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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5화 (85/175)

제85화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인지, 요정왕은 헛숨을 들이키며 상황을 파악하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재액의 가면을 포켓에 수납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뭘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거리고 있어? 왜, 내가 존대를 안 해 줘서 섭섭한가 봐.”

“이, 이놈이…!”

“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몇 년 간 질질 끌던 전쟁을 끝낸 거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할 생각이면 마음껏 해도 돼.”

안 그래도 포상이라면 넉넉하게 받아 갈 생각이다.

말꼬리를 끊고 적당히 너스레를 떨자, 요정왕은 분노에 찬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인간 따위가 감히 어느 안중에 대고 망발을 지껄이느냐!”

“…풍년이네.”

“지금 뭐라고 했지.”

미간을 좁히며 되묻는 요정왕.

그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피식 웃었다.

“지랄도 풍년이라고. 네가 누군지 내 알 바야?”

내 앞에서 이름을 거들먹거려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놈들은 나한테 죽기 직전까지 처맞고 죄다 요양 중이거든.

잡담도 여기까지다.

재액의 가면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별꿀 파라다이스에서 발생한 재해는 전부 저놈이 직접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까. 널 쓰러뜨리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는 거잖아.”

응, 간단하니 좋네.

씌이잉!

검을 뽑아 들자, 서슬 퍼런 비수가 빛에 반사되며 새하얀 광량을 일으킨다.

그 광경에 요정왕은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태연하게 입을 뗐다.

“확실히 등반자치고는 썩 나쁘진 않군. 하지만 그래봤자 등반자, 탑의 보호를 받는 짐을 공격했다간 네놈도 멀쩡하진 못할 텐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템 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주의! 탑의 비호를 받은 NPC입니다.〉

〈공격할 시, 추후 탑의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스템마저 나서서 놈을 지켜주는 걸 보니 어지간한 거물이 납신 모양인데.

그런 협박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손을 휘젓는 것으로 간단히 시스템창을 치워 버리고는 놈의 가슴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길게 그인 자상으로부터 새빨간 선혈이 사방으로 튄다.

찰나의 순간에 가슴을 베인 요정왕은 당황한 눈빛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어, 어째서….”

“어째서긴. 기껏 생각해 낸 게 시답잖은 협박이었다면 상대를 잘 가리면서 했어야지.”

그깟 협박은 안 통한다.

패널티 가지고 막을 수 있을 거라면 애초에 탑의 대가리들을 족칠 거라는 계획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 도망칠 거였으면 처음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어야지.”

물론 그래봤자 결국에는 내 손바닥 안이지만.

애초에 스스로 자처한 일이니 동정은 안 한다.

〈띠링!〉

〈신한별 플레이어는 위반 사항으로 인해 페널티가…〉

잇따라 떠오른 시스템 창.

나는 간단히 무시하듯 손을 휘저은 뒤, 검을 바닥에 끌며 요정왕을 향해 다가섰다.

“일어나. 제대로 안 당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제대로 된 손맛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깊이 당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깊은 상처는 아닐 터.

그런 내 예상에 적중하듯 요정왕은 입가를 가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푸흐흐, 이미 알고 있었나. 확실히 등반자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실력인 거 같지만 이미 늦었다.”

놈은 들고 있던 무기를 허공을 향해 휘두른다.

그러자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원형을 이룬다.

허공 위로 떠 오른 묘한 문양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인가?’

많이 접한 적은 없지만, 튜토리얼 당시에 동기들이 사용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 봤던 조잡한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

명색이 요정왕이라고 불리는 놈인데 약하진 않으리라.

‘뭐, 그래 봤자겠지만.’

마법을 발동할 틈을 주지 않는다!

놈의 목을 베기 위해 발을 뻗으려는데, 지면이 모래로 변화며 움푹 들어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모래에 들어간 다리에서 수분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한다.

무력으로 모래를 뿌리쳐 내자, 다리는 수분이 빠지며 앙상한 뼈가 드러났다.

