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장난스럽기까지 한 내 어조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방금 전에 한 발언을 간과하고 넘길 수 없다고 여긴 탓인지, 3인방 중 한 명이 인상을 구기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라고 했지?”
“사지도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귀도 먹었나. 뭘 그리 인상을 구기고 있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긴장 풀어.”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뿜었다.
“대충 행색을 보아하니, 이제 막 올라온 등반자 같은데 다 장사하자고 하는 일을 가지고 괜히 주제도 모르고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신경 끄지?”
“아 그래? 그러면 내가 먼저 저쪽하고 대화하던 와중에 너희가 막무가내로 끼어든 건 상도덕에 맞고? 남한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 대한 기준은 제멋대로인가 봐.”
과장스럽게 양팔을 펼치며 비아냥거리자, 남자는 매서운 기세로 눈을 부라렸다.
순식간에 살벌해진 상황.
당장에라도 무력으로 나서도 이상한 거 없는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등반자 주제에 오지랖이 대단하시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뒷감당이라…
아예 시비를 걸겠다는 이야기다.
번지르르하게 말만 해 놓고, 직접 덤비진 못할 거라고 아주 단단하게 착각하시고 계신가 본데.
이미 탑의 진행자도 직접 때려눕혀 본 전적이 있다.
듣자 하니 그때 덤볐던 진행자는 지금은 수저도 못 들 정도로 손을 덜덜 떤다고 하지.
한번 해본 일인데, 두 번 못할 건 없다.
한창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바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이거야 원. 아무래도 분위기가 끓어오른 모양인데 우선 화를 가라앉히지, 그래요. 너도 그렇고 이만하면 됐잖아.”
“하, 하지만….”
“됐어, 저분의 말씀대로 이미 선객이 있었다잖아. 오히려 약속도 안 하고 불쑥 찾아온 우리가 여기에서는 물러서야지.”
방금 전까지 나와 맞서던 이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가차 없이 말꼬리를 끊었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길에 그는 꼬리를 내리고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거렸다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이 세 명 중에서 대가리인가 보네.’
비실비실한 게 꼭 나뭇가지처럼 생겨선.
만화에서 보면 실눈캐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거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던데 역시 창작과 현실은 다른 법인가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싱글거리며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악연도 결국은 인연이라고 했던가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쪽의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내 이름? 알려 주는 건 상관없는데. 남의 이름을 물어볼 때는 먼저 자기를 밝히는 거라고 안 배웠어?”
가시가 돋친 말에 남자는 한순간 정색했다.
일순이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진 압박감이 피부를 따갑게 찌른다.
그것도 잠시,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남자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었다.
“이것 참, 하나부터 열까지 면목이 안 서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여러모로 실례를 범하네요. 이러다간 사과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겠어요.”
그는 가늘게 뜬 눈을 번쩍 뜨며 이쪽을 향해 한 발짝 발걸음을 디딘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뻗으며 악수를 하였다.
“저는 제이라고 합니다. 꼭 기억해 두시길.”
“신한별, 거추장스러우니까. 내 이름은 외우지 않아도 돼.”
“에이, 그럴 수가 있나요. 사람의 이름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는 건 제 특기거든요. 그러니 그 점은 걱정 마시길.”
“마음대로 하던가.”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붙잡은 손을 털어내듯 뗐다.
제이는 가볍게 손목을 매만지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됐으니 신한별 씨께서 해주신 충고대로 다음번에는 선약을 잡고 오겠습니다. 다음 번에 보게 된다면… 뭐 거기까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
이어진 제이의 발언에 그녀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제이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을 뒷모습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여겨보던 그녀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입술을 꽉 깨문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몸을 돌렸다.
딱딱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그보다도 먼저 그녀가 물음을 건넸다.
“어째서 그랬어.”
“왜 그랬긴. 받아야 할 물건이 있는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저 새끼들이 내 몫까지 챙겨가는 꼴은 눈 뜨고 볼 순 없잖아.”
얘는 당연한 이야기를 뭐하러 물어보고 있어.
“착각하면 곤란한데, 나도 받을 물건이 없었으면 나설 일도 없었어.”
“…….”
“뭐, 그러니까. 내 물건 받기 전에는 저놈들이 널 건들 일은 없을 거야. 물론 그에 대한 보상은… 말 안 해도 알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물었다.
“그래서 저 새끼들이 저러는 이유가 뭐야.”
다른 건 다 좋다.
보호하더라도 사정 정돈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아무런 앞뒤 사정도 모른 채 지키는 남을 지키는 것은 사양이다.
“굳이 말하기 싫다면야 억지로 말하진 않아도….”
“아니, 말할게. 그다지 말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녀는 굳게 결심한 듯한 얼굴로 어렵게 더듬거리듯 과거의 일을 설명했다.
