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7화 (87/175)

제87화

계약 제안이 온 신격은 총 37군데.

단순히 숫자만 보고선 이게 많은 편인지 아니면 적은 편인지 감이 영 안 잡힌다.

참고를 위해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펴본 나는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오, 나쁘진 않은데?”

플레이어들의 말을 들어보니 나한테 온 신격들의 제안 수는 대형 길드 루키들의 약 열 배가량.

좀 잘 나가는 플레이어의 평균이 서너 곳 정도의 제안을 받는다고 하니 두말할 여지는 없겠지.

사실 내가 마지막 순번이 아니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더 많은 제안이 몰렸을지도 모른다.

의도친 않았지만, NTR를 해버린 셈인가.

뭐, 어때.

‘그게 꼬우면 나보다 더 잘하든가.’

탑은 철저하게 실력지상주의.

새삼스럽긴 해도 반박할 만한 거리는 없겠지.

그나저나 슬슬 신격을 골라야 할 때도 다 된 거 같은데…

“누굴 고르면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원초적인 의문을 내뱉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한두 곳이면 몰라도 숫자가 자그마치 십 단위가 넘어가니까. 섣불리 결정이 안 내려진다.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말을 내뱉자, 신격들은 필사적으로 자기 PR을 시작했다.

〈명왕, 하데스가 당신을 뚫어지라 주시합니다.〉

〈무신, 을지문덕이 과거의 인연을 어필합니다. 이대로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많이 섭섭해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존, 당소소가 입가를 가리며 미인계를 발동합니다.〉

〈빙신, 방구석 여포가 당신을 향해 고민할 가치가 있냐고 꾸짖습니다.〉

……

신격들의 열렬한 구애를 하나하나 읽어보다 말고 콧방귀를 뀌었다.

“마지막에 병신 방구석 여포는 뭐야.”

아 병신이란다, 병신이 아니라 빙신이지. 하도 비슷한 어감이라서 헷갈렸네.

내가 보기엔 거기에서 거기처럼 보이지만.

한창 심혈을 기울여 가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28층의 특전으로 신격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명한 방울 소리와 함께 주어진 탑의 보상에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안 써 봤자 똥만 될 테니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지금 당장 리스트 띄워.”

내 말을 끝으로 신격과 관련된 정보가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전부 떠올랐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한눈에 보기도 편하다.

그중에는 이름만 거창하지 실상은 능력치가 C급인 신격도 더럿 존재했다.

“잠만 저 병ㅅ… 아니 빙신이 S급 신격이라고?”

〈빙신, 방구석 여포가 당신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며 언제든 선택하라고 합니다. 자신을 선택하면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자신합니다.〉

〈무신, 을지문덕이 자신의 경쟁자들을 견제합니다.〉

신격들의 열렬한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다 좋은데….”

나는 말을 흐리다가 말고,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는 탐욕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지. 너희들은 기본적인 예절도 안 배웠나 봐? 남한테 사업을 제안하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지.”

솔직히 난 누굴 선택하든 간에 상관없다.

수많은 신격 중에서 단 한 명만 선택하는 건데, 쉽게 선택할 순 없잖아.

직접 성의를 보이라며 자극하는 발언에 대다수의 신격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당신의 발언에 신격들은 분노합니다.〉

〈한낱 플레이어 따위가 자신들과 맞먹으려고 하는 거냐고 따지며 눈을 부라립니다.〉

〈몇몇 신격들이 투덜거리며 당신으로부터 손을 뗍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격들은 하나 같이 역정을 쏟아 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모두가 잠잠해진 틈을 타, 방구석 여포가 선수를 채고 치고 들어왔다.

〈띠링!〉

〈방구석 여포가 당신에게 후원합니다.〉

〈방구석 여포가 당신에게 손을 뻗으며 제안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후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신격들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이르러서 뒤처질 순 없다는 군중심리 때문일까.

신격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후원하기 시작했다.

초급자 지원 세트, 포션, 영약, 무기 등등 다양한 보상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후원리스트를 확인해 보던 나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쌓였으면 충분하겠지.’

이만큼이나 받았으면 29층에서의 보상을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메꾸고도 남으리라.

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리스트를 보고 있자, 신격들도 초조해진 모양인지 한두 마디를 거들었다.

〈방구석 여포가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무신, 을지문덕은 제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닦달합니다.〉

그들의 반응을 살피던 나는 확신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엔 공짜는 없다.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는 법.

단순히 플레이어들을 위해 신격들이 자신의 웃돈까지 주면서 희생한다고?

한두 번 탑을 겪어 봤으면 모를까.

천 년에 가까운 세월 간 탑을 겪었던 나였기에 누구보다도 확신할 수 있었다.

‘개소리도 어지간히 해야 믿지.’

탑을 믿을 바에야 둘리를 전적으로 믿는 게 훨씬 낫겠다.

여기까지 풍기는 구린내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몇 마디 말로 순순히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신아디.

뒤통수를 맞고 후회할 바에는 차라리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나으니까.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잠깐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후원을 많이 받아 놓고 한 명만 고르는 것도 의리 없잖아.”

곁으로는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니까. 차라리 선택을 보류하는 게 어때.”

까놓고 말해 그 누구도 따르지 않겠다는 뜻.

물론 속뜻을 모를 신격이 아니다.

