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79화 (79/175)

제79화

마침내 도착한 신전의 중심부는 마치 수족관처럼 모든 벽이 투명한 유리로 이뤄져 있었다.

너울지는 파도와 소용돌이에 의해 팔랑거리는 오색 빛깔의 산호초.

유리 너머로 비치는 새파란 바다 빛은 장천을 연상케 했다.

바다 속에서 펼쳐진 한 장의 화폭은 그저 멍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심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순식간에 눈길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으나, 나는 간단히 무시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이게 뭔데?”

내 시선 끝에 닿은 것은 푸른빛을 띠는 보석.

단상 위에 고이 모셔진 아티팩트를 뚫어져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해 봐야 손톱만 한 크기일까.

보석을 향해 손을 뻗자, 때마침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생명의 석(A+)〉

- 27층 신전에 위치한 단 하나밖에 없는 보물.

- 제아무리 황폐한 토지라도 한순간에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하게 만듭니다.

- 이런! 배고픈 당신!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이걸 씹어먹을 생각은 하지 맙시다! 자칫하면 다칠 지도 모릅니다!

시스템창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다 말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어디다 써먹어.”

농사를 젓더라도 비료로도 안 써먹겠다.

이런 아티팩트가 왜 A+급이나 하는가 하는 원초적인 의문마저 들었으나 그만 체념하기로 했다.

쓸모없는 물건을 두고 한탄을 해도 이미 정해진 일이 바뀌진 않는다.

아니꼽긴 해도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뭐.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 얻은 아티팩트를 수납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숨겨진 조건: 바닷속 신전을 찾아 클리어하기를 해결하셨습니다.〉

〈27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7층의 점수가 집계되었습니다.〉

〈획득 점수: 5013점〉

오래간만에 반가운 메시지에 나는 눈을 희번뜩 떴다.

이번 층에서는 더 이상 볼일도 없겠다.

언제쯤이면 이번 층이 끝날까 싶었는데 잘됐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신전의 경치를 즐기며 좀 더 시간을 끌었을지도 몰라도, 나한테는 최대한 빨리 탑을 등반해야 하는 목표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면서 흐지부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그럼 다음 층으로.”

다음 층으로 이동하겠냐는 질문에 긍정하자, 하늘에서 새하얀 섬광이 떨어졌다.

파아앗!

〈28층으로 이동합니다.〉

* * *

〈28층입니다.〉

〈이번 층의 컨셉은 재해- 가뭄, 황사, 지진입니다.〉

〈28층의 고유 패널티로 인해 착용하신 무구나 지니신 아티팩트의 효과 및 플레이어의 힘이 60% 감소합니다.〉

〈일주일간 재앙에서 살아남거나 3일 이내에 재해를 막아 내십시오.〉

28층에 도착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의 설명을 읽어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이번엔 재앙이 동시에 세 개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까짓것 못 할 것도 없지.”

언제 내가 그런 걸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져가면서 탑을 오른 적이 있었던가.

탑의 최상층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전부 겪었었던 과정이었을 텐데, 나라고 해내지 못한 건 없다.

28층을 향한 힘찬 첫걸음을 내뻗으려던 즈음.

언제부터 들어가 있었는지, 둘리는 내 품속에서부터 불쑥 얼굴을 내빼며 한탄을 내뱉었다.

“한별, 여기 너무 건조하고 덥다. 둘리는 너무 더워서 꿈쩍도 못하겠다.”

녀석은 혀를 날름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쉰다.

확실히 녀석의 말대로 재앙의 영향 탓인지 저번 층에 비하면 좀 후덥지근한 거 같긴 한데…

“근데 넌 덥다면서 거긴 왜 들어가 있어?”

차라리 그냥 땅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몰라.

보통 바깥보다도 옷 안쪽이 더 덥지 않나?

문득 든 의문에 둘리의 머리를 잡아당기자, 녀석은 끈질기게 내 허리춤을 잡고 버텼다.

“아, 아니다! 바깥보다도 한별의 옷 안이 더 시원하다! 밖은 절대로 못 나간다!!”

“무슨 개소리야. 거기에 에어컨이라도 박아뒀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무슨….”

둘리를 구박하려다 말고, 나는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백룡의 갑옷.

이래 봬도 SS+급 아티팩트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드래곤로드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인데, 그런 기능 하나둘쯤 탑재되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한별?”

“…….”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둘리는 얼굴을 들이밀며 이름을 부른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둘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아, 알겠으니까. 거기에 가만히 박혀 있어.”

“헤헤, 알겠다.”

내게서 동의를 구한 둘리는 뭐가 그리도 좋은 모양인지 실실 쪼개며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걸로 급한 불은 껐겠다.

한 번 슬슬 이동해볼까.