“때는 몇 년 전이었어. 비록 지금은 나밖에 없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동료들과 같이 이 화원을 가꾸고 있었어.”
“그래?”
그녀의 언급 나는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하긴 화원의 본체는 난향초접밀이라지만, 이만한 면적을 관리하는 일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넘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보낼 수 있었어. 그리고 결정적인 일이 터진 것은 놈들이 군대를 앞세워 이곳에 도착한 날이었어.”
이야기 속 ‘놈’의 정체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군대를 앞세워 화원까지 도달한 놈들은 괴수로부터 화원을 지켜주는 대가로 매달 일정량의 다과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어.”
“흐음.”
그녀의 설명에 나는 무감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방식에 있어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서로 잃을 것 없이 윈윈인 관계다.
요정들은 괴수들로부터 화원을 지킬 수 있으며.
놈들은 화원을 지킴으로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단지 이뿐인 이야기였다면 그녀의 현재 처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론은 다음부터 이어졌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28층은 재앙으로 인해서 화원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 없는 환경이야.”
“그렇지.”
“다과의 생산량이 줄어들자 놈들은 그걸 빌미로 돈과 내 동료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어.”
일방적인 탄압.
만약 이 이야기를 제삼자가 들었다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 거래를 파기하지 않았느냐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일이 없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건 허울 좋은 소리고.’
애초에 놈들은 군대를 내세워 불공정조약을 내세웠다.
처음부터 화원을 지키는 요정들한테는 선택지 따윈 없었으리라.
그녀의 얼굴에선 잠시 분노가 서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쓸쓸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뒤의 일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후에 벌어질 사건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그만 하면 됐어. 대충 네 사정은 알았으니까.”
“…….”
“대충 상황도 알았으니까. 그럼 가볼까.”
“가다니, 어딜?”
이어진 내 말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되물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어딜 가긴. 한 방 먹었으면 저쪽한테도 똑같이 한 방 먹여줘야지.”
그뿐이다.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그녀는 다급히 나를 불러세웠다.
“자, 잠깐만!”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 나는 펠리안이야. 혹시나 해서.”
아까 전의 남자들과의 대화가 신경 쓰였을 탓일까, 그녀는 머쓱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에 나는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 * *
“형님! 진짜로 이렇게 물러나실 겁니까!! 놈은 등반자입니다! 등반자한테 이렇게 무시당하고 넘어가실 셈이냔 말입니다!”
화원과 상당히 떨어진 숲속.
방금 전까지 신한별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남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제이를 향해 외쳤다.
“게다가 상부에서 이번에는 무조건 난향초접밀을 입수해 오라고 했습니다. 형님께서 물러나시겠다면 제가 직접 나서서 회수해 오겠습니다!”
“아서라.”
“형님!”
“너는 내 말이 귓구멍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
냉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섬찟한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이 얼음장이 되었다.
“너희들이 왜 상부에 눈에 들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무르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않니?”
“…그게 무엇입니까.”
“너는 성급하게 행동을 해. 대책 없이, 무대포, 생각 없이 행동을 저지른단 말이지.”
비난이 쏟아졌지만, 남자는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화원을 바라보는 제이의 시선이 너무나도 매서웠기 때문에.
“난향초접밀을 얻기 위해 화원에 괴수 놈들을 풀어놓고 군대를 동원해 저 날파리들과 체약을 맺었다. 그리고 놈들을 천천히 말려 죽이기 위해 저 땅에 재해를 일으켰다. 그것마저 부족해 의지를 꺾기 위해 저년의 동료마저 팔아치웠지.”
제이는 손목을 매만지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자그마치 몇 년, 이번 일을 해내기 위해 몇 년이나 되는 세월을 거쳐 포석을 깔았지. 그런데 단지 감정이 상한다는 이유로 일을 그르칠 생각이더니?”
“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이니.”
제이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예?”
“방금 물어봤었지? 이대로 물러설 거냐고.”
“네… 네, 분명 그랬습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압박감에 남자는 몸을 움츠렸다.
“뭘 그리 겁을 먹고 그러느냐. 놈이라면 이미 처리해뒀으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처, 처리했다니… 도대체 언제?”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잡았을 때, 놈의 혈관에 독을 주입했지. 지금쯤이라면 온몸이 불에 타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수가!”
남자는 감탄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분명 고놈의 신한별이라고 했었지? 녀석의 말대로 이미 죽었을 테니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겠군. 의도치는 않았지만 약속을 지킨 셈이 되겠구나.”
입을 쫘악 늘어뜨리며 미소를 짓자,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소름을 느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확실할 것이다.
미처 가시지 않은 여운에 전율을 느끼고 있을 때쯤이었다.
“새끼들이 꿈도 야무지네.”
숲의 너머로부터 들린 목소리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로 인해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저 목소리는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들의 예상에 적중하듯 숲에서 나타난 남자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죽긴 누가 죽었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