혀를 차며 포션을 뿌리자 다리는 원 상태를 금방 되찾았다.

“이건?”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요정왕은 히죽 웃으며 스태프를 휘두른다.

“알아도 소용없다. 별꿀 파라다이스의 그년도 어쩌지 못했는데 아무리 포션을 끼얹는다고 해도 네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그의 의지에 따라 모래가 움직이며 수분을 흡수한다.

심지어는 검에 닿자, 끝부분이 바스라지며 부식되기까지 했다.

적당히 모래를 뿌리쳐 내며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했더니만.’

28층에 재해를 일으킨 원흉이 바로 저 마법 때문이었나.

보기에도 상당히 까다로워 보이는 마법이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며 놈을 마주했다.

잘됐네.

“다신 그 지팡이를 못 휘두르게 사지를 분질러 버리면 재해도 사라지겠네.”

놈을 어떻게 상대하면 감도 잡혔겠다.

나는 강하게 지면을 박차고는 놈을 향해 뛰어들었다.

스스슷⎯

그에 대항해 모래 벽이 빠른 속도로 솟아오른다.

저걸로 나를 멈춰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주먹을 휘두르자 두려워할 만한 위력의 풍압이 정면으로 쏘아진다.

한 방에 모래를 걷어낸 후, 검을 횡으로 긋자 놈의 오른팔이 팔뚝 채로 떨어졌다.

허나 곧바로 모래를 이용해 지혈과 동시에 부족한 팔을 채우는 요정왕.

확실히 마법사답게 상당한 임기응변이다.

그런데 어쩌나.

“마법이라면 나도 한 솜씨 하거든.”

“뭐, 뭐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뭐가 그렇게도 놀라운 모양인지 요정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놈의 코앞에 다가가선 복부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저만치 나가떨어진 요정왕은 피를 울컥 토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쿠, 쿨럭… 이게 어째서 마법….”

“아, 맞다. 앞에 붙이는 걸 까먹었네. 마법은 맞아. 물리 마법.”

지구에 있을 적에는 이게 대세라고 하더라고.

나는 익살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놈의 양팔을 손으로 맞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한 요정왕은 공포에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자, 잠깐 지금 뭘 하려고….”

“뭘 하긴, 약속했잖아. 다신 마법의 마 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사지를 분질러놓겠다고.”

다른 건 몰라도 난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약속은 지킨다.

아님? 말고.

콰드득!

“끄아아아악!”

뼈와 살이 부서지는 생생한 소리와 함께 놈의 양팔은 힘에 의해 찢겨나간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요정왕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아파도 너무 서운케 생각지는 말았으면 한다.

너한테 당한 녀석들은 그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손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내며 놈의 양쪽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라도 했을까.

요정왕은 금세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남은 다리 두 개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는 가볍게 손을 풀었다.

“이 악물어. 아직 두 발 남았다.”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정왕을 구속하는 것을 끝으로 28층은 깔끔하게 해결됐다.

그래서 괴수와 요정 간의 전쟁은 어떻게 됐냐고?

“뭐, 그것까진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결과라 해 봤자 둘 중의 하나가 이겼던지, 아니면 둘 다 공멸했거나.

그 둘 중 하나일 게 뻔했다.

분명한 건 어떻게 되든 간에 전쟁은 의미 없게 끝났다는 것.

요정족의 수뇌부는 나로 인해 궤멸된 상태일 테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봤자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그것보다도 다음 층으로 가기 전에 이 녀석들부터 처리해야겠지.’

나는 곁눈질로 등 뒤로 줄지어 따라오는 요정들을 살펴봤다.

그들의 정체는 별빛 파라다이스로부터 납치당한 포로들.

하나같이 고생한 모양인지 비쩍 곯은 행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전쟁 포로가 이만큼 살아남은 게 용할 정도지.”

그렇게 그들의 선두에서 앞장서길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서부터 펠리안의 모습이 드리웠다.

별꿀 파라다이스를 떠날 때부터 이곳에서 기다렸던 모양인지, 그녀는 눈에 띌 정도로 핼쑥해진 상태였다.