본격적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발걸음을 뻗는데, 바로 밑에서부터 무언가 말라비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슥!

싸한 느낌에 고개를 떨구자, 그곳에는 수분기가 없다 못해 완전히 말라버린 꽃이 존재했다.

“꽃밭?”

문득 주변을 둘러보자 광활한 평야 위로 내가 밟은 꽃과 똑같은 종으로 이뤄진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곁으로 보기에도 상당한 넓이.

비록 가뭄과 황사로 수분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일정한 간격과 잡초 없이 정리된 화원은 얼마나 세심하게 관리가 됐을지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누가 봐도 꼼꼼한 케어가 있었을 테지.

화원의 꽃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죽어라!”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숱한 살기에 나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상당한 거리로부터 쇄도한 칼바람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처 피하지 않았다면 목이 떨어지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물론 그것까지 전부 감안해서 피한 거지만.

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를 손으로 훑으며 살기가 느껴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전부터 뭐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은 들었지만, 죽어라가 뭐야 쪽팔리게.”

그렇게 소리만 빼액빼액 지르면 당할 것도 전부 피한다.

요즘 대세인 양판소 웹소설 악당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겠다.

나는 먹구름만 가득한 하늘을 가늠하며 손끝에 묻은 피를 핥았다.

‘대충 이쯤인가.’

정확한 지점을 조준한 뒤, 그 자리를 향해 손가락을 튕긴다.

손끝에서 튕겨 나간 풍압은 빠르게 나아가다 말고 하늘에서 화약처럼 폭발했다.

“으악!”

풍압이 폭발한 지점으로부터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드리웠다.

그리고는 새하얀 연기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검은 인영이 나가떨어진다.

지면에 떨어지기 직전, 검은 인영은 필사적으로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광경을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보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내 눈앞에 나타난 검은 인영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동떨어진 신체를 하고 있었기에.

“날파리?”

“누구더러 날파리라는 거야!”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떠오른 형체를 말하자, 검은 인영은 그에 반발하듯 나를 향해 날아왔다.

역시…

“날파리 맞네.”

검은 인영은 정체는 한 뼘만 한 크기에 여섯쌍의 날개를 지닌 요정이었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조금 날파리로 보이지 않았지만.

자그마한 소재로 대화를 나누다 말고, 그녀는 적잖게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 내 모습을 보고도 놀랍지 않아?”

“놀랍긴 뭐가 놀라워.”

탑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그녀를 보고 꽤나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탑에서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볼 거, 못 볼 거 가리지 않고 전부 본 놈이다.

이제 와서 조그마한 크기에 등짝에 날개가 달린 별종을 본다고 해서 놀라기라도 할까.

딱히 신경도 안 쓰인다.

우유부단한 내 태도에 그녀는 호기로운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여기를 거친 인간들은 전부 나를 보고 놀랐었는데… 아니! 그것보다도 내 화원!”

그녀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은 표정으로 말라비틀어진 꽃을 매만진다.

허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꽃은 손아귀 안에서 가루가 되었다.

애틋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궁금증을 던졌다.

“그게 뭔데?”

“흥, 너 같은 인간은 이곳의 가치 따윈 모르겠지. 듣고 놀라지나 마셔! 이 꽃에서 나오는 꿀이 전부 그 유명한 별꿀 파라다이스의 다과의 원료라고!”

“별꿀 파라다이스?”

어디에선가 들어본 익숙한 네이밍에 기억을 되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떠올린 나는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거, 하긴 예전에 출출할 때 먹어 봤는데 괜찮았지.”

“너… 너 설마 우리 화원에서 나온 다과를 먹어 본 적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그녀는 물망울만 하게 커진 눈으로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 언제였더라. 아눌드 공방에 들렀을 때. 먹었어.”

그땐 나름대로 별미였었지.

그러고 보니 별꿀 파라다이스제 다과는 이제는 억만금을 줘도 없어서 못 구한다고 했었던가.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이제 보니까. 대충 상황을 알겠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화원을 슥 훑었다.

다과의 핵심이기도 한 원료가 나오는 꽃이 이 모양인데 먹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게 당연하지.

아눌드 공방에 있을 당시엔 챙겨 오고 싶었는데, 재고가 부족해서 구하지 못했다고 들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입맛을 다시며 넘어가려다 말고, 나는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잠깐만, 화원이 망한 이유가 전부 28층의 재액으로 인해서라고 했었지.

이거 잘만 하면 내가 이 화원을 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거기 날파리, 내가 이 화원을 되살릴 수 있다고 화면, 넌 믿을 거야?”

“화, 화원을 살린다니 어, 어떻게….”

내 질문에 그녀는 솔깃했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글쎄.”

어떻게긴.

내 손에 이 화원 전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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