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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4화 (84/175)

제84화

“예정대로 순조롭네.”

나는 드높은 절벽 위에서 전황을 바라보며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도 계획은 순조롭게 풀렸다.

하긴 당장 적들이 목에 칼을 들이밀었는데 어쩌겠나.

‘싫어도 막을 수밖엔 없겠지.’

막지 않으면 무의미한 피를 흘리는 것은 이쪽일 테니까 말이야.

어쩌면 되레 이쪽이 당할지도 모르니.

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을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든 간에 일단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해보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전부 계획대로 흘러간다.

나는 단물이 전부 빠진 육포를 뱉었다.

그러고는 막사가 보이는 방향을 바라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

잃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로 되찾는 방식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의 특기니까.

난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다.

그것 가지고 불평한다면, 뭐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한별! 내가 왔다!”

“어, 내가 말한 대로 일은 잘 끝냈어?”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말하자, 둘리는 배시시 웃으며 자랑이라도 하듯 날개를 활짝 펼쳐 보였다.

“걱정 마라! 한별이 일러둔 대로 괴수들을 이쪽을 향해 확실하게 유인했다!”

“보니까. 그런 거 같네. 잘했어.”

둘리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옅은 웃음기를 띄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펴보니 둘리가 확실하게 맡은 임무를 다한 모양인지, 요정족과 괴수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꼈지만, 둘리 녀석도 할 땐 확실히 하는 편이다.

아직까진 해츨링이라 그런지 어리숙한 티가 많이 남아 있지만, 나랑 탑을 등반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한 덕인지 실력으로 봐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이놈이 언제 성체가 될 때까지 기다릴지… 참.’

그래야지 어느 정도는 써먹을 만할 텐데.

일반적으로 드래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드래곤 하트에 더욱 많은 마나가 쌓이며 점점 강해지기 마련이다.

등반자 중 역대 최강이라 불리는 골리엇조차 몇 백 년을 묵은 웜급 드래곤 앞에선 맥을 못 추었다고 한다.

아직 해츨링인 둘리한테는 한참 남은 일이긴 해도 기대하는 바가 컸다.

물론 해츨링인 마당에 최고가 되라는 뜻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밥값은 해야지.”

“음? 한별 지금 밥이라고 했나?”

용케도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실실 웃음을 짓는 둘리.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세상 물정도 하나도 모르는 이놈한테 뭘 기대하긴 뭘 기대해. 바랄 걸 바래야지.

나는 힘으로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맛있는 거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조용히 있어 봐.”

“헤헤, 알겠다!”

“그럼 어디 보자.”

둘리로부터 시선을 돌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오가는 막사를 내려다봤다.

침입자라곤 단 한 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

다름이 아닌 전시 중이니 병사들의 경계는 극에 치달았을 것이다.

저 경계망을 몰래 뚫고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어렵겠지.

그렇다고 무력을 사용해 억지로 돌파해 냈다간 병사와 대립하는 사이에 요정왕은 도주하고도 남는다.

이도 저도 힘들어 보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재액의 가면을 얼굴에 씌웠다.

“그렇게 됐으니, 어디 한번 이 시답잖은 연극도 끝내 봐야지.”

* * *

바로 그 시각.

막사 안에서 요정왕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의자에 턱을 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놈들은 이쪽을 향해 진격하기 힘들 것이라고 정보를 전해 들었거늘.”

이는 단순히 황제 본인의 지레짐작만이 아니었다.

몇 년에 이은 전쟁.

그만큼 치열할 만큼 적의 전력쯤이야 눈에 훤할 정도로 꿰고 있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적측을 감시하러 간 척후병으로부터 받은 정보니, 확실성에는 여지없을 것이다.

아니면…

‘적들이 처음부터 전력을 속이고 있었거나 이미 병사 중 일부분이 놈들의 회유에 넘어간 건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려나.”

하나 요정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저쪽에서도 예정을 달리할 정도로 큰일이 벌어진 건가.”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이었다.

어쨌건 간에 이런 탁상공론은 의미 없는 짓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 누가 있느냐! 어서 부관을 이 자리에 불러오도록.”

그의 명령에 막사 바깥으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막사의 문을 젖히고 부관이 들어왔다.

부관의 얼굴과 마주한 요정왕은 곁으로 내색하진 않았으나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렇게 빨리?’

미리 부를 줄 알고, 대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걸리지 않았을 시간.

상식적으로 이렇게 빠르게 얼굴을 비춘 적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텐데.

묘한 이질감을 느꼈지만, 요정왕은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지웠다.