〈당신의 발언에 신격들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신격은 탑에서 이 조건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하나 바람과는 달리 탑은 그들의 기대를 간단히도 저버렸다.

〈신한별 플레이어는 신격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격 없이 29층이 진행합니다.〉

기대를 저버린 탑의 답변에 신격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일이어서.

하긴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라면 전부 시스템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거역하려는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과연 있었을까.

‘그렇게 치면 내가 최초라는 건가.’

거봐, 안 될 건 없잖아.

수많은 신격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나는 능글맞은 웃음기를 입가에 띠며 그들에게 속삭였다.

“아, 맞다. 너희들이 기부한 사치품은 내가 잘 쓸게.”

* * *

자그마한 소동(?)이 끝난 직후, 29층은 정해진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건물의 옥상에서 화려한 조명이 돋보이는 도시를 지켜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차가운 빗소리와 함께 새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허공 위를 맴돌던 새하얀 연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건 그렇고 전혀 감도 안 잡히는데.”

시스템창을 골똘히 바라보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29층의 컨셉은 멸망.

지금까지 20층 대에서는 질변이나 자연재해 같은 명확한 컨셉이 정해져 있었다.

26층의 방사능이나 28층의 빙하기, 29층과 같이 지진이나 가뭄과 같이 말이다.

과거과 비교하면 확실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과 같이 층이 개시하자마자 파격적인 이변이 발생하거나 하진 않았다는 것.

‘아니지.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일이 터지면 우선 무력으로 해결하고 봤을 테니까.

오히려 지금이 심리적으로는 더 불편했다.

마치 폭풍우가 닥치기 직전의 고요함.

그러던 와중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의 시스템창이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룰입니다.〉

〈29층에서는 모든 신격이 투표를 하여 술래를 선정합니다.〉

〈라운드는 총 5판, 라운드마다 술래를 각각 선정합니다. 만약 일주일 내에 선정된 술래 전체를 죽이지 못하면 이 세계는 멸망합니다.〉

〈투표를 개시합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시스템은 모든 룰를 설명했다.

“뭐… 라고?”

그 내용을 읽던 나는 답지 않게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어릴 적 하던 술래잡기의 역할을 거꾸로 뒤집은 놀이.

그러나 그 내용은 놀이와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설명대로라면 이러나저러나 술래로 선정되면 무조건 뒈진다는 운명이었다.

술래로서 플레이어들한테 죽거나.

혹은 기적같이 살아남더라도 패널티로 인해 다 같이 멸망해서 죽게 될 테니까.

허나 내 시선을 잡은 것은 그런 것 따위 아니다.

‘술래를 신격 그놈들이 결정한다고?’

미친.

그걸 그놈들이 왜 선정해.

나는 빠르게 굴러가는 사고 속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일전의 일로 나는 29층의 거의 모든 신격과 적대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놈들이 선택할 술래는 뻔하잖아?

“쓰벌.”

나는 인상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29층에서 압도적인 1등은 바로 나.

상식인이라면 만약 내가 술래로 선정된다면 결국 29층이 멸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나 역시 다른 플레이어의 손에 잡혀서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기껏 계약한 플레이어들도 내 손에 죽을 텐데, 신격들도 다시 고려해보지 않겠냐고?

그딴 허울 좋은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어차피 플레이어는 놈들한테 유희거리일 텐데, 잘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들은 장기말.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죽든, 단칼에 죽든 말든 놈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에겐 실전이지만 놈들한테는 심심풀이에 불과할 테니까.

〈1ROUND!〉

〈모든 투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선정된 술래는… 만장일치로 신한별 플레이어입니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비껴 나가지 않았다.

하늘 전체를 가득 채운 시스템창은 물론이고.

도시의 모든 스크린 판 위로 내 위치와 얼굴이 노출되었다.

전광판의 내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최첨단 화질이 탑재된 전광판으로 보니까. 죽이게 잘생겼네, 내 얼굴.

이쯤 하면 막 나가자는 거지?

놈들한테는 안타깝게 된 일이지만, 막나가는 거?

그거 하나만큼은 나도 끝내주게 자신 있거든.

이왕 이렇게 판이 뒤집힌 거, 한 번 더 뒤집어도 티는 안 나잖아.

“28층 보상, 지금 쓸게.”

〈29층 한정 소원권(???)〉

- 여가 생활? 하렘? 범죄? 그 누구한테도 못 할 말 취향? 소원권에 대고 말하면 뭐든 이뤄집니다!

- 일회용권이니 신중하게 쓰세요.

이번 층에 한해서만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소원권.

이것만 있으면 이미 결정 난 투표를 무르거나, 술래에서 내 이름을 배제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말이야.

‘이걸로 만족하라고?’

이미 놈들한테 엿을 먹어놓고선, 소원권으로 술래에서 벗어났다는 걸로 위안으로 삼으라고?

시비는 내가 먼저 걸었지만, 되로 돌려준 건 저쪽이다.

그러면 다시 보답을 하는 것도 예의지.

이미 결정은 내렸다.

“이번 층에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신격들도 포함시켜.”

소원권에 대고 말하자, 소원이 접수됐다는 문구와 함께 소원권이 소멸했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룰로 인해 도시 전체의 전광판이 수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쓴 소원으로 인해 하늘에서 수십 개의 유성우가 건물 사이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막장에 치달은 상황 속에서 나는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걸로 총대는 내가 멨다.

그러니까.

“오늘 다 같이 끝장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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