶었는데, 네가 그 소문의 신한별이라는 녀석이구나.”

한쪽 다리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파인 치파오를 입은 미인이 부채를 촤악 펼치며 앞으로 나선다.

손끝 하나하나가 매혹적이다 못해 요염하게 느껴지는 여인.

하나 그녀가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흡사 잔뜩 독이 오른 독사와 같았다.

그녀는 아래에서 위로 스윽 훑어보는가 싶더니,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평가를 내렸다.

“뭘 믿고 막무가내로 질렀나 싶었는데, 확실히 그만한 실력이면 믿고 깝칠 만도 하네.”

철저하게 상대를 위에서 평가하는 고압적인 태도.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시당한 적은 잘 없었는데 이런 기분도 꽤 신선하네.

아, 물론 그 세월 중 99.9%가 제대로 된 지능도 없는 괴수지만.

미인계? 고압적인 태도? 전부 까라고 해라.

나는 가소롭다는 듯 발끝에 닿은 신격의 머리를 걷어차며 물었다.

“그래서 너도 이놈의 곁으로 가고 싶단 얘기지? 말만 해 언제든 보내 줄 테니까.”

“아아, 그놈? 그놈은 죽어도 싸. 자기 위치 하나만 믿고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깝치는 놈. 구태여 네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

분명 동료였을 터인 놈이 숨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쌀쌀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장난감을 보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게 질문을 건넸다.

“넌 내 손에 죽을 텐데, 상대방의 이름은 알아 봤자 나쁠 건 없잖아? 나는 독존, 당소소란다.”

“신한별.”

“알고 있단다. 그리고 이미 끝났기도 했지.”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활짝 펼치자, 극독이 사방으로 난무하며 만천화우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서슬 퍼런 비수가 햇빛에 반사되면서, 흡사 화창한 하늘의 여우비를 보는 듯한 아리따운 광경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렸다.

만약 멋모르는 이가 봤다면 저 광경에 시선이 팔린 채 순식간에 뒈졌으리라.

그러나 제아무리 강력한 극독도, 베이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수도 내 앞에선 소용없다.

나는 무신경하게 손으로 걷어 내며 되물었다.

“글쎄, 준비한 건 이것뿐이야? 이게 전부라고 하면 실망인데.”

“마, 만천화우가 어떻게…”

그야 익숙하거든.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수천 도에 달하는 용암이 하늘에서 매일같이 쏟아지고, 괴수의 이빨에 100년 내내 박히는 경험에 비하면 선녀다.

저년의 실력도 대충 알겠다.

“그럼 더 볼 건 없지.”

순식간에 그녀의 정면에 파고든 다음, 정권을 내찌른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그녀의 몸은 간단히도 나가떨어졌다.

곁으로 보면 완벽한 일격인 듯 보였으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공격은 확실하게 명중했다.

그 증거로 그녀는 복부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당장에라도 숨이 꺼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을 모였다.

아니, 말은 정확히 해야지.

당장 죽을 듯이 보여도 결국엔 숨이 끊어지진 않았잖아. 그럼 끝난 게 아니다.

이질적인 감각에 손바닥을 쥐락펴락하자, 그녀는 꼴 좋다는 듯 피를 줄줄 흘리며 천박한 웃음을 소리를 냈다.

“푸하하하, 벌써 약효가 돌기 시작했나 보네. 독이야, 그것도 무형지독. 설사 네가 만독불침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해독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이미 늦었단 말이지.”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정권을 내찌를 때 손목이 따끔거렸다 싶었는데, 그때 당한 거였나.

이윽고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미리 짜두기라도 하듯 주변의 신격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친다.

눈에 안 띄는 장소에서 잠복하고 있던 신격까지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꿰어내기 위한 연극이다.

헌데.

“몰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훗, 언제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을 부릴 수 있을까. 그래봤자 허울뿐일 텐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던지.”

난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결과야 직접 까보면 될 일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신격을 하나하나 처리하자,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샛노래졌다.

미리 준비한 습격은 간단히 간파당했으며.

물량으로 한꺼번에 들이닥친 신격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산송장이 되었다. 심지어는 함정조차 안 통하기까지 한다.

상식선을 벗어난 상황에 놈들 사이에서도 내부 균열이 벌어졌다.

“독존! 네 이년 우리를 배신한 것이더냐! 크윽, 한낱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도대체 뭘 거래한 거지? 우리들의 시체? 돈? 아니면 네년의 몸뚱이라도 바친 모양이지!”

마지막까지 플레이어에게 참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인지, 신격은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니야! 상식적으로 플레이어한테 붙었을 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거지? 독이 무조건 통한다고 신신당부한 건 네 년일 텐데.”

