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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2화 (82/175)

제82화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나.

어쩐지 그녀에게서 사정을 들을 때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싶었다.

저들의 언급이 뒷받침되면 내가 느낀 위화감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역시 처음부터 느낀 건데, 너희 같은 새끼들은 한 번 뒈져봐야지 정신을 차린다니까.”

검을 어깨에 걸치고 건들건들한 자세로 다가가자,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내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제이는 앞으로 다가오며 사람 좋은 인상을 꾸며 보였다.

“어이쿠, 이거 신한별씨 아닌가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분명 저희끼리 볼 일은 전부 끝난 걸로 아는데, 따로 하실 말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

“으음, 그나저나 일이 있으시면 기척이라도 내시지, 혹시 저희의 뒤를 밟은 건가요? 한별 씨 그렇게는 안 보고 있었는데 상당히 실망스럽네요.”

“…….”

제이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하자, 그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갔다.

이윽고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신한별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할 거였으면 왜 부르셨습니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할 작정이면….”

“너, 내 이름을 까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미안한데 내 이름도 모르는 새끼하곤 말 섞는 취미는 없어서.”

내가 피식거리며 너스레를 떨자, 제이의 혈색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졌다.

마치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듯한 사람의 얼굴.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제이는 차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그러게, 어디에서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까. 하도 들은 내용이 많아서 머릿속으로 정리하기도 벅차서.”

능청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제이를 비롯한 3인조를 둘러본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춘 나는 쌀쌀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부.”

한순간, 묵직한 침묵이 어깨를 짓누른다.

당장 뭐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 순간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직후.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이는 어깨를 들썩이는가 싶더니 미친 사람처럼 폭소하기 시작했다.

“푸흐, 푸흐흐흡! 그랬군요, 그랬어. 차라리 하나만 알고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을 텐데.”

한창 미친 듯이 웃던 제이는 안광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서로 털어놓고 하나만 더 여쭤보도록 하죠. 제가 주입한 독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독? 아아, 안 그래도 입맛이 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독이었어?”

“…….”

가볍게 침을 뱉는 듯한 시늉을 보이자, 제이의 얼굴은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뭐해? 덤벼, 시답잖게 말싸움이나 하자고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왜 그쪽에서 못 덤비겠으면 내가 먼저 갈까. 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후회는 하지 마라, 많이 아플 테니까.

나는 지면을 지르밟고는 힘껏 박찼다.

그 영향으로 일어난 강풍이 주변을 휩쓴다.

비록 탑의 제한으로 인해 본래의 힘에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축소됐지만, 저런 날파리를 못 잡을 정도는 아니다.

‘충분하지.’

아니, 오히려 넘치고도 남는다.

빠르게 남자들을 베어 넘긴 다음, 제이의 앞까지 도달하고는 있는 힘껏 놈의 배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걷어차인 그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이윽고 흙바닥을 구르고는 입에서 피를 울컥 토했다.

그래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듯, 놈은 재빨리 자세를 정비한다.

당장에라도 반격할 수 있는 태세.

썩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지만, 내 앞에서는 그래 봤자다.

“잔말 말고 꿇어.”

검의 손잡이를 이용해 목 뒤를 가격하자, 놈은 나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윽, 뭐가 어떻게 된….”

용케 기절하는 것만큼은 피한 제이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날아든 주먹에 그는 바닥 깊숙이 처박혔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머리채를 붙잡고 끄집어 올리자, 제이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본데.

정신을 차리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시 주먹을 쥐자, 그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힘껏 소리쳤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어서 이놈을 막아….”

제이는 피를 철철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동료들은 이미 곤죽이 되어 쓰러진 지 오래였으니까.

이걸로 도와줄 사람도 없다.

완전히 희망을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놈을 바라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누구한테 말하고 있어? 여기엔 너랑 나밖에 없으니까. 우리끼리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야지.”

“그, 그럴 수가… 언제 당했지. 크윽! 차라리 죽여라!”

뒤이은 내 말에 제이는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역경을 쏟아냈다.

“죽이긴 뭘 죽여.”

뻔하디뻔한 레퍼토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쩜 저렇게 뻔뻔한지 모르겠네.

자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피해자는 우습다는 듯 낄낄거리는 주제에.

끽 해봤자 뼈 몇 군데가 부서졌다는 이유 하나로 손쉽게 편해지고 싶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지구에서도 저런 유형의 쓰레기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많이 봐왔다.