그런 사소한 것쯤은 현재 닥친 일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적들의 대공세가 본격적으로 벌어졌으니 부름에 대비해 미리 대기 중이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일 처리를 빨리 끝낼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크흠, 아닐세.”

부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요정왕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바로 본론이다만 현 상황은 어떻지?”

“적의 습격을 조기에 발견한 덕에 피해를 줄였지만, 그다지 좋다고만은….”

“그런가. 그건 어쩔 수 없지.”

요정왕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부터 예상하던 바다.

정말 낌새도 없이 총공세가 벌어졌는데, 충분히 대처해 냈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이미 상정된 결과다.

남은 일은 일이 커지지 않도록 최대한 수습하는 것뿐.

“지금 당장 진영을 뒤로 물러서 곧바로 반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어서 나가 보도록. 아참… 그러고 보니 제이는 지금 어디에 갔지? 난향초접밀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나가는 김에 제이를 불러오도록. 자네한테만 하는 말이지만 ”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리고는

무슨 이유에선지 부관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묘하리만치 고요한 분위기에 그가 이상하다고 여길 무렵, 부관은 굳게 붙이고 있던 입을 뗐다.

“폐하 그런 수고는 안 들이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요정왕은 미간을 좁혔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가면 갈수록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모습에 한마디를 덧붙이려는데, 그보다도 먼저 그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부르실 줄 알고, 제이를 이 자리에 불러 뒀습니다.”

“불러뒀다니?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은 없을 텐데? 아니, 제이한테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뒀을 텐데 누가 멋대로 움직이라고 했지?”

요정왕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의 진노가 공기 중에 차갑게 서린다.

채앵!

가공할만한 압박감에 의해 유리가 깨지며 탁자가 부서진다.

어지간한 존재라면 뼈도 못 추릴만한 힘에도 불구하고 부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자리에서 멀쩡히 서 있었다.

“지금 뭐하….”

“제이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낌새에 고함을 내지르려는데, 부관은 말꼬리를 끊고 끼어들었다.

그의 머릿속을 물음표로 가득 찼을 즈음.

부관은 아주 천천히 팔을 들어 제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파팟!

부관의 얼굴이 제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단지 얼굴뿐만이 아니다.

체형, 호흡, 맥박.

마치 지금까지 앞에 서 있는 존재 자체를 부정이라도 하듯 모든 게 일순 바뀌었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은 상황에 요정왕는 숨을 헐떡거리며 침을 삼켰다.

“어, 어떻게?”

“방금 전에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타난 것뿐입니다. 아니면 시중을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병사를? 그것도 아니라면 남의 땅을 침입해 얻은 노예를 불러드릴까요?”

제이로 변한 상대가 가볍게 얼굴을 쓸어내리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항상 시중을 드는 내관에서 그를 호위하는 병사.

어쩔 때는 밤 시중을 드는 여인으로.

어딘가에서 봤었던 노예에서.

어린 나이의 꼬마로.

얼굴이 변하는 속도는 시시각각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바뀐다.

“혹은 이것들도 아니라면 폐하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 겁니까?”

“그만… 그만… 그만!!”

공포에 잔뜩 질린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재빠르게 바뀌던 얼굴은 마지막에 다다라선 요정왕 본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착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공포에 의해 희게 질린 요정왕은 자신의 애병을 빼들며 바깥을 향해 서둘러 외쳤다.

“여봐라! 어, 어서 이자를 막아라! 아무도 안 들리냔 말이냐! 어서 이자를 구속하지 못할….”

“의미 없는 짓입니다.”

“그게 무슨….”

요정왕은 말을 더듬다 말고 막사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이윽고 그는 아연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창 총공격이 진행 중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조용했었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요정왕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마치 누가 의도라도 하듯 바깥은 고요할 뿐이었다.

인기척은커녕 그 흔한 짐승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는 소스라치듯 숨을 들이쉬었다.

언제부터였지?

눈앞의 남자가 얼굴을 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부관으로서 막사에 들어왔을 때?

시중에게 부관을 불러오라고 명령했을 때?

그것조차 아니라면 아예 처음부터?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언제, 언제 ,언제, 언제, 언제… 언제부터였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으려고 해도 떠오르질 않았다.

전투로 병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말이다.

상황을 알아차린 요정왕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갔을 때쯤, 눈앞의 남자의 얼굴은 또다시 바뀌었다.

질리도록 본 광경.

하지만 바로 앞에서 마주한 혹발의 남자는 기억을 뒤져봐도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을 천천히 벗는다.

그대로 민낯을 드러낸 그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되물었다.

“그래서 네가 찾는 사람이 이 얼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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