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그야말로 눈을 호화롭게 만드는 화원.
별꿀 파라다이스는 NPC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드넓은 부지에 소답스럽게 피어난 꽃의 향연은 눈 호강을 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화원의 풍경을 감상하다 말고 인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눈이 탱탱 부은 페리안이 서 있었다.
“언제까지 우나 싶었는데 이제 그쳤나 보네.”
“시, 시끄러워! 운 거 아니거든! 그냥 눈가에 먼지가 들어가서 조금 비빈 것뿐이야!”
새삼스럽게 자기 행동이 부끄럽게 느꼈는지 페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웃음기를 지었다.
지금 보니 생기도 전부 되찾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이러는 모습이 훨씬 낫다.
언제까지고 죽은 동태 같은 눈을 하면 내가 더 불편하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치, 모두 알고 있으면서 괜히 모른 척이나 하긴. 속이 전부 보이니까. 내 앞에선 모른 체 안 해도 돼.”
“뭐, 그렇다면야.”
무덤덤한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페리안은 익숙하지 않다는 듯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기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정말 네가 없었다면 화원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야. 크진 않지만 이건 우리들의 성의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티팩트를 건넸다.
곧바로 아티팩트의 정보를 확인한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별꿀 환단(S+)〉
- 별꿀 파라다이스의 명물, 난향초접밀의 꽃잎으로 제조한 영약!
- 맛은 괴랄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두근두근, 섭취 시 어떤 효과가 일어날까요? 어쩌면 탈모를 치료할 수 있는 경이를 보여줄지도?!
※ 주의! 펫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펫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확실히 엄청난 보상이었다.
난향초접밀의 본체도 아닌 꽃잎만으로 S+급 영약을 제작했다.
요정왕이 그토록 난향초접밀에 집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티팩트에 대한 설명을 읽어 보기도 잠시, 갑자기 든 의문을 질문했다.
“난향초접밀의 꽃잎이라고 해도 괜찮은 거야?”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배시시 웃음을 피어냈다.
“아! 꽃잎 하나 정도는 괜찮아. 화원에 다소 무리가 생길지 몰라도 몇 년만 지나면 다시 잎이 돋아날 테니까.”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켓 안에 영약을 집어넣었다.
한 일에 대한 보상도 손에 얻었겠다.
28층에서 볼 일도 이제 끝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29층으로 올라가겠습니까?〉
고민할 가치도 없다.
시스템에 긍정하자, 드높은 하늘로부터 강렬한 섬광이 떨어져 내린다.
이걸로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페리안은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떠나는 거지?”
“어, 그래야지.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머물러 있을 순 없잖아.”
탑의 정상에 등반하기까진 아직 한참 멀었다.
이 시간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은 열심히 탑을 등반 중일 텐데 겨우 28층에서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긴 그렇지. 아! 원하면 언제 별꿀 파라다이스의 명물을 보내줄 테니까. 편하게 연락만 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짤막한 손으로 제 가슴팍을 두들기는 페리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할 때마다라… 그 말 감당할 순 있고?”
“언제든 감당할 수 있도록 해내야지.”
자신만만한 대답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페리안과의 짤막한 인사를 나눈 직후, 하늘로부터 몸을 전부 뒤덮는 강렬한 섬광이 떨어졌다.
* * *
〈29층의 컨셉은 재해- 멸망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듯 눈앞을 희게 가리던 새하얀 섬광이 천천히 가신다.
이윽고.
눈을 뜨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진 고층 빌딩에서는 자극적인 네온사인의 불빛이 시끌벅적한 밤거리를 밝혔으며.
밤거리의 헤드라이트는 각양각색으로 골목을 비췄으며.
골목 깊숙한 곳에서는 뿜어진 연무는 코를 찡하게 만들었다.
두말할 여지도 없는 화려함의 극치.
지금까지는 고리타분한 탑의 풍경만 봐 왔던 나에겐 색다른 느낌을 자극하기엔 충분했으나,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도시 속 풍경이 아니었다.
“뭐야? 왜 멈춰 있어.”
화려한 풍경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정지시킨 듯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보기에도 자극적인 네온사인도.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 쏜살같이 질주하는 헤드라이트도.
심지어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마저도.
모든 구성요소가 한 찰나의 풍경에서 머물러 있었다.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느낌이었지만, 예전에도 한 번 겪어 본 기억이 있었다.
〈29층은 단체층입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도착하면 이번 층이 진행됩니다.〉
〈삐빅! 모든 플레이어가 29층에 도착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29층이 진행됩니다.〉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창을 읽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했는데 이번 층에서도 마지막으로 도착한 플레이어가 바로 나였나.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 28층을 선두로 클리어하긴 했지만, 영약이 제작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28층에서 보냈으니까.
그 덕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한참 대기하긴 했을 테지만.
‘뭐 어때.’
그게 아니꼬우면 애초에 탑을 등반하질 말았어야지.