이윽고 이쪽을 눈치챈 펠리안은 얼굴에 활짝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한별!”

“어, 왔어. 많이 기다렸지.”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적당히 인사를 건넸다.

곁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페리안의 시선은 포로로 끌려간 요정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요정들은 별꿀 파라다이스의 길목에 오고 나서야 안심이 됐는지 서로를 얼싸안으며 제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됐는지 페리안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는다.

“…정말 고마워. 도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녀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아직 끝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은혜를 갚는 건 좋은데 기왕 할 거면 제대로 끝내야지.”

어중간하게 끝내놓고, 어중간한 보상을 받는 거라면 나야말로 사절이다.

기왕이면 사골까지 우려먹어서 확실하게 받아 내야지.

나는 손을 뻗어 포켓의 구석에 박혀 있던 아티팩트를 꺼냈다.

〈두근두근 랜덤박스!〉

- D급~B급에 달하는 아티팩트를 랜덤으로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실수하지 맙시다!

- 개똥을 밟으면 운수 좋은 날이라니, 개똥을 밟아 봅시다. 레어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올라갈지도?

27층에 있을 적 당시에 NPC에게서 받아낸 뽑기권.

당시에는 귀찮아서 대충 던져놨었는데, 썩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나올지도 혹시 모른다.

‘솔직히 꽝이 걸려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다지 기대는 안 한다.

아티팩트를 발동시키자 오색빛깔의 찬란한 빛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쏟아져 나온다.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임팩트가 절정에 달했을 즈음, 랜덤박스는 활짝 열렸다.

〈조금 특별한 괭이(C)〉

- 조금 특별한 괭이입니다.

- 적은 힘으로 땅을 더 빨리 팔 수 있습니다.

“어?”

시스템창을 확인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물론 별 기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로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뜰 줄은 나도 몰랐지.

심지어는 언제나 함께했던 익살스러운 시스템의 설명마저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허탈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매번 잘 뜬 순 없겠지.’

기대치가 높아서 그렇지, 지금까지가 묘하리만치 운이 좋았을 뿐이다.

탑을 등반하는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는 이게 정상적인 경우이리라.

매번 S급만 뜨면 인간미도 없다.

“나쁘진 않네. 안 그래도 땅을 파려고 했는데 기왕 얻은 거 써야지.”

괭이를 이용해 지면을 파헤친 다음, 나는 생명의 석을 파묻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페리안은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있어 봐. 곧 알게 될 테니까.”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생명의 석을 심은 장소로부터 섬광이 드리웠다.

따스한 녹색빛의 섬광은 이윽고 별꿀 파라다이스 전역을 뒤덮었다.

〈대지를 정화합니다.〉

메말라 쩍쩍 갈라진 화원이 생기를 되찾으며 비옥한 토양으로 변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촉촉한 지면을 뚫고 드러난 꽃들이 꽃망울을 소담하게 피어낸다.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한 꽃은 화창한 태양 아래서 활짝 만개했다.

쫘아아아아!

때마침 불어온 산뜻한 바람.

바람에 의해 수천, 수만 개의 꽃들이 살랑거리며, 엄청난 양의 꽃잎이 허공을 맴돈다.

가지각색의 꽃잎이 드높은 장천 위에서 송이송이 내린다.

마치 봄에 내리는 눈을 연상케 하는 광경에 이를 바라보던 페리안은 입가를 틀어막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은 새하얀 꽃 위로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다신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풍경.

그 풍경은 다시 한 번 화폭(花幅)이 되어 재현되었다.

〈3일 내에 재해를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어떤 NPC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갱신해냈습니다.〉

〈업적: NPC와의 친구, 리스트에 별꿀 파라다이스가 포함됩니다.〉

〈당신의 믿기지 않는 업적에 탑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2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 29층 한정 소원권(1회용)〉

* * *

〈28층의 점수가 집계되었습니다.〉

〈획득 점수: 839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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