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80화 (80/175)

제80화

잇따른 내 발언에 그녀는 아연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마치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사람 같은 얼굴.

그녀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으며 되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뭐긴, 방법이 있다고. 여길 다시 되살릴 방법이.”

“……!”아주 확실하게 단언하자, 그녀는 내 앞으로 재빨리 날아왔다.

“도… 도대체 그 방법은 뭐야? 보상이라면 내가 확실하게 해줄 테니 어서 방법을….”

“아니, 그 전에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지.”

“확실하게라니?”

나는 잔뜩 흥분한 그녀를 제지하며 말꼬리를 끊었다.

그러자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입에서 다음으로 나올 말이 무엇일지 몰라서.

영 불안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사정도 모르는 제삼자가 이 장면을 봤다면 내가 약점을 잡고 난동이라도 부린 줄 알겠네.

오히려 따지자면 그 반대지.

“난 아직 해명을 못 들었는데.”

“해명이라니?”

“알만한 건 다 알 법한 사람이 아마추어같이 뭘 시치미를 떼고 그래.”

나는 볼에 길게 그어진 자상을 가리켰다.

“내가 여기에서 비명횡사할 뻔한 건 없던 일로 치려고?”

28층에 도착한 직후. 그녀는 나를 향해 참격을 날렸었다.

기지를 발휘해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꼴이 되었을 진 뻔했다.

“자칫해서 내가 콱! 뒈져 버렸으면 이 화원을 살리고 자시고 그런 얘기도 안 나왔을 텐데.”

안 그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가시가 돋친 말에 그녀는 우물거리며 내 눈치를 살핀다.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해도 이미 무르기에는 늦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말로 꺼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넘어갔으리라.

내 성격에 그 꼴은 못 보지.

“왜, 아무 말도 못 하겠어?”

“그… 그건 아닌데 난 네가 화원을 망치려는 줄 알고….”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얼굴? 아니 그냥 생긴 거 자체가 험악하게 생겨 먹어서 그렇게 착각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남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 이거지.

물론 외모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이진 않는다. 종족의 차이는 있을 테니 어느 정도는 나도 이해한다.

우리가 오크를 보면 죄다 하나같이 혐오스럽게 생겼지만, 오크들끼린 멀쩡히 서로에게 반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거기에 대해선 묻지 않았으면 한다. 나도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거든.

어쨌든 간에.

“잘됐네.”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쪽에서 철면피를 쓴다면 나도 뻔뻔한 태도로 나서도 별말 없을 테니까.

씌이이잉!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검의 날이 햇빛에 반사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떨떨한 모양인지 그녀는 불안감이 맴도는 안색으로 질문을 던진다.

“갑자기 검은 왜?”

“아, 별 건 아냐. 하나만 해보고 싶어서.”

“해보다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네 말대로 착각으로 검을 화원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싶어 말이야.”

단지 그뿐인 이야기다.

그 대답을 끝으로 나는 양 팔에 힘을 질끈 줬다.

근육이 우수수 돋아나며 가공할 만한 기력이 일어난다.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잠깐, 잠깐만!!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 테니까!”

“에이, 뭐하러 사과하고 그래. 서로 한 번씩 착각하고 한 건데 그럴 거까진 없어.”

공평하게 한 번씩이다.

서로 한 번씩 실수하고 넘어가면 얼굴 붉힐 일도 없잖아.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자, 그녀는 서둘러 내 팔을 붙잡았다.

“으윽, 무슨 힘이….”

무력으로 뜯어말리려는 작정인 듯했으나, 제힘으로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아, 아직 판매하지 않은 다과가 몇 개 남아 있는데 사죄의 의미로 너한테 전부 줄게. 분명 어디든 팔아도 상상 이상의 가치로 팔릴 테니까. 그러니 제발…!”

그녀의 말에 나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진작에 그러지, 그래.

“그럴 거였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하마터면 아무 죄 없는 화원을 날릴 뻔했잖아.”

뒤이은 혼잣말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훌쩍거렸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컸나 보다.

아무튼 사소한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나는 손을 털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화원을 구할 방법이 있냐고 나한테 물었었지?”

“저, 정말로 되살릴 방법이 있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27층에서 획득한 생명의 석을 꺼내 들었다.

아티팩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걸 쓰면 황폐한 대지를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하게 만든다 했다.

이게 있다면 화원을 구하는 것에는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 추측대로 아티팩트의 설명을 읽어보던 그녀는 턱이 빠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벌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정신을 다잡았는지 내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너! 이건 어떻게 구했어!”

“이걸 어떻게 구했냐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게 있으면 지금 닥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확실히… 네 말대로 이거라면 화원을 살릴 수도 있겠어.”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생명의 석을 부여잡는가 싶더니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사뭇 심각하게 굳어 갔다.

