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ㅡ 요정의 모습도 보인다.
갑작스러운 병사의 외침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혹시나 싶었지만, 기억에도 없는 상대다.
상황을 모면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침묵을 고수하자, 병사는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새끼가 대답도 안 한다 이거지? 뒈지고 싶었으면 미리 얘기하지 그랬어. 적들한테 죽기 전에 나한테 먼저 죽어 보자.”
그의 분노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도대체 뭔 일인데 큰 소리를 내고 있어? 갈구는 거면 적당히 하고 복귀… 어?”
병사의 물음에 상관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다 말고, 내 얼굴을 보곤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한 사람 마냥 새하얗게 질렸다.
더욱 정확하게는 재액의 가면으로 복사한 제이의 얼굴.
묘하게 흘러가는 기류에 방금 전까지 내게 소리치던 병사는 의아스러운 듯 되묻는다.
“저기 저 신입을 아십니까? 나중에 허튼짓을 벌이지 않도록 제가 확실하게 교육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이, 이, 미친 새끼가! 교육? 교오육? 저분이 감히 누구라고 그 해괴망측한 입을 놀리고 있어!”
일순 정신을 되찾은 상관은 고함을 지르며 병사의 조인트를 걷어찬다.
반응할 새도 없이 걷어차인 병사는 흙바닥을 뒹굴거린다.
딱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상관은 간단하리만치 무시하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각진 자세로 경례를 취했다.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상부로부터 전달받은 사항이 없었던 탓에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저… 저기 그분은 도대체….”
“폐하께서 직접 선정하신 특사님이시다.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겨,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병사는 공포에 몸을 떨며 곧바로 경례한다.
그들의 태도에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제이의 기억을 뒤져 봐도 아예 본 적 없는 인물이라 싶었는데…
‘기억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서 그런 건가.’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난향초접밀을 회수하는 중요한 임무를 받고 움직이는데 직책상 높으면 높았지, 낮을 리는 만무했다.
난향초접밀을 회수하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제1의 목표였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니?”
“옙, 불과 며칠 전에 괴수 놈들이 대군을 끌고 왔지만 적지만은 않은 피해로 저지해 낸 직후입니다. 그 뒤로는 계속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과연 이 상황이 얼마나 유지할 진….”
남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제이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장 2년에 걸친 요정족과 괴수와의 전쟁.
그것이 그들의 현주소이었다.
요정의 권능으로 손쉽게 물리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적의 군단은 상상 이상의 전력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하며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어리석게도 현명하달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방법을 떠올렸다.
‘침략당해서 부족하다면 똑같이 침략해서 채운다.’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개 같은 논리지.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제거하기보다 도리어 분란의 씨앗을 만든다니.
그들은 그런 전략으로 힘없는 동족을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그 피해자 중 하나가 바로 별꿀 파라다이스.
그러던 도중이었다.
남자는 주변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병사를 향해 말했다.
“크흠, 잠깐 나가 있도록.”
“네, 넵!”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면한 병사는 눈치를 살피며 막사로부터 나선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남자는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건넸다.
“우선 듣는 귀가 있어 주변을 물린 점은 죄송합니다. 제이님, 비록 피해가 심각하진 않아 두고 보고는 있지만. 앞으로는 얼마나 큰 피해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예의 물건을 무력으로 빼앗아 올 계획이신 거 같습니다.”
“…….”
“제이님!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슬슬 애가 탄 모양인지 남자는 다급하게 외쳤다.
참 우스운 일이다.
적을 앞에 두고 일의 전말까지 죄다 털어놓다니 말이다.
나야 좋은 일이지만.
저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원하는 대답을 못 들려줄 것도 없다. 믿고 안 믿고야 개인의 자유니까.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사소한 동작과 걸음걸이도.
어조와 호흡도.
표정마저도 제이가 보여줬던 것들을 그대로 재현한다.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않도록.
바로 앞까지 다가간 그가 가장 바래왔을 대답을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간 고생이 많구나, 걱정 말거라. 안 그래도 그 일로 인해서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이젠 마음을 풀려무나.”
“그, 그 뜻은 설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도 따분하구나, 어서 폐하께 안내하거라.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
달콤한 유혹에 남자의 얼굴이 활짝 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막사의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막사의 천이 휘황찬란하게 휘날리며 강한 햇살이 내 몸을 비춘다.
“그래, 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란다.”
다만 어떤 결말이 될 진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 * *
배알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지체되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놈을 만나기까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운이 좋게도 요정들의 왕이라는 존재가 바로 인근에 있었으며, 급한 사안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 핑곗거리를 들은 나는 조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인데 급한 사안이 없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믿기라도 하지.
‘미끼를 던지자마자 바로 반응을 보일 정도로 급한 사안이라는 것이겠지.’
곁으로는 아닌 듯 보여도 결국엔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난향초접밀이 뭐라고 그리도 성급하게 구는진 모르겠지만, 그거야 직접 입으로 들으면 될 일이다.
때마침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병사가 정중한 자세로 말을 건네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아, 그래?”
