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77화 (77/175)

제77화

27층에 도착하자마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던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26층 내를 누비기 바빠서 잠시 깜빡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궁금증이 샘솟았다.

플레이어들로 이뤄진 수십 개의 팀.

기대가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양심적으로 내가 한 활약으로 전체 1등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듣기론 3대 길드라는 곳에서 작정하고 루키들을 밀어 줬었다고 했던가.’

언젠가 커뮤니티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물론 익명으로 운영하는 커뮤니티의 특성상,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다지만.

원래 소리도 손뼉이 마주쳐야지 나는 법이다.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해서 실제로 대형 길드에서 밀어 주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지.”

게다가 이번 층은 팀원이 가진 점수를 전부 합산하여 순위를 매기는 방식.

일전에 파티를 찾기 위해서 둘러봤을 당시 대형 길드의 루키가 속한 쪽은 전부 만석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점수가 많으면 많았지 적을 리는 만무했다.

반면 내가 들어간 파티는 대충 아무 곳이나 들어갔으니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적당히 중상위권이면 충분하겠지.

나는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랭킹을 확인했고.

〈획득 점수: 4,023점〉

곧바로 의문을 떠올렸다.

이게 높은 거야. 아니면 적은 거야?

아무런 비교 조건도 없이 내 점수만 나와 있으니 영 감이 안 잡힌다.

대조를 위해 서둘러 파티의 총점수를 확인한 나는 말을 잃었다.

〈[드래곤의 엄니]의 누적 점수: 4,573점〉

“…….”

그러니까. 내가 얻은 점수가 4천 점인데, 파티의 총점수가 500점가량밖에 안 된다고?

넉넉하게 반올림한다고 해도 인당 획득한 200점.

내 점수가 비교한다고 해도 너무 양심 없는 점수다.

“잠깐만 그러면 전체 랭킹은….”

나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랭킹을 눌렀다.

그리고, 26층에 참여한 모든 파티의 점수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가관이었다.

〈1등: [드래곤의 엄니]-4,573점〉

“미친.”

랭킹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적당히 중상위권에만 랭크 해도 대만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다못해 1등이란다.

그것도 최하위가 아니라 맨 위에서 첫 번째.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나는 넋을 잃었다.

기본적으로 상위권에 랭크된 파티는 파티원이 한계 인원까지 꽉꽉 채워져 있다. 반면 드래곤의 엄니의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뿐.

‘아, 그러면 우리 팀원도 나름 나쁘지 않게 점수를 획득했다는 얘기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지 내가 획득한 점수가 압도적이라서 그렇지, 팀원들도 내내 뛰어다녔다는 뜻이니까.

자칫하면 억울할 뻔했는데 다행이네.

“그러면 2등은 도대체 어느 파티가….”

자연스레 리스트를 따라 하단으로 눈을 내린 나는 소스라치듯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2위: ♧♡♥→쁘띠 신협단←♥♡♧- 3,501점〉

응, 다시 생각해 보니까. 1위 외에는 비슷비슷하니까 안 봐도 될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시스템창을 종료했다.

봐선 안 될 심연을 목격한 것 같아서.

더 이상 쓸모없는 걸 알았다간 정신에 해로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시스템창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설명에 따르면 27층의 컨셉은 빙하기.

‘확실히 춥긴 하네.’

모든 것을 삽시간에 얼려버릴 추위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였으면 이런 추위도 가소롭다는 듯 넘길 테지만, 시스템의 영향으로 모든 능력치가 저하되어 그런지 쌀쌀하긴 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네.”

기감을 통해 주변 수십 킬로를 훑어본 나는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초목은커녕 탑에서는 그 흔하다는 괴수의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평평한 설원에 그저 눈과 얼음밖에 없다.

마치 망망대해 위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다.

“차라리 괴수라도 있으면 사냥이라도 하면서 시간이라도 때우지.”

27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이곳에서 일주일간 버티는 것.

이 정도면 추위에 동사하는 것보다도 심심해서 죽는 게 먼저겠다.

불만을 투덜거리고 있자, 상공을 둘러보던 둘리가 내려왔다.

“한별! 한 번 찾아봤는데 위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 그건 좀 곤란한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내가 직접 확인해서 나오면 어쩔래.”

“하, 한별… 나 둘리다! 설마 둘리의 말을 못 믿겠나?”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둘리.

녀석의 모습에 나는 피식거리며 말을 덧붙었다.

“어, 영 못 믿겠는데.”

“…….”

“그동안 활약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전부 내가 했잖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객관적으로 보면 그동안 둘리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도 죄다 내가 처리하지 않았던가?

사실상 저번 층에서도 전부 내 활약이었다.

직설적인 어투에 둘리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문다.

녀석이 시무룩하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이번에도 꽝인가.’

혹시 26층에 있던 하늘섬처럼 숨겨진 장소라도 없을까 싶었는데, 아무것도 없을 줄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리의 말도 영 틀리진 않았을 거다.

명색이 드래곤이 하늘 위를 모를 리는 없겠지.