“정말 미안하게 됐지만, 이건 못 본 걸로 해도 될까.”

“지금 뭐라고?”

직전까지와 180도 달라진 그녀의 발언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한 아이 같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었다.

남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인상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그녀는 한참 동안 생명의 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아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게 제안했다.

“너한테 보여 줄 게 있어. 잠시 시간을 내줘.”

* * *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임이 당연했지만, 앞서 나가는 그녀의 어깨는 왠지 모르게 축 처져 있었다.

외통수에 걸린 듯한 분위기.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의 발걸음이 다다른 장소는 드넓은 화원 위로 돔 형태의 반투명한 공간이 있었다.

다른 장소는 꽃들이 전부 시들어버린 것에 반해, 돔 내부의 꽃은 싱그럽게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긴?”

“…….”

“재앙 때문에 화원은 전부 메말라 있던 게 아니었어? 거기에 있는 꽃은 뭔데?”

“…….”

내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돔을 매만진다.

아무리 질문을 해도 대답이 없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하려고 할 즈음, 그녀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있는 게 뭐냐고 질문했지? 이건 난향초접밀이라는 꽃이야.”

“난향초접밀?”

나는 눈초리를 가늘게 떴다.

탑에 대한 여러 지식을 갖진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더더욱 약초나 꽃에 대한 거라면 플레이어 중에서도 나보다 박식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처음 보는 존재에 관심이 동한다.

내가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설명을 이었다.

“그래,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꽃이 화원의 본체야.”

“본체라고?”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더욱 정확하게는 난향초접밀이 뿌리고, 여기에 펼쳐진 화원이 꽃의 줄기인 셈이지.”

아, 그래서 본체라고 말한 건가.

“재앙 때문에 난향초접밀마저 시들어 버리는 걸 방지하려고 내 권능을 사용해 상황이 악화하는 걸 막아 내곤 있지만….”

“그럼 생명의 석을 사용해서 난향초접밀이 있는 대지만 살리면 화원 전체가 살아난다는 거네. 뭐야 간단하잖아.”

“네 말대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이 이상 말하기는 곤란한 듯한 눈치.

본인이 사정을 밝히기 곤란하다면 부외자인 내가 나설 이유도 없다.

흥미가 식었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어.’

귀찮긴 해도 이번 층에서는 빨리 클리어하는 건 관두고, 일주일만 버텨야지.

그대로 그녀를 등지고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어이, 애송이! 준비해 두라는 건 전부 준비해 놨겠지?”

공중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3인조의 남성이 있었다.

외견만 보면 같은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그녀와 같은 종족임을 증명했다.

“아는 사람인가?”

뭐, 이렇게 넓은 필드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리고 이젠 내 일도 아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취미는 딱히 없다.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쫘악! 쫘악! 쫘악!

갑작스레 들린 파찰음에 눈길을 돌리자, 남자가 날린 손바닥이 그녀의 볼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보아하니까. 아직도 준비를 안 한 모양이지. 저번에 왔을 때 확실히 얘기했지? 이번에는 말로는 안 한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기다려 주긴 뭘 기다려! 그깟 다과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상부한테 꼽을 먹는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한 번이라고 비명을 지를만했지만, 그녀는 어금니를 꽉 물며 고통을 참았다.

필사적인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년이 이래도 참아? 좋지, 오늘 네가 죽나 아니면 내가 먼저 죽나 한번 보자!”

채찍을 휘둘러지기 바로 직전.

나는 한 손으로 채찍을 낚아챘다.

그 모습에 남자는 핏대를 세우며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하! 내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네. 넌 뭐야?”

“내가 누구냐고? 글쎄, 굳이 따지자면 이쪽의 고객님이랄까.”

내 손끝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내뺐다.

“고객? 고오객? 이 년이 돌았나. 그동안 사업장 관리를 안 했다고 막 나가겠다 이거지?”

“됐고. 그 더러운 손이나 치워. 저쪽한텐 직접 받아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

차갑게 뇌까리자, 남자는 비웃기라도 하듯 폭소했다.

“푸흐흐흡, 물건은 개뿔. 거기 형씨 저년한테 상품을 받을 생각이면 관두기나 해. 이곳에서만 나오는 다과는 전부 우리 거니까. 그쪽한테 줄 물건은 하나도 없어. 이거나 먹고 꺼져. 카아아악⎯ 퉤엣!”

남자는 비웃으며 걸쭉한 가래침을 내뱉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를 바라보며 낄낄댄다.

“아아, 그 다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내가 잘 알지.”

대충 보니 저들의 성향은 잘 알겠다.

저런 유형의 인간이라면 지구에서도 많이 봤었기에, 대처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한테 줄 다과, 개쩔더라?”

** [난향초접밀]은 해비베어 작가님의 [꿀 빠는 천재 양봉가] 속에 나오는 네이밍을 허락하에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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