그의 안내를 받던 도중, 나는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잠깐만.”
“…네?”
“다른 건 아니고, 우리 구면이 아니던가? 나보고 신병이니 뭐니 하면서 텃세를 부렸었던 거 같은데. 내가 착각했나.”
뜬금없는 질문에 병사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뒤돌아본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정신이 없는 바람에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물론이지. 내가 사소한 실수 하나 한다고 부당한 대우를 할 정도로 각박하진 않아.”
“그… 그렇다면.”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짓자, 병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신에 군생활 앞으로 많이 힘들어지겠다 싶어서.”
“예?”
“폐하 직속인 특사마저도 막 대했는데 다른 상관들도 죄다 봉으로 보일 거 아냐? 아마 소문이 퍼다 하게 퍼졌을 텐데. 뭐 어쩌겠어, 악으로 깡으로 버텨봐야지?”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는 두 눈을 부릎뜨며 대답했다.
“이제 와서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피식거렸다.
“왜 의미가 없어?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좆 같을 게 더 좆 같을 거 아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
미안하지만 내가 탑을 등반하는 누구보다도 뒤끝이라면 자신 있어서 말이지.
사람은 인식하기에 따라 마음가짐이 변하기 마련이다.
본인의 실수 하나로 커리어가 쫑났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보다 혐오스러울 일은 없겠지.
물론 이후의 일은 그의 행동거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나는 그를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오, 본격적인데.’
방안의 인테리어를 살펴보곤 감탄을 내뱉었다.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어서 간소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꽤나 고급진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근엄한 분위기를 내는 한 남성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제이의 기억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쉽게 파악했다.
‘저놈이 요정왕.’
드디어 여기까지 다다랐다.
남은 건 짜둔 시나리오를 따라 일을 진행시키는 것뿐.
어떻게 하면 잘 구슬려 삶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무렵, 상대가 먼저 입을 뗐다.
“듣자 하니 곧바로 복귀했다고 하던데, 난향초접밀과 관련된 일인가?”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본론이라니.
‘생긴 것 그대로 어지간히도 성질이 급한가 보네.’
뭐,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시답잖은 대화로 낭비할 시간을 줄이는 건 이쪽이야말로 환영이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다.
나는 아티팩트를 통해 제이를 연기하는 것뿐이지만, 놈은 나보다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 끝이다.
핵심은 지금부터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라니?”
내가 난데없이 소리를 외치자,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게 난향초접밀을 손에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적군으로부터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물건을 빼앗겼습니다. 아무래도 적측에서 난향초접밀의 존재를 알아차린 거 같다는 거 같습니다.”
나는 침음을 흘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결박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저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찌어찌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에서 부하들이 희생하여….”
굳이 상황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은 삼류나 저지를 짓이다.
열린 결말로 말을 끊어, 나 또한 피해자라고 어필한다.
그렇게 하여 상대가 멋대로 오해하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자 요정왕은 곁눈질로 자신의 무기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렇군… 그랬단 말이지. 그래서 임무에 실패하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 걸 보니 수습할 방법은 있으렷다?”
“물론입니다.”
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뇌까렸다.
누구보다도 복수에 찬 눈빛으로.
누구보다도 분한 듯 눈에 핏발을 바짝 세운다.
“수없이 죽어 나간 동포를 희생과 요정족의 긍지, 그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저희 측에서 총공세를 펼치면 됩니다. 잃었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얻는다. 그게 지금까지 저지른 방식이 아닙니까.”
격앙된 목소리를 꾹꾹 눌러 입에 담자, 요정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네 말대로라면 확실하게 잃은 물건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요정왕은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이내 미간을 좁힌다.
그의 여전히 자신의 애병에 시선이 고정된 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한 네 말이 전부 거짓이라면?”
의심과 거짓.
그는 무기를 뽑아 내 목에 겨누며 다시금 물어본다.
“설사 네가 놈들의 손에 매수되어 짐을 속이는 거라면? 어떻게 증명할 거지. 한 번 증명해 보거라. 증명만 해낸다면 당장에라도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
아주 조용한 어조였으나, 요정왕의 심계에는 서슬 퍼런 한기가 가득했다.
증명해내지 못하겠다면 그대로 목을 떨어뜨리겠다는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다른 이였다면 당장에라도 오줌을 지리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겠지만, 나는 도리어 입가를 쫘악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증명이라… 확실히 폐하의 말씀대로 증명은 아주 중요하겠죠.”
증명.
아주 간단한 말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당연한 일이다.
무릇 무리를 이끄는 자라면 철저한 검증과 증명을 통해 발걸음을 할 곳을 내다봐야 할 테니.
나는 매섭게 한기를 뿜어내는 검날을 무심한 손길로 붙잡았다.
“죄송하지만 증명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포기하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증명보다도 더 확실한 게 있기 마련이죠.”
설령 예를 들자면…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있는 힘껏 열리며 문밖에서 대기 중인 병사가 다급히 들어왔다.
“폐하! 침입입니다! 괴수 놈들이 군단을 이끌고 총공세를 나섰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