내 밑에 있어서 무능해 보일 뿐이지, 생태계에 있었다면 어지간한 괴수는 씹어먹고도 남는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이번 층은 여기서 일주일 동안 버티지, 뭐.”

생각해 보면 지금까진 운이 좋았다.

내가 특이한 케이스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시스템의 말에 따라가는 게 일반적이다.

찾는다고 쉽게 찾아지면 탑에서 굳이 숨겨진 조건이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마음을 편히 먹고 짐을 내려두려는 그때였다.

“으엑! 퉷, 퉷!! 짜다 짜!”

갑작스럽게 귓가를 파고든 비명.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바닥에 엎드린 채 얼음에 혀를 대고 있는 둘리가 있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어?”

엉뚱하기 짝이 없는 둘리의 모습에 나는 황당한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둘리는 앙증맞은 두 손으로 혀를 탈탈 털어낸다.

“퉷! 으으, 목이 마려워서 얼음이라도 씹어 먹으려고 했는데 이거 너무 짜다!”“그래?”

둘리의 투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야 시스템의 영향 탓인지 식욕이나 갈증을 느끼진 않지만.

둘리는 식욕과 갈증을 멀쩡히 느낀다.

더욱이 성장기니 충분히 먹어줘야지.

어디에서 물이나 먹을 거라도 조달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포켓 안을 둘러보던 즈음이었다.

문득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오른 것은.

‘근데 얼음이 왜 짜?’

여기에 펼쳐진 설원도 결국 하늘에서 내린 눈이 쌓인 결과물일 텐데 그럴 리가 있으려나.

묘한 느낌에 나는 얼음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까득!

얼음을 깨물자, 둘리의 말대로 짜디짠 감각이 확 올라온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인상을 구기며 입 안에 남은 얼음을 뱉었다.

확실히 짠맛이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모양인지 다른 곳의 얼음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이번 층의 컨셉은 빙하기.

적어도 이 넓은 설원이 지면이 아니라 바다가 아닌 한, 얼음이 짜거나 할 일은 일어날 리가 없는…

“어?”

잠깐만 바다라고?

그럴듯한 이야기에 나는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일거에 터뜨리듯 한 방에 내리찍는다.

콰아아앙⎯!

고막을 울렁이는 굉음과 함께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 방에 적어도 수십 미터는 파고든 것 같음에도 빙하의 두께는 만만치 않았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수십 번, 수백 번 하면 되지!”

나는 자세를 잡고는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몇 번을 휘둘렀을까.

사방으로 난비하는 얼음 조각 사이로 짭짤한 물기가 튀었다.

확신을 하자마자 마지막으로 남은 빙하 층이 깨지며 지면이 일거에 무너져내린다.

푸웅!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빙하의 밑은 바다였다.

설마 하긴 했지만, 그 넓은 설원이 전부 바다가 얼어서 만들어진 땅이라니.

나는 최소한으로 숨을 쉬며 밑으로 헤엄쳤다.

내 추측이 맞다면 27층의 숨겨진 조건은 바로 여기에 있을 터.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순 없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묘한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괴수가 우악스러운 엄니를 내밀며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이대로 순순히 끝낸다면 탑이 아니지.”

그럼 그렇지.

그 모습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이쪽도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나는 검을 가볍게 털어 레이피어로 변화시킨 후, 괴수의 머리를 향해 재빠르게 내찌른다.

수압으로 인해 저항력이 강했음에도 쏜살같이 뻗어져 나간 검은 괴수의 몸을 절반으로 쪼갰다.

아주 깔끔한 일격.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괴수의 시체 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음, 저건?’

나는 우연찮게 포착한 물건을 재빨리 낚아챘다.

손아귀에 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쇠?”

〈열쇠(D)〉

-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

-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찔러대진 맙시다! 함부로 문을 열었다간 절도범으로 낙인찍히니까요.

괴수에게서 드랍된 것은 닳을 대로 닳은 작은 크기의 열쇠.

여러모로 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대충 포켓에 찔러 넣었다.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열쇠 가지고 머리를 싸매 봤자 시간 낭비다.

그렇게 한참을 헤엄쳐 수면의 끝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거대한 규모의 신전이 있었다.

새파란 바다 속 백옥 같은 신전.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 외견에 나는 감탄했다.

‘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모습.

철컥!

혹시나 싶어 신전의 문을 손으로 흔들어 봤지만, 공교롭게도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굳게 닫힌 문에는 자물쇠가 있었다.

‘혹시?’

포켓에 손을 넣어 열쇠를 집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렸지만, 안타깝게도 열리진 않았다.

하긴 우연도 한두 번이지 매번 입맛 좋을 대로 흘러갈 리는 없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열쇠를 빼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콰득!

섬뜩한 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박살난 자물쇠가 덜렁덜렁 달려 있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떠오른 시스템창.

〈TIP. 신전의 열쇠는 괴수를 쓰러뜨리면 랜덤으로 드랍 됩니다.〉

- 자물쇠는 쉽게 박살 나지 않으니 억지로 문을 열 생각은 하지 맙시다!

아무 말 없이 시스템창을 바라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 쉽게 열리는데?’

여기 자동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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