쏴아아아⎯
그러기도 잠시, 따가운 빗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29층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과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이번 층에서는 신격과 함께 팀을 꾸려, 제한 시간 내에 타인의 신격을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전 층에서 누적된 팀 점수의 순위를 바탕으로 신격이 자신의 적합자를 선정합니다.〉
〈이때 신격 중 복수가 선택 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상위 10인만 플레이어 점수가 공개됩니다.〉
시스템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 보던 나는 다른 플레이어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커뮤니티를 켰다.
[채널21- 29층 전용 커뮤니티]
- ㅅㅂ 저거 도대체 뭔 말이냐? 나만 이해 못 함?
⤷ ㅇㅇ 니만 이해 못한 거임
⤷ 정보) 이게 이과 평균 수준이다
- 아니 근데 진짜 난독증 걸릴 듯
- 병신인가? 진짜 괴수만 때려잡다가 뇌세포도 같이 때려잡았나;;
⤷ 세종대왕도 고개 저을 듯
⤷ 탑에 오기 전에 젖부터 떼고 와라
- 빡대갈쓰들을 위한 요약) 얼굴 상위 1티어 존예, 존잘이 데이트 신청 받음, 근데 신청 많이 받으면 골라갈 수 있음
⤷ 설명추
⤷ 설명추
- 윗댓 비유 깔쌈하네, 거의 국어 1등급
- ㅋㅋㅋㅋ 졸지에 모솔 단체 오열하겠노
대체로 커뮤니티의 반응은 나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 것은.
- 그나저나 저거 발표되면 알 수 있겠네. 지금까지 1등을.
-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 와 누가 1등임?
- 드래곤의 엄니인가 하는 하꼬 길드 멱살 캐리한 사람 보고 싶으면 개추~~
⤷ 개추~
⤷ 개추22
⤷ 개추33
- ㅋㅋㅋ 누군지 결과 나오자마자 바로 렉카 간다
- 자, 드가자~
커뮤니티를 읽어보던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지금까지는 그닥 체감이 없어서 그렇지.
현재 선두주자를 달리고 있는 길드는 내가 속한 드래곤의 엄니.
시스템의 설명에 따르면 1등 파티원부터 선정이 시작되니 가장 먼저 내가 발표되는 건 확정이었다.
“아….”
나는 절망 어린 침음을 흘렸다.
내가 1등이라는 걸 신협단 그 미친놈들이 알게 되면 벌어질 상황은 눈에 훤히 보였다.
게다가 다른 플레이어들의 손에 의해 각종 커뮤니티로 퍼지는 일도 기정사실.
딱 수치사 하기에는 좋은 환경이다.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나중의 일을 상상하며 심각하게 있을 즈음이었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띠링!〉
〈패널티 심의 결과, 29층에서 신한별 플레이어의 특전을 일부 회수합니다.〉
〈따라서 패널티로 인해 신한별 플레이어의 신격 선별의 대기열이 마지막 순번으로 미뤄집니다.〉
‘시발, 이게 된다고?’
미친.
때마침 난입한 패널티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28층 당시에 NPC인 요정왕을 병신으로 만듬으로서 나는 패널티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 패널티가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이야.
오히려 좋았다.
〈길드 [드래곤의 엄니]부터 신격 선발이 시작합니다.〉
〈보유 점수 1등: 김일태- 739점입니다.〉
〈신격을 선정 중입니다.〉
패널티 덕에 내 이름이 아닌, 다른 파티원의 이름이 시스템창에 떠올랐다.
그 상황에 나는 쾌재를 불렀으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커뮤니티는 또 한 번 뒤집혔다.
- ??
- ???
- ??? 미친 이거 뭐임??
⤷ 시스템 뭐냐? 갈고리 수집가임??
- 아니, 진짜로 시스템 고장 났음? 왜 1등이 700점대밖에 안 되는데?
- 플레이어 평균 점수가 적어도 천 점이 넘어가는데 저게 말이 됨?
⤷ 내가 듣기론 대형 길드 루키가 기본 4000점이라는데
- 내가 알기론 저 길드 4명인가 5명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놈이 700점대면 뭔데?
- 아니 씹!!!!
- 방금 탑에 신고했는데 오류 아니라는데;;;
⤷ 탑이 버그 걸렸네ㅅㅂ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채팅에 의해 커뮤니티는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는 지경에 다다랐다.
나는 입가에 웃음기를 띄며 커뮤니티를 껐다.
“흐흐, 바로 이거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 같았으면 패널티로 인한 마지막 순번은 엄청난 타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는 의미 없잖아.”
이미 신격들은 내 점수를 알고 있다.
비록 내 앞의 수많은 플레이어를 포기해야 하는 단점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격들은 내 점수를 뻔히 알고 있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 순번이라도 나라는 황금알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꽤나 긴 시간이 흘러 내가 신격을 선정할 시간이 찾아오고, 내 예상은 아주 정확히 틀어 맞았다.
나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계약 제의가 온 신격 수: 36곳〉
〈복수의 신격에게서 제안이 왔으므로 신한별 플레이어님께서는 이 중의 한 명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