저런 놈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나는 지면에 구덩이를 판 다음에 놈의 멱살을 잡고 집어던졌다.

“쉽게 죽을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놈을 내려다봤다.

아직 끝내기에는 밤은 길고 기니까.

* * *

“이걸로 끝.”

나는 손에 묻은 피를 털며 기지개를 활짝 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보니, 어느샌가 동이 턴 뒤였다.

물론 하룻밤을 세어가며 쓸모없는 시간을 낭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놈들을 처리하면서 꽤나 유용한 정보도 많이 얻었다.

이 정보들이 믿기에 확실한 것들인지는 나름대로의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거기엔 이만한 것만큼은 없겠지.’

나는 포켓에 손을 넣어 수납한 아티팩트를 꺼냈다.

〈재액의 가면(A)〉

- 지정한 대상자의 얼굴과 체형, 목소리를 복사합니다.(제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을 시, 효과가 해제됩니다.

※ 주의! 남의 얼굴을 복사했다고 하더라도 못생긴 얼굴이 바뀔 일은 없으니 착각하지 맙시다!

정보를 캐내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지.

재액의 가면을 활용하면 놈으로 변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기억까지도 훔칠 수 있다.

나는 곧바로 복사한 재액의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러자 가면의 효과로 의해 외모와 체형이 제이의 것으로 변한다.

게다가 요정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날개까지도 말이다.

나는 등에 달린 날개를 시험 삼아 위아래로 움직여 보곤 빠르게 관뒀다.

느낌을 설명하자면 뭐랄까.

한창 근육통이 심각한 부위를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랄까.

‘쯧, 이건 못 써먹겠네.’

어차피 사용할 수 없는 거라면 미련을 가져봤자 의미 없다.

나는 빠르게 단념했다.

그다음은.

“큼큼. 아, 아⎯ 목소리도 썩 나쁘진 않네.”

목소리도 문제없음을 확인한 나는 씩 웃음을 지었다.

이만한 퀄리티의 분장이라면 문제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뒤처리도 마무리 지으러 가야지.

빠르게 결정을 내린 나는 놈의 기억을 되짚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자, 숲의 끝자락에는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들어갈까 하는 크기의 게이트가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했나 보네.’

게이트를 발견한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제이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이 바로 놈의 거주하는 차원과 이어진 게이트.

혹시나 게이트가 도로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이곳을 넘어서면 28층에 인위적으로 재앙을 일으킨 당사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재앙을 일으키는 원동력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번 층을 손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뿐더러 별꿀 파라다이스의 문제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만한 기회를 손에 거머쥐지 않고는 못 배기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게이트를 손을 뻗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아주 간략한 시스템의 물음.

“그래.”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파아아앗!

대답과 동시에 게이트를 뒤덮던 섬광이 점멸하며 내 시야를 좀먹기 시작했다.

“윽!”

나는 강렬한 빛을 막기 위해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앞을 가렸다.

그 상태로 30초에서 1분가량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심스럽게 손을 떼자, 가장 먼저 시스템 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B-621 차원입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문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에서 본 거 같은데?

골똘히 과거를 회상하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러고 보니 16층에서도 저런 것과 비슷한 문구가 떴었지?’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든다 싶었다.

16층과 28층.

도저히 연관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서로 상반됐지만, 하나만큼은 연관 지을 수 있었다.

본래 플레이어가 등반하는 층에서부터 떨어진 장소.

16층에서는 탑의 튜토리얼이라는 컨셉으로 층을 진행하다 말고, 벽을 뚫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으며.

이번 층에서는 게이트를 통과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섣불리 결론짓기에는 부족하지만.” 분명 유일한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해도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다.

아주 우연찮게 겹친 일일지도 모르니.

충동적으로 결정을 짓기에는 이르다.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문득 주변을 둘러본 나는 의문을 입으로 내뱉었다.

일단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긴 했는데, 여긴 뭐하는 곳이야.

제이의 기억을 훑어봐도 이 장소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펄럭!

천막의 문이 활짝 열리는가 싶더니, 장장 8척은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이 이쪽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신입!!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얼빠지지 말고 움직이라고 했지!”

불쑥 나타난 남성의 호령,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부른 대상을 깨달은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요?”

이게 말로만 듣던 경력 있는 신입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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