신격은 이를 빠득 갈며 그녀를 탓하기 시작한다.

익숙한 광경에 나는 제자리에서 구경을 했다.

역시 남탓이라는 유구한 역사는 인간한테만이 아니라, 신격한테도 그대로 통용되나 보다.

물론 정치질을 당하는 당사자한테는 억울하겠지만.

“지금쯤이면 하당신부터 불에 타들어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침과 오줌을 모두 지렸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의기양양하게 시작되던 말은 결국 떨떠름한 의문으로 끝을 맺는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계획은 완벽했을 텐데? 서, 설마 독이 안 통한 건가.”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제 머리를 난폭하게 쥐어뜯었다.

남자를 사로잡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여기에 남아있는 건 그저 죽지 못해 추해진 모습뿐.

얼핏 보면 스텐드업 코미디 같은 소리에 옅은 웃음기를 띄웠다.

아무래도 내부분열이 일어난 모양인데, 벌써 그러면 곤란하지.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장단에 어울려 줄까.

나는 안색 변화 하나도 없이 오랜 친구에게 말을 걸듯 내뱉었다.

“여어, 역시 연기 하나는 깔끔한데. 깜빡하면 나도 속을 뻔했어. 한끗 차이로 독에 당해서 뒈질 뻔했다니까.”

당소소를 향해 발길을 뻗자, 주변에서 살벌한 눈길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쉽사리 덤비진 않았다.

이미 내가 지닌 실력을 충분할 정도로 겪어서.

주변의 분위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그녀가 쥐고 있는 비수를 걷어냈다.

“어이쿠, 거기 칼침 조심하고. 이젠 연기도 안 해도 괜찮아. 이미 우리 쪽으로 다 넘어온 게임인걸.”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찢어진 복부에서 핏물이 새어 나오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유채아로부터 받은 마비 독을 정맥에 주입했으니, 말은커녕 허튼수작도 못 부리리라.

독존이라는 별호를 달고 있으니 제 몸에 대해선 모를 리는 없겠지.

내가 친근한 태도를 보이자 신격들로부터 빛바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살기의 대상은 내가 아닌, 독존, 당소소.

“대답해 봐라! 네가 원하는 게 결국 이것이라 말이지!”

“…….”

“침묵은 곧 긍정이렷다. 역시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던 게야.”

동료의 살기를 한 몸에 받은 그녀는 혈색이 희게 변했다.

이대로 내가 이기더라도 죽고, 신격이 승리하더라도 죽는다.

그야말로 외통수.

그녀에게 있어선 절망적인 상황일 테지만, 나는 거기에다가 한술 더 떴다.

“어어? 뭐라고? 손속을 봐줄 필요는 없으니 저놈들을 전부 처리하라고?”

과장스럽게 양팔을 펼치며 말한다.

“네 이년! 그 방자한 아가리를 내 손으로 직접 찢어발길 것… 크어억!”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신격은 격앙된 목소리로 반발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말을 전부 잇지 못했다.

그 전에 목과 몸이 분리된 채 쓰러졌기에.

나는 검을 목에 겨누며 싱긋 웃어 보였다.

“되도록 오해는 하지 마. 너흴 사주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그 한마디를 끝으로 신격들의 목이 처참하게 분리되었다.

누가 봐도 군더더기 없는 아주 깔끔한 일격.

한 번의 칼질로 대다수를 처리한 나는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마비 독을 해독하자, 당소소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네, 네가 원하는 대로 연기는 다 했잖니? 응? 그러니까 제발 나만 못 본 채하고 넘어갈 수 없….”

“아 그래? 그런데 그런 것치곤 손톱에 힘이 꽤 들어간 모양인데.”

“……!”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예리하게 깎아낸 손톱을 내찌른다.

당연히 그 끝에 묻은 건 독.

상대할 것도 없다.

간단히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손목을 잘라낸 후, 그녀의 몸을 단칼에 잘랐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었기에 주저는 없었다.

“피차 살려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걸로 쌤쌤이네.”

나는 그녀의 시체를 뒤로 하고 물러섰다.

〈주어진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곧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신한별 플레이어가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여 29층이 스킵됩니다.〉

아주 깔끔한 마무리.

나는 일괄적으로 떠오른 시스템창을 무시하며 숨을 도로 내뱉었다.

그렇게 몸을 돌리던 나는 어떤 무리와 눈이 맞붙이 친 채, 제자리에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절망과 해탈.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직감과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신멘!”

“쥐엔장! 역시 믿고 있었다고! 우유빛깔 신이인협!”

“엄마 난 커서 신협이 될 거야! 엄마!! 난 정말로 장래 희망이 신협이…….”

나는 직면한 골칫거리들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저것